【 1인 캠페인 – 아이들의 목숨 】
부부싸움 끝에 아이를 던져서 숨지게 하였다는 기사를 보고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리고 중국에서도 싸움 끝에 유모차에 있는 아이를 던져서 숨지게 하였고 그 가해자는 사형을 받았다는 기사도 보았다. 어른들 싸움에 몸을 스스로 가누지 못하는 아이들의 목숨이 위협을 받고 있다. 화가 난다고 굳이 누워있는 아이를 잡아채서 던지고 유모차에 있는 아이를 꺼내어 던지는 행위를 하는데 어떤 동기가 발동하는 걸까? 무엇보다도 상대가 아끼는 소중한 것을 훼손하여 상처를 주겠다는 의도가 있었겠다는 생각이 제일 먼저 든다. 타인에 의해 회복되지 않는 손상을 받는 것은 자존심이 아닌 타존심이 크기 때문일 것이다. 타인에 의해 자신의 가치가 변할 수 있다는 것은 타인에 의존하여 생성된 마음이기 때문인 것이다.
하나의 행동을 수행하는 데에는 동기 형성을 시작으로 하여 무수히 많은 뇌 전달 신호가 있어야 진행이 된다. 이 모든 단계가 짧은 시간에 이루어지는 극도의 흥분상태에서 자신을 제어할 수 있는 작동기전을 하나씩 마련해야 된다고 본다. 만일 이러한 대비를 하지 않으면,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 자신을 놓아둘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린 자존심이 상한다면서 자신의 자존심을 건들거나 훼손시킨 사람에 대해 증오심을 키운다. 그런 증오심이 자신의 행동을 제어하지 못하고 타존심의 잣대로 의도하지 않았겠지만 아이들의 목숨을 앗아가는 상황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선녀와 나무꾼이라는 동화를 새로운 관점에서 살펴본 적이 있다. 아이들에게 공공연히 읽어주는 동화인데 이 내용이 성매매와 관련되었다하여 많이 의아해 했다. 어떻게 해서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지 궁금했던 만큼 해석을 들은 뒤에는 ‘그렇구나’ 라는 깨달음이 있었다. 사냥꾼으로부터 도망치는 노루가 나무꾼에게 도움을 요청하였고 나무꾼 덕에 목숨을 부지한 노루는 은혜를 갚겠다고 하면서 자신이 갚는 것이 아니라 선녀를 통해 갚아다는 것이었다. 왜 노루는 처음부터 자신의 노력으로 은혜를 갚으려 하지 않았을까?
자신의 욱하는 성향을 스스로 제어하지 못하고 아이들의 목숨을 앗아간 행동을 한 것처럼, 목숨을 구해준 나무꾼에게 스스로 노력하여 은혜를 갚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불행을 앞세워 자신의 입장만 챙긴 노루처럼, 이들에게는 자신의 생각을 점검해 볼 수 있는 제어체계가 필요하다.
우리가 아이들에게 하고 있는 성교육‧성폭력예방교육 모두 이러한 제어장치를 만들 수 있도록 도와주는 작업이 들어가 있다. 모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놓이지 않게 하기 위해서 필요한 정보를 제공해 주고 스스로 대비할 수 있게 하여 자신에게 이로운 삶을 살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자신에게 이롭게 사는 것이 기반이 되어 타인을 이해하고 배려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 바로 제어장치의 유무와 관련이 된다고 본다. 자신을 스스로 제어하지 못하고 타인과 부딪쳐서 제어가 되는 것이라면 그런 자신에 의해 타인은 당연히 아프고 자신도 아플 것이다. 스스로 자신을 제어하기 위한 기준으로 사회 문화적인 잣대에 맞추어 보고 타인의 삶을 살펴보며 완성해 가면 되는 것이다. 이미 형성된 질서 속에 자신을 잘 맞추어 가면 되는 것이다.
‘고슴도치 사랑’이라고 강의가 끝나갈 무렵에 사용한다. “자신에게 고슴도치 가시와 같은 장치가 있다면” 그리고 타인에게도 자신과 같은 그러한 가시가 있을 거라고 가정하고 상대를 대한다면, 자신의 가시로 타인을 찌르지 않고 자신도 타인으로부터 찔리지 않을 적절한 거리를 유지할 수 있어 서로가 모두 좋은 관계를 이루어 갈 수 있을 것이라고 마무리 한다. 제어장치를 갖는 다는 것은 이런 것이다. 그리고 내가 가진 제어장치가 타인에게도 있을 것이라고 믿어야 한다. 동등한 관계는 이러한 믿음을 전제로 하여 형성되어질 것이다. 그런데 아이들은 우리 어른들과 동일선상에 설 수 없다. 우리가 무조건 보호해야 되는 대상인 것이다. 아이들을 대상으로 범죄를 저질러서도 안 되고 범죄의 피해자가 된 아이를 탓해서도 안 되는 것으로, 적어도 우리 어른들이 자신만의 제어장치를 구축해 놓는다면 어이없이 아이의 목숨이 사라지진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행가래로 142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