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인 캠페인
인정받다
인정받기 위해 일을 열심히 하는 것과 일을 열심히 하였더니 인정을 받게 되었다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는 것일까. 괄목상대(刮目相對)라는 말도 떠오른다. 괄목상대는 눈을 비비고 다시 보는 것으로 삼국지에서 주유가 죽은 후, 도독이 된 노숙이 경시하던 여몽과의 대화에서 나온 말이다. “나는 이제껏 그대가 무술만 아는 줄 알고 있었는데, 지금 보니 그대의 학문이 뛰어난 것이 이미 옛날 오 지역의 시골구석에 있던 아몽(阿蒙)이 아니구려.” 하니, 여몽이 말했다. “선비는 모름지기 여러 날을 떨어져 있다가 만나면 눈을 비비고 다시 봐야 할 정도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라고 말이다. 어느 직군에 있든 여몽의 말처럼 자신의 자리에서 자신 스스로가 성장하며 소속된 곳의 발전에 영향을 미쳐야 된다고 본다. 주어진 일을 열심히 하는 것이 소임(所任)을 다하는 것이라 한다면, 인정받은 것은 따라오는 것이 아닐까?
사회복지영역의 관계자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꼭 나오는 이야기가 하나 있다. 직원의 유형에 대해서 말이다. 복지사업은 있는 자원만을 분배하는 것에 그치면 안 되고, 늘 자원을 발굴하고 사각지대에 대한 고민을 해야 하는 바, 그러다 보니 주어진 일을 하는데 개인차가 있기도 하다. 그래서 중간관리자들은 일은 잘하는데(성과를 잘 내는 것으로 보여 진다.) 게으른 직원(촉박하게 일을 하는 것으로 보여 진다.)과 일은 못하는데 부지런한 직원 중에 누굴 더 선호하는지에 대해 이야기가 나오면 열에 열이 첫 번째라고 이야기를 한다. 성과를 우선으로 해서 내려진 선택이 아닌, 결론은 일에 대해 부지런함을 가진 직원을 원한다는 것으로, 일을 잘하는 직원이 게으르다 하기 보다는 부지런한 것에 대한 해석이 더 필요한 것이다. 본연의 소임을 다하기 위해 노력하기 보다는 여기저기 기웃 기웃거리는 ‘부지런함’에 의해 맡은바 책임 수행에 소홀함이 있다는 것이다. 소속되어 있는 곳에서 자신의 자리매김을 한다는 것은 부지런함에 대한 자신의 기준을 조직에서 요구되어지는 수준으로 맞추어 갈 수 있어야 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하루하루가 다르게 조직에 적응하며 자신의 부지런함이 인정의 대상이 된다면, 눈에 보이는 성과에 의해 눈을 비비고 다시 보게 될 것이라고 본다.
성폭력예방교육을 수행하러 대상자에게 가면, 강사들은 대상자가 실망하는 모습을 늘 보게 되는 것 같다. 성교육인줄 알았는데, 성폭력예방교육이라는 말을 하게 되면 이런 모습을 늘 접하게 된다. 이토록 교육대상자들이 원하는 교육은 성(性)교육인데 시대는 왜 성폭력예방교육을 우리에게 하도록 하는 것일까? 그 기반에는 성폭력예방교육을 통해 성범죄를 줄이고자 하는 의도가 다분히 있을 것으로 본다. 그런데 교육대상자들은 성범죄 자체가 먼 이야기처럼 느껴지는지 성교육이 아님에 실망을 하는 것 같다. 그래도 강사들은 맡은바 소임을 다하고자 주어진 시간에 성폭력예방교육을 실시한다. 연중 1회의 교육이기에 강사들도 아쉬움이 많이 남음을 토로한다. 교육대상자의 강의를 통한 의식의 발전적인 모습을 접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하지만 매년 교육을 수행하게 되는 학교에 대해서는 분명히 다른 점이 있다. 우선은 강사가 바뀌지 않으면서 예전에 강의한 내용과 접목된 새로이 반영된 내용을 접하게 되는 학교의 학생들의 태도와 눈빛이 다름을 강사들이 느끼고 있으며, 이로 인해 성취감과 함께 강사로서 더욱 정진해야 겠다는 동기부여를 받게 되는 것 같다. 이는 특수한 경우로 보인다. 1회이지만 매년 보기 때문에, 서로가 눈을 비비고 서로의 변화된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는 것 말이다. 강사를 알아보고 학생을 알아 보고가 아니라, 서로 어떤 내용을 주고받게 되는지 짐작한다는 사실만으로도 매년 1회의 성폭력예방교육을 꾸준히 받는 학교가 정말 큰 성과로 다가온다. 꾸준히 한다는 것은 부지런함의 또 다른 말인 것 같다.
