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인 캠페인 – 친절하지 못한 VS. 나쁜 친절】
친절한 사람을 만나면 기분이 좋다. 그리고 그 기분이 자신의 삶에 대한 애착을 만들어 내고 타인과 화합과 소통할 수 있는 기운까지 불어넣어주는 것 같다. 필자도 친절에 상당히 민감한 편이다. 친절은 사람으로부터 받는 대접의 한 유형 같다. 그래서인지 친절한 곳엘 가면 잘 대접받고 간다는 생각이 들고, 그렇지 않은 곳에서는 무시감이 느껴지고 왜 갔나라는 자책을 할 정도로, 우린 불친절함의 대가를 늘 이고지고 사는 것 같다. 무엇보다도 자신이 받은 그 불친절함이 상대로 인한 것인지, 나로 인한 것인지 명확하지 않기에 더욱 그러는 것 같다. 모두가 친절하다고 얘기해 주었는데 자신만 그것을 못 느꼈다면 차별을 받은 것이란 생각이 들것이고, 모두가 불친절하다고 느꼈다면 그 사람이 일부러 불친절하게 한 것인지 원래 그렇게 불친절한 사람인지 분간을 할 수 없기에 우리 삶에 ‘친절’이라는 것은 상당히 애매한 형태를 띠고 들어와 있는 것 같다.
우선 우리 삶에 가장 만연해 있는 친절의 모양새는 특정인이 따로 없이 당연하게 베푸는 친절로 이는 단체문자를 받았을 때와 같은 느낌인 것 같다. 문자의 내용은 온통 좋은 말과 좋은 의미 투성이지만, 이름을 불러주지 않으면서 가득 담긴 그 내용에 대해 왠지 진실성이 느껴지지 않으면서 성의가 없다라는 생각을 불러일으키고 결국엔 관계에 까지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 같다. 그리고 또 하나, 백화점의 인형 같은 안내 직원들이 친절한 모습의 전형일 순 있으나, 친절함보다는 왠지 모를 거부감과 어색함이 먼저 느껴지기도 하는 것 같다. 이는 성의가 없다곤 할 수 없으나 단진 본연의 업무를 잘 수행하고 있는 것으로 보여지기 때문인 것 같다. 그래서 그녀들은 프로라고 볼 수 있고, 다른 서비스 직종에서는 그녀들을 벤치마킹하여 친절하지 못했던 부분을 보완해 볼 수 있다고 본다.
친절은 베푸는 것이지 친절은 준다고 하거나 빼앗는다고 하거나 하는 표현으로는 사용되어지지 않는다. 상대에게 베풀며 대접을 하는 것이 친절이 가진 형태로, 친절하지 못한 것은 제대로 베풀며 제대로 대접하지 않은 것으로 볼 수 있는 것 같다. 일상생활에서 친절하지 못한 경우를 찾아보니, 이런 일이 있었다. 구입한 물건이 여성 핸드백인데 사용하다보니 수선이 필요하게 되었단다. 그래서 시간을 내어 매장엘 가서 수선을 맡기려 했단다. 만약 이 상황에서 점원은 어떤 친절을 베풀 수 있을까? 아니면 점원은 어떻게 하였기에 친절하지 못했을까? 필자는 이 상황에서 점원이 베풀 수 있는 친절은 “불편을 끼쳐드렸다. 잘 가지고 오셨다. 수선은 어느 정도의 시일이 소요된다. 잘 수선해서 찾아가실 수 있도록 연락을 드릴테니 연락처를 알려 달라.”며 수선증을 써준다면, 이는 친절을 베풀고 받은 것이란 생각이 든다. 그런데 얘기를 들어보니, 가져간 핸드백을 뒤적뒤적 거리며… 내가 여기 매장에서 3년 넘게 일했는데 이런 가방을 본 적이 없다. 그러면서 잠시 다른 손님 상대하러 가겠다 하더니 돌아와선 속에 있는 미니백을 괜히 꺼내서는 이거는 가져가실래요 하기에 보니 고정되어 있는 것으로 분리가 불가능했고, 고객이 무엇이 문제가 되느냐 물으니 결론은 자기가 본적이 없는 백이라는 말만 하더라는 것이었다. 이야기 속 점원은 한마디로 정말 친절하지 못했던 것 같다. 수선을 맡기는 절차대로 진행을 하면 되는 것이 아니었을까? 이후의 상황을 물으니 찾으러 오란 연락을 받고 가니 자신의 회사 백이 맞고 잘 수선하였다는 말을 하였더란다. 뒤늦게 죄송하다는 말을 건내었다고 하였다. 이런 상황은 기분이 나쁘고 말 수 있다. 일상생활에서 이런 일은 비일비재하다고 본다. 친절은 베푸는 것이다 보니 자신에게 차례가 오지 않을 때도 있는 것 같다. 아이러니하게도 말이다. 이처럼 친절하지 못한 것에 대해서는 따지고 바로 잡을 수 있긴 하다. 다만 힘이 들고 속이 상하고 잊기가 쉽지 않는다는 어려움이 있을 뿐이다.
문제가 되는 친절은 위와 같이 ‘친절하지 못한 것’이 아닌 바로 “나쁜 친절”이다. 왜냐하면 친절의 형태는 모두에게 좋게 다가오는 것이기에, 친절을 베푸는 “의도”가 무엇인지가 정말 중요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아이들에게 친절을 베풀며 ‘다가오는’ 사람. 자신의 ‘의도’를 숨기고 친절한 이의 모습을 띠고 다가오기에 아이들은 그 베푸는 친절에 경계를 풀게 되고 좋은 사람인 줄 알았는데 결국엔 친절함을 가장한 좋은 사람이 아닌 사람들이 아이들에게 범죄피해를 입히고 있다. 나쁜 의도를 가지고 베푸는 친절은 범죄와 연결이 된다고 본다. 양의 탈을 쓴 늑대처럼, 친절이 때로는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편리한 도구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아이들에게 해야 하는 교육은 친절한 사람 조심해라 아니 낯선 사람이 베푸는 친절을 조심해라도 아닌, 너희가 친절을 베풀고자 할 때는 그 이유를 상대가 분명히 알도록 설명을 잘해야 하고, 나아가 너희가 친절을 받게 되었을 때는 감사함을 전달하거나 거절하기에 앞서 베푼 의도를 헤아려야 함을 알게 하는 것이다.
한 미국 초등학교에서 학생들을 대상으로 실험한 영상을 본 적이 있다. 내용인 즉, 무거운 짐을 앞에 두고 남자 노인이 지나가는 학생에게 짐 옮기는 것을 도와달라고 하는 내용이었다. 아이들은 그 제의를 받았을 때 모두 이야기를 잘 듣고는 한결같은 대답을 하였다. “당신을 도울 수 있는 사람을 데려 오겠다”고 말이다. 그러고는 그 현장을 주저 없이 지나갔다. 또 하나의 영상은 우리나라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것으로, 학교 근처 길에 깁스를 한 남자가 절뚝거리며 아이를 부르더니 차에 열쇠가 떨어졌는데 네가 주워주면 좋겠다고 하였고, 아이들은 고민하는 듯 주춤하더니 결국엔 열린 차문 안으로 들어갔다. 우리의 아이들이 미국의 아이들처럼 되기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 친절을 받는 이의 기쁨만큼 베푸는 자신에게도 기쁨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행가래로 149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