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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했다 잘 못 했다 보다 중요한 것. [159호]

작성자행가래로|작성시간18.03.21|조회수34 목록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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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했다 잘 못 했다 보다 중요한 것.



  시시비비(是是非非)가 붙었다. 옳고 그른 것을 여러 가지로 따지면서 판단하고자 하며 하는 말다툼이다. 아이들과 어른들의 대화를 들어봐도 시시비비가 시비(是非)가 되면서, 옳으니 그르니 하는 말다툼이 이러니 저러니 좋지 않게 트집 잡는 말로 가득 차 있다. 각자의 입장에서 옳다와 그르다를 꺼내게 되는 동기가 무엇일까? 자신의 옳음을 자신 있게 보여주려는 것일까 아니면 상대방의 그름에 대해 확실한 근거를 가지고 고쳐주고 싶음에 있는 것일까? 혹 우리는 가르침을 받는 사람도 가르치는 사람도 배움 자체에 대해 잘했다와 잘 못 했다 라는 기준으로만 평가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함께 살다보면 서로 충돌이 있을 수 있다. 그렇게 충돌이 빈번해 지면 문제로 인식 되어 지고 그제서야 우린 서로의 생각에 대해 알아보고자 대화를 시도한다. “도대체 왜 그러니?”가 처음 건내는 한 마디라면 상대는 “넌 늘 그래”라고 화답을 하는 모양새다. 처음 보는 사이에 충돌이 발생하면 “너 뭐야?”로 시작하고 상대는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요?” 라며 다짜고짜 대화가 시작된다. 이 모든 일련의 상황이 잘잘못을 가리기 위한 두뇌싸움이 아니라 ‘함께 잘 살기 위한 하나의 방책’이었으면 좋겠다는 것이 필자가 바라는 바이다. 상담소를 찾는 가족관계의 내담자들은 시시비비를 전문가에 의해서 가리길 원한다. 폭력행위 자체가 관계 속에서의 힘의 불균형으로 인해 일어난 것이기 때문에 내담자들이 시시비비를 전문가를 통해 가리고서 얻고자 하는 것이 바로 ‘힘’이다. 외부의 도움을 통해서 ‘힘’을 얻고 그렇게 얻은 힘으로 또 상대를 통제하고자 하는 것이 내담자들이 가지고 있는 굴레이다.
  아동학대와 관련된 내용을 보면, 누가 잘못했는지 누가 잘했는지 주장하는 말들이 많이 오가는 것 같다. 특히나 아동이 사망한 경우를 보면 극단적인 모습이 나올 만큼 책임 없음을 주장하는 말을 들으면 ‘이야~ 정말 그렇겠구나’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 아니라,  아이의 사망으로 인해 망연자실한 부모에게 위로의 말을 건내지 못하더라도 자신이 최선을 다한 것을 표현하는 것이 성의가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든다. 최소한의 ‘성의’도 보이지 못할 만큼, 자신을 옹호하는 발언만을 앞세우는 모양새를 보면, 왜 이런 일에 얽히게 되었는지가 감히 짐작이 된다. 잘했다 잘 못 했다를 말하지 않는다 해도, 아동이 사망에 이르게 된 그러한 결과를 마주하게 된 이들은 ‘어쩔 수 없이’벌어진 상황이라고 받아들이려 하게 된다고 해도, 그 당시에 관계된 이들의 발언을 듣다보면 무언가 의도된 부분이 있을 것이라는 추측을 하게 되는 것 같다. 왜냐하면 초지일관 잘못이 없음에 대한 발언만 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음이 안타깝고 본인이 더 잘했으면 막을 수도 있었다는 심정의 말이 아닌, 아이가 그렇게 하길 고집을 부렸고 그런 아이를 지켜봤고 심폐소생술도 열심히 했고, 병원에도 데려가지 않았는냐 라고 말이다. 하지만 심폐소생술을 하면서도 도움을 요청하는 신고도 하지 않았고, 아이가 쓰러진 뒤 시간이 한참 흘러서 가까운 병원이 아닌 멀리 떨어진 병원을 간 것을 정말 잘못이 없다 라는 시각으로만 바라보아야 하는 것인지, 아님 정말 최소한의 성의도 보이지 않은 것에 대한 질타를 해야 하는지에 대해 의문이 생긴다.