세상에 정답지와 같은 강의안과 정답을 말해줄 수 있는 강사는 없다고 본다. 강사의 강의내용에 대해 대상자가 얼마나 공감을 할 수 있는지가 가장 중요한 사안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엉텅리 강의가 무엇인가에 대해서도 강사들이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도 안다. 엉터리 강의는 내용의 부족함에 강사의 부족함 그리고 이에 더해 대상자로부터 공감을 얻지 못하는 내용으로 구성된 강의안과 강사의 태도라고 생각한다. 강사의 강의에 대한 잣대가 엉터리 강사를 골라내는 것에 사용되는 것에 안타까움을 느낀다. 전문 강사가 되기까지의 과정이 나름의 절차와 형식이 갖추어져 있고 배출하는 기관에서도 관리를 하고자 노력한다. 하지만 어디서 불신의 씨앗이 시작된 것인지 위촉했던 강사를 해촉(解囑) 하기도 하고 모니터링이라는 전제하에 따라다니면서 강의를 잘하나 못하나 감시하는 시스템으로 가고 있다. 모니터링이 나쁘고 해촉 하는 것이 나쁘다를 말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이러한 시스템의 변화가 강사들에게 어떤 영향을 주고 있는지에 대해서 말하고 싶은 것이다. 강사들이 모니터링을 통해 검증을 받는다고 생각하기 보다는 위촉해준 기관에 대해 맞춤형 강의 즉, 안전한 강의를 하고 싶어 하는 모습이 보인다는 것이다. 어쩌면 위촉해준 기관은 이것을 바라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늘 느끼는 것은, 이론적인 것에 대해 현장의 사례를 포함하여 강의안으로 갖추어 강의를 하는 강사들의 아이디어를 발굴하고자 늘 강의안 공개를 요구하는 모습을 봐서는 이도 아닌 것 같다. 어떤 소통을 하는 것이 맞는지 관리자 차원이 아닌 강사들과 함께 중지를 모아 뜻한 바를 확실히 해야 할 것 같다. 인정받기위해 애를 쓰는 전문강사가 훌륭한 강사일까 대상자의 특성에 따라 공감하기 위한 노력에 더욱 공을 들이는 강사가 인정받아야 되는 것일까. 강사들의 학력, 인적 자원의 배경이 다르게 시작하였더라도 입학을 허락받고 교육을 수료한 그 선상에선 강사들은 적어도 추구하는 바가 같다고 봐야 될 것 같은데, 어딘지 모르게 인정받기 위해 애를 쓰는 모습이 잘못된 현상인 것 같다. 이미 인정받고 전문 강사로서의 활동을 하게 된 것인데, 관리기관의 교수님과 같은 모습을 갖추어야만 인정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게 하는 것은 잘못된 방향이라고 본다.
성희롱 가해자들이 피해자에게 가해사실에 대해 사과와 함께 앞으로 재발 방지를 위해 노력하겠다는 약속이 피해자 입장에서 인정할 수 없을 지경이라면, 이는 진심이 빠져서 공감할 수 없는 상태라고 볼 수 있겠다. 인정받고자 하는 자나 인정하게 되는 자 사이에는 엄연한 진실이 존재한다고 본다. 진실을 왜곡하거나 진실을 외면하거나 진실에 대해 성의 없이 대하게 된다면 상대방의 뜻이나 의사를 존중할 수 없게 된다. 인정받기 위해 제일 우선순위가 되어야 하는 것은 바로 진실을 바로 직면하는 것이라고 본다. 잘하는 것을 인정해주고 더 잘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응원하여 나아갈 방향을 설정하는데 동참하는 것이 인정받고자 하는 마음을 제일 잘 받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자라나는 아이들도 어른에게 인정받으려는 욕구가 크다. 이는 진실이다. 인정받길 원하는데 들어야 될 말만을 되풀이 하는 어른 밑에서는 아이가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가 커지다 못해 불만이 생긴다. 어른의 인정의 틀에 가두기보다는 먼저 인정해주고 그 후에 가르치자. <행가래로 158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