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인 캠페인 – 경고문 】
아가사 크리스티(Agatha Christie) 소설 중에 ‘무죄의 시련(Ordeal by Innocence)’이 있다. 한 가정에서 살인사건이 일어났고 그 구성원 중의 한명이 용의자가 되어 수사가 진행되었고 결국 실형을 선고(宣告) 받고 그 형을 살다가 감옥에서 죽었다. 그렇게 모든 것이 마무리 된 집에 어느 날 한 사람이 찾아온다. 이 때 이 한 사람이 불러일으킨 상황에 대해 가족 중 한 사람이 이야기를 했다. “다시 우리는 서로를 의심하며 범인이 누구인지 밝혀질 때까지 괴로워야 하는군요.”라고 말이다. 죄를 짓지 않은 자는 죄를 지은 자가 누구인지 밝혀지기 전까지는 죄가 없음을 증명해도 아무도 믿지 않을 거라는 것을 죄 없는 자의 시련이라고 한 것이다. 요즘 이 소설의 제목이 참 많이 생각나는 세상에 살고 있는 것 같다. 질서를 잘 지키려 한 자들은 질서를 무너뜨리려 하는 자들에게 경고하는 문구를 늘 보고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요즘은 여기저기 적혀있는 많은 경고문들이 시야에서 사라질 날이 없다. 마음을 다해 세상의 질서와 흐름을 잘 가꾸는 자들에게는 어떤 세상이 어울릴까?
요즘은 남의 동네 놀러가는 것에 마음이 쉽게 내키지 않는다. 괜히 그 동네 가서 욕먹을까 두려워서 말이다. 들어가는 입구에서부터 어디에 왜 왔는지 얼마나 있다 갈 건지 더 나아가 자고 갈 것인지 까지도 묻는다. 발을 땅에 딛는 순간부터 시야에 들어오는 여러 가지 경고문을 열심히 본다. ‘주차금지’, ‘경적금지’, ‘소음금지’, ‘금연’, ‘통화금지’, ‘보행금지’, ‘추락위험’ 등등. 처음 간 이 에게는 매우 친절한 문구 일 수도 있으나, 매일 이곳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어떤 느낌일까? 그렇게 통과하여 올라타게 된 엘리베이터 안에는 무려 여러 가지의 안내문, 공고문이 붙어 있다. 휴~. 좋게는 ‘소통을 열심히 하는 구나’라고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또 한 켠 에는 상당히 일방적인 소통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안내문에는 층간 소음에 대한 내용과 종량제·재활용 쓰레기에 대한 내용과 계단에서 담배피우지 말라며 꽁초도 버리지 말라는 내용 등이 대다수 였다. 콕 집어서 잘못한 그 누군가에게 알려주면 되는 내용인 것 같은데, 주차하면 안 되는 공간에 주차를 할 때, 경적을 울리면 안 되는 곳에서 경적을 울릴 때, 담배를 피우면 안 되는 곳에서 누군가 담배를 필 때, 다녀서는 안 되는 통로에 누군가 다니고 있을 때, 그 때 그 사람에게 해주면 좋았을 내용들을 때를 다 놓치고는 그런 행위를 생각조차 못하는 사람에게 경고문을 보여주는 것 같다. 다니면 안 되는 길에 잔디가 죽어 길이나니, 몇 년 뒤에 그 곳에 튼튼하게 길을 만든 것을 본 적이 있다. 안 된다고 해서 안 다녔던 사람들은 그 길이 생긴 것을 보고 무슨 생각이 들었을까?
예전에 일본에서 기본질서 세우기를 위해 공원에서 수도꼭지를 틀고 사용 후 잠그는 사람에게 수도꼭지를 잠가주셔서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는 요원이 있었다고 한다. 처음 이 야기를 들었을 때에는 너무나 당연한 것에 대한 반응 아닌가 했는데, 요원이 지켜 서서 물 안 잠그는 이에게 물 잠가라 하는 것보다는 훨씬 나은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일본사람들의 질서 지키기 의식은 단연 눈에 띄는 것 같다. 우리나라에선 관리자의 개념이 잘 못한 경우에 대해서만 그 존재가 드러나는 것 같다. 사실 그간의 사건·사고에서도 보여 지듯이 책임자·관리자에 대한 문책이 가장 우선하는 것을 보니, 왜 관리자·책임자들이 맡은바 업무를 수행하기 위해 “안돼요”만을 남발하고 있는지 알 것 같다. 자연스러움을 유도하기 보다는 그것이 책임자의 권한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무척 안타깝게 느껴진다. 행사장에 관리 요원들이 존재하는 이유는 뭔가가 ‘안 된다’라고 말하기 위함이라고 본다. 이용자의 사정이 모두가 다를 텐데 일관적으로 ‘안 된다’고만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말이 안 통하니 꾀를 부릴 수밖에 없다고 본다. 관리자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될 것이다’라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사방에서 보이는 경고문은 누구를 위한 것일까? 꾀를 부리지 않았는데,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는데, 이런 것을 잘 아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는데, 세상에는 더 많은 경고문이 늘어나고 있고, 지키지 않은 것에 대해 서로 감시만 열심히 하고 있다. 감시하면 되는 것일까? 경고하면 되는 걸까? 정말 그럴까? 아이들을 혼내는 상황도 곰곰이 돌이켜 보면 어른들이 잘 알려준 것에 대해서는 그다지 크게 혼내지 않는다. 알려주지 않은 것에 대해 행한 것이 어른의 기준에서 크게 벗어났을 때 어른들은 아이들을 대부분 혼내는 것 같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혼내기를 기다리는 것 보다 하나라도 친절하게 알려주는 것이 보다 나은 것이라고 훈육방법으로 나와 있지 않은가?
꾀를 부리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다. 그건 세상이 우릴 강하게 억압해서 인 것일까? 아니면 세상이 우리를 소외시키기 때문인 것일까? 무수히 많은 경고문들을 보면서 자신과 연결시키는 사람이 몇 명이나 있을까? 자신에게 하는 말이라고 받아들이는 사람이 몇 명이나 있을까? 자신과 관련 없다고 생각하는 경고문은 왜 세상에 존재하는 것일까? 그 경고문이 있기에 주차 위반을 하거나 다른 이들에게 불편을 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분명 알겠는데, 가게에 도둑이 들어 물건을 훔쳐가는 것도 알겠는데, 가게 주인은 ‘도둑사절’이라고 적어 놓지 않는다. 세상은 어느 쪽으로 강화되어야 하는 것일까? 무엇보다도 분명한 것은 사람들은 경고문이 있는 것에 길들여지고 있지만, 행동에는 큰 변화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떤 것이 사람들의 의식과 행동에 변화를 불러올 수 있을까? 그리고 어떻게 하면 잘하고 있는 이들이 불편을 느끼지 않고 계속 잘 할 수 있게 할 수 있을까? 그러면서 이런 이들이 누군가에게 귀감이 되도록 어떻게 하면 될까? 함께 잘 살기 위한 정말 좋은 방법을 찾아야 하는 시기인 것 같다. 경고문이 더 늘어나기 전에…. <행가래로 154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