  어떤 상황이 우리에게 잘잘못만을 가리게 만들었는지 필자는 요즘 많이 궁금하다. 성의를 보이는 삶을 사는 것보다 잘했냐 못했냐를 따지고 사는 것이 우리들의 삶에 가득 차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일까? 아이들의 세계로 눈을 돌려보면, 잘하려 하지도 않으면서 성의조차 보이지 않는 잘못된 행동을 하는 아이들이 보인다. 그런 아이들을 상대하는 어른들은 잘못했다는 것을 강조하여 훈육을 하는데, 아이들은 다음번에 잘못하지 않기 위한 다짐과 각오를 할 뿐, 어떻게 하면 잘할 수 있는 지에 대해서는 생각할 기회조차 얻지 못하는 것 같다. 잘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잘못한 것은 따끔한 충고가 필요한 것이고 성의를 보인 것은 무시해도 된다는 이 시대의 흐름이 사뭇 염려가 된다. 상담소에서는 잘한 상담과 잘못한 상담이 있는 것이 아니라, 내담자가 만족하거나 만족하지 못한 상담이 있는 것으로 봐야한다고 본다.
  하나의 사례를 공유해보고자 한다. 미술관 출구에서부터 아이의 자지러지는 울음소리가 들린다. 시선을 돌려보니 성인여성을 향해 종종 걸음으로 쫓아가다가 멈춰 서선 팔을 위로 벌리는 모양새를 취하는데 성인여성은 응하지 않고 뒤돌아서 계속 걸어갔다. 그들이 점점 필자가 있는 쪽으로 가까이 다가왔다. 아이는 계속 울며 쫓아가고 팔을 뻗길 여러 차례. 성인여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할머니는 절대로 안아주지 않아요.”라며 모자를 쓰고 썬글라스 쓴 얼굴에 계속 부채질을 하며 앞으로 나아갔다. 아이는 팔을 위로 뻗고는 계속 울었다. 꽤 오랜 시간 운 것 같았다. 그 울음소리가 커지면 커졌지 결코 사그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할머니는 절대 안아주지 않아요.”를 반복하며 빠르게 걷는 모습을 보니, 아이의 울음을 끝낼 수 있는 행위를 할머니라는 사람은 절대 할 것 같지 않았다. 그 아이는 계속 울며 종종걸음으로 쫓아갔고 이내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할머니의 행동에 대해 우리가 잘했다 잘 못 했다를 판단할 수 있을까? 다른 이들과 이 상황을 공유해보니, ‘훈육에는 간섭할 수 없다’, ‘전후사정을 모르니 판단하기 어렵다’ 라는 의견을 내었다. 필자는 할머니의 잘잘못을 떠나서 우는 아이의 입장을 한번 생각해 보자고 했다. 아이가 왜 울었을까? 모두가 필자처럼 다리가 아파서 안아달라고 하는 것 같다고 했다. 아이가 안아달라고 한다는 것, 다리가 아픈 것으로 이해된 것이다. 다리가 아픈 아이를 우린 꼭 안고 가는 방법밖에 없는 것일까? 아이는 울음으로, 몸으로 자신이 가진 곤란함을 해결해 달라고 성인에게 그토록 격렬하게 표현을 했는데, 전달이 잘되지 않았다고 생각했는지 여러 번 반복을 했다. 그 상황을 목격했을 시 필자는 ‘그냥 잠시 쉬어가면 되는 것이 아니었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리가 아프니?” 라는 질문을 시작으로 그렇다고 한다면 “할머니는 지금 안아 줄 수가 없구나. 그러니 우리 저기 그늘에서 잠시 쉬어갈까?”라고 했다면 어땠을까? 어른이 자신의 입장을 강력하게 피력했지만 아이는 수용하지 못했고, 더욱 단호한 모습으로 마주했지만 그 훈육의 결과물은 과연 무엇이 되었을까? 아이의 속마음을 알아챈 것을 성의라고 보기보다는 알아챘다는 것을 상대와 공유하는 것이 성의라고 생각한다.
  폭력상황의 피해자와 가해자를 마주하게 되면 잘잘못을 가리고자 하는 상황을 제일 먼저 맞닥뜨리게 된다. 이는 법으로 가릴 수 있는 일이다. 상담소에서 이야기를 다시 잘 나눠보게 되면, 잘잘못에 대해 시작된 이야기는 서로 성의 있게 상대에게 대응하고 수용했는지 그리고 결과적으로 성의 있고 진심어린 사과가 있었는지가 중요한 요소로 떠오른다. 그렇다. 세상에는 잘한 사람 잘못한 사람이 섞여 있다. 이들이 같이 살 수 있는 방법에는 서로의 잘잘못을 꼬투리 잡으며 서기보단 바로 ‘성의 있고’ ‘진심어린’ 태도가 있기에 편안하게 마주설 수 있다고 생각한다. <행가래로 15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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