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인 캠페인 - 옳은 vs. 옳지 않은 】
우리는 아이들에게 정확한 내용을, 적절한 방법을 사용하여, 제대로 가르치고자 하는 욕구가 분명 있다고 봅니다. 성폭력을 예방하는 교육 내용에는 여러 주제가 있지만, 꼭 한 번은 거론하여 짚어 보는 내용 중에 윤리와 규범부분이 있습니다. 아이러니 하게도 성폭력 예방교육은 윤리 교육의 목적만 있는 것은 아니기에, 그 수위를 조절 하기위해 많은 논의를 하며 실제에 적용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다양한 방법을 사용하며 우리가 아이들이 깨닫길 바라는 내용은 단 하나, “옳고 그름”을 구분하는 기준입니다. 우리의 아이들이 “확신”을 가지고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다면, 우리의 아이들이 그렇게 살고 있다고 우리 어른들이 확신하고 있다면,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어떻게 펼쳐지게 될까요?
아이들이 많은 곳에서 “옳고 그름”에 대해 배우고 있습니다. 성교육시간에도 배우고 있으니 기회는 정말 많이 접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를 실행하는 기회는 얼마만큼 갖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조금 의문이 듭니다. 옳은 것과 그른 것을 판단하였다면 그 다음에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바로 실행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아이들은 잠시 주춤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왜일까요? 우리 어른들의 평소 사용 언어에서 그 답을 찾게 되었습니다. 아이의 의견을 물어보는 것 중에 “어떻게 생각하니?”에 대해 답을 기다리며 듣기보다는, 이미 답을 제시하고 선택하게 하는 질문이 대다수였습니다. 평소에 아이의 의견을 물을 때 사용하는 한 마디가 기억나세요? 의견을 듣기 위해 어떤 질문을 하시나요? 마트에 가면 자주 들을 수 있는 말이 바로 “좋아?”였습니다. 마트에서 울고 있는 아이와 부모를 발견하게 되거나, 아이를 앞에 두고 다투고 있는 부부를 발견하였을 때 들을 수 있는 말이었습니다. 아이가 투정을 부리면 부부가 싸웁니다. “아이가 싫다는데 왜 자꾸 그래?” 또는 “얘는 좋다 싫다도 확실하게 말을 못해!” 이런 말을 듣게 됩니다. 이런 어른들의 말이 우리의 아이가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데 무슨 영향을 끼치게 된다는 것일까요?
상대의 의견을 듣고자 할 때, “어때?”가 아니라 “좋아? 싫어?”가 된다면 답을 하게 되는 선택의 폭이 상당이 줄어들게 됩니다. “좋아? 싫어?”로 물었으니 “좋아”, “싫어”라고 답변을 하게 됩니다. 아이가 어른에게 대답을 할 때는 예의를 갖추고 답을 해야 한다는 것을 배웠을 텐데, 그것을 고려하기도 전에 쉽게 선택을 해버리게 됩니다. “어때?”라는 질문을 통해 아이가 말하는 내용과 방법을 선택해 볼 수 있었을 텐데, 그런 기회가 전혀 주어지지 않는 다는 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평소에 ‘옳고 그른 행동’을 판단하여 적용해 볼 수 있는 기회가 없다는 것입니다. 언제나, 늘 ‘좋고 싫음’에 대해 자동사고하게 되어 있기에 그동안의 성교육 언어도 그랬던 것 같습니다. 어린이 대상의 교육내용에 “좋은 느낌, 싫은 느낌”이 있습니다. 처음에 이 교육법을 접하였을 때는 정말 획기적인 내용의 방법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아이가 느끼는 좋고 싫음을 활용하여 성폭력이라는 어려운 주제를 거론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뭔가 허전하고 완성되지 못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피해가 발생하게 되면 그 아이가 예방교육을 받았는지의 여부에 대해서는 논의가 되지 않습니다. 가해자의 행실에 대해 문제를 삼고 단죄하기 위한 여론이 더 크게 형성됩니다. 가해자가 가해예방교육을 받았느냐? 일전에 말씀드렸듯이 가해자로 가정하고 교육을 할 수가 없기에, 피해예방교육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라고 말입니다. 피해여성보호를 지원하며 피해가 발생된 상황을 짚어보며 도대체 어떤 내용, 어떤 방법으로 예방교육을 해야 하는지의 딜레마에 빠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가해자에 대해 정의가 내려지기에 그런 가해자를 피할 수 있는 교육방법이 논의되고 구성되어집니다. 이는 당연한 수순이지만 ‘특별한’내용의 교육방법이 따로 있는가 라고 생각하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보여집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이 딜레마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방법을 찾게 되었습니다. 바로 “옳고 그름”에 대한 아이들의 생각을 강화시키고 실행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진정으로 필요하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옳다고 생각했지만, 믿음을 갖지 못하였기에 행동으로 옮기지 못한 아이들의 피해사례를 접하면서, 싫어서 싫다고 말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은 상황에 대해 우리 아이들에게 한 가지를 더 주어야 겠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바로 “옳지 않은 행동”과 “옳은 행동”에 대한 기준점을 말입니다. 좋고 싫음이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에 분명히 존재합니다. 수용되어지지 않기에 폭력으로 진행이 됩니다. 싫은 것과 좋은 것의 경계도 애매모호한 부분이 있기에 피해의 정황을 설명하는데 있어 어려움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바로 여기서 “옳지 않은 것”에 대한 정의는 모두가 동시에 같은 결론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피해를 ‘얼마만큼’ 입었느냐! 그것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느냐!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옳지 않은 행동’은 무엇이었고 그것을 바로 잡기 위해 할 수 있는 ‘옳은 행동’은 무엇이냐에 모두가 관심을 갖고 따져보아야 한다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옳고 그름의 판단은 시대가 변하고 세상이 달라져도 크게 변하지 않는 다는 것을 다시금 느끼게 되었습니다. ‘좌측통행’에서 ‘우측통행’으로 바뀌었지만, 모두가 서로 불편함 없이 다니기 위해서는 이 규칙이 지켜져야 하고 직접 행동으로 실행을 해야만 한다는 것이 바로 “옳은”것에 대해 가지고 있는 입장이라고 생각합니다. 윤리라는 것은 “안 된다”가 기준이 아닙니다. “옳지 않은”것에 대한 기준도 아닙니다. 바로 “옳은”것을 “해야만 한다”의 근간이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