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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인 캠페인

잘하는 사람에 대한 존중부터 [152호]

작성자행가래로|작성시간18.03.08|조회수550 목록 댓글 0

1인 캠페인 잘하는 사람에 대한 존중부터



  4대악이 이 세상을 어지럽히는 절대 악이라고 보았다. 화목하고 행복해야 하는 가정에서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일어나는 폭력은 정말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고, 서로 아는 사이든 모르는 사이든 은밀하게 일어나는 성폭력도 정말 끔찍한 일이고, 동년배끼리 오랜 시간을 어울리며 우정을 쌓고 토론을 하는 상아탑에서 이유 없이 폭력이 행해지는 것은 분노를 사기에 충분할 만큼이고, 마지막으로 사람들이 먹는 것을 가지고 장난치는 불량식품 근절은 제일먼저 이루어야 할 과업으로 보였다. 그런데 근래에 뉴스에서 접하게 된 보육시설에서의 일들은 얼굴 표정을 일그러뜨리고 심장이 벌렁벌렁 거리면서 다른 어떤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만들었다. 그리곤 차마 아는 척도 모른 척도 할 수 없는, 마음이 너무나도 아픈 이슈가 된 내용이었다. 얼마만큼 잘못했느냐 또는 어떤 행위를 했느냐 또는 CCTV에 무엇이 찍혔느냐가 중요하지 않을 만큼, 아이에게 일어난 그 일이 아이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가 너무나도 중요하게 다가왔다. 새삼스레 모든 국민이 이렇게 반응하는 건가 하기엔 예전에도 이런 내용은 종종 보도를 보아왔다. 그때와의 차이라면, 아동이 피해를 입는 상황을 우리도 볼 수 있다는 것에 있다. 그래서 인지, 이에 대한 대처방안에 CCTV설치에 대한 그리고 보육시설 관리·감독 강화에 대한 내용이 많이 나왔다. 그런데 피해사실이 담긴 CCTV내용을 보면, 하나같이 보육교사들은 CCTV의 사각지대를 너무나 잘 알고 있어서 어두운 방으로 아이를 데리고 가거나, CCTV 귀퉁이에 피해아동의 피해상황이 반만 보이거나 그랬다. 현재 발각된 상황이 이정도 인데, 과연 CCTV 설치가 피해를 예방할 수 있는 진정한 대안이 될 수 있을까? 또한 명백히 CCTV에 가해행동이 찍혔음에도 불구하고 법원에서 “상해 고의가 없는 우발적인 범행인 점과 지속적으로 범행이 이뤄지지 않은 것으로 보이는 점” 즉, 상습학대가 아니라는 이유로 기각처리를 하는 국민정서에 반하는 상황도 펼쳐지고 있는데, CCTV 가 대안이 될 수 있을까?라는 우려가 든다.
  나쁜 짓을 하는지 안 하는지 감시하자, 만약 발각되면 증거로 써서 여지없이 벌을 주자라는 의미로 진행되는 내용들이 들리면 속이 후련해야 할 텐데, 필자는 몹시 속이 더부룩해지고 체한 것 마냥 속이 답답하고 팔·다리가 저렸다. 절대로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 일어나고 펼쳐졌는데, 그리고 우리가 대처를 하고자 하고 대안을 마련하는 것이 너무나 임시방편적이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과연 처벌이 약해서 아니 처벌받을지 몰라서 그들이 그런 가혹행위를 서슴없이 했던 것일까? 화가 나서 그런 행위를 하고자 할 수 있지만 해서는 안 되는 것이란 것을 명심하게 할 방안은 되지 않는 것 같다. CCTV가 있기에 “안 하겠다”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안 보이는 곳에서 해야겠다”로 갈까봐 더욱 조바심이 나고 겁이 난다. 독일의 경찰들처럼 몸에 CCTV를 달고 혹여 있을 경찰의 가혹행위도 예방하고 경찰의 임무수행에 협조를 잘 하였는지 확인할 수 있는 CCTV라면 모를까 장소를 비추어서 장소에서 일어나는 우발적인 상황들을 감시한다는 것은 생각만큼의 효과를 얻을 수 있을 것 같지 않아 보인다.
  펼쳐지는 상황에 몸을 맡기니 거부감이 들었다. 무엇 때문일까. 「일·가정의 양립」은 누구를 위한 과업일까. 여성들이 집에서 애를 잘 봤으면 이런 일이 없다? 보육시설의 양육아동 수를 줄이면 아동들이 잘 보호 받을 것이다? 라는 의견들도 보았지만, 현 시점에 맞지 않아 보인다. 신장된 여권에 따라갈 수 있는 사회구조가 되지 않기에 여성들의 의무가 특권이 되어버렸다. 아이를 낳을 수 있는 여성이 아이를 낳지 않겠다고 하면서 우리나라가 저 출산 국가가 되어버렸다. 아이를 낳고 좋아하는 일도 할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 주겠다 하여 여성들이 아이를 낳았다. 그런데 그 아이가 피멍이 들고 죽어나오고 있는 현실이 펼쳐지고 있다. 그럼, 이쯤에서 여성들이 끔찍한 세상에 자신의 아이 낳기를 포기하거나, 아이를 낳은 여성은 아이를 끔찍한 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일을 그만두고 집으로 들어가야 하는 것이 여성들의 앞에 놓인 선택지인 것일까? 돌아가는 상황을 보아하니, 아무도 원하지 않는 선택지 인 것 같았다. 세상은 노동인구를 필요로 하고 노동으로 인해 납부되는 세금도 필요하고, 무엇보다도 어렵게 맺은 파트너를 놓치고 싶어 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도달한 생각이 있다. 보육교사를 이 시대를 이끌어가는 자들의 파트너라고 보자는 것이다.
  우리의 삶에 깊이 관여하는 파트너, 그들을 우리가 매도하고 의심스러운 시선으로 의혹 가득한 눈길로 보는 것이 아니라, 시대에 쓰임 되는 가정의 엄마 아빠를 위해 애를 써주는 파트너로 보자는 것이다. 자격증을 어떻게 땄는지가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그들을 파트너로 인정했는지의 의식이 필요한 것 같다. 그동안 아이들을 잘 키우고 가정을 잘 보듬어준 진정한 보육교사의 노고도 있을 텐데, 한 순간에 같이 매도되어 물거품이 되는 것에 안타까움이 들었다. 잘하고 있는 사람은 계속 잘하라고 응원해 주는 시선이 있어야 되지 않을까? 어렵게 공부하고 자부심을 가지고 일했던 보육교사가 어디 가서 보육교사라는 명함도 떳떳하게 내밀지 못하게 된다면,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직업으로 선택하는 것에도 좋은 영향을 주지 못할 것 같다. 좋은 사람들이 선택할 수 있는 직업이 되어야지 이런 식으로 흘러가다가는 마음의 열정은 없고 시험만 잘 보는 사람들이 우리 아이들의 곁에 있을까 더욱 염려가 된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가, 자격증을 따고 아이들을 돌보겠다고 나선 사람에 대해 어떻게 자격증을 땄느냐의 매질보다 우리가 우리 자리에서 열심히 일 할 수 있도록 존재하는 그들에게 무한 신뢰와 감사의 마음을 전하는 것이 먼저 선행되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영상은 너무나도 참혹하고 끔찍했고 성인인 필자도 감당하기 어려운 폭력이 있는 상황이 보였다. 그런 식으로 두 살짜리 아이가, 네 살짜리 아이가 세상을 알았다는 것이 참 많이 무서웠다. 누가 그들을 그렇게 만들었는가? 누가 그들을 그리 해도 된다고 생각하게 만들었을까? 다양한 가정의 아이들이 맡겨지고 아이들도 다양성을 띠다보니 그럴 수 있겠다 라는 해석이 따라오듯, 각 가정의 다양함을 인식할 수 있도록, 시간에 쫓겨 아이만 툭 던지듯 맡기는 것이 아니라 아이에 대한 설명과 아이 엄마에 대한 이해를 먼저, 제대로, 그들에게 시켰다면, 좀 다른 상황이 펼쳐지지 않았을까. 폭력은 어떤 경우에도 용납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다시금 입증이 되었다. 4대악에 들어간 가정폭력·성폭력·학교폭력·음식으로 하는 폭력(불량식품)을 근절한다는 것은 “함께 다 같이 잘 사는 사회를 만들자는 것”에 있다고 생각하지, 누구 하나는 살 수 없는 세상을 만드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보육교사와 아이를 맡기는 엄마·아빠가 함께 잘 살 수 있는 세상이 만들어지기 위해 필요한 것은 서로 꼭 필요한 “파트너”로의 인식이라고 생각한다.  <행가래로 15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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