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리아의 눈』
스펀지
『줄리아의 눈』이라는 영화를 시사회를 통해 먼저 보게 되었다. 이 영화의 장르는 스릴러로 스페인에서 만들어진 작품이다. 선천적 시력장애를 앓고 있는 쌍둥이 동생 줄리아는 먼저 시력을 잃은 언니 사라의 자살에 대해 의문을 품게 되고, 그 중심에는 사라의 남자친구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채 진실을 파헤치게 되면서 겪는 이야기 이다. 범인부터 말하자면 영혼에 빛이 없는 사람이라고 했다. 어디에 있어도 무엇을 해도 심지어 누군가에게 도움을 요청해도 아무도 그의 존재를 알 수 없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有이지만, 無인 그를 찾아내야만 했다. 줄리아는 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녀가 보이지 않게 된 순간, 그가 그녀를 찾아왔고 그의 존재를 알 수 있는 방법은 오직 더듬어야 알 수 있는 손 뿐이었다.
누구나 누군가에게 또는 어떤 일에서 중요한 사람이 되길 바란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존재를 증명해 보이고 싶어 하며 그러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다고 생각한다. 스스로 인식하던, 그렇지 않던 간에 그렇게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적어도 나는 그리하니까 말이다.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헛되었다는 생각이 들 때면 좌절과 회의 등등 나 자신을 비난하는 감정이 동시에 몰려와 힘에 겨운 것 같다. 영화에서 그의 존재를 어렴풋이 인식하게 된 줄리아에게 그는 그림자처럼 나타났다 사라졌다를 반복하다 스트레스로 완전히 시력을 잃어 개안수술을 한 그녀에게 도움을 준다는 명목으로 존재를 드러냈다. 줄리아에게 맞춤 사람이 되기 위한 때를 기다렸고, 그녀에게 계속 필요한 존재가 되기 위해 다시 시력을 잃게 하려고 한다. 그런 그의 실체를 줄리아가 알게 되고, 그에게서 벗어나기 위한 사투를 버린다. 그녀가 시력을 잃어야 자신의 존재를 알고 평생 함께 할 수 있을 것이라 믿는 그에게서 측은함을 느꼈다.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이 있기를 얼마나 바랬을까...
그러나, 그의 방법은 틀린 것 같다. 상대가 원하지 않는 방법으로는 사람들에게 중요한 사람이 될 수 없다. 나의 방법이 상대에게도 좋을 것이라는 추측으로는 절대 사람의 마음을 열 수 없다고 생각한다. 여기에서 나는 혼란에 빠졌다. 왜 상대가 원하는 행동을 하면서까지 내 존재를 드러내야 할까? 나는 왜 그런 욕구를 느낄까? 정말 그 답은 단순했다. 누구나 사랑받고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있기 때문이다. 그 욕구에 내가 얼마나 가치를 두느냐에 따라서 차이가 있지만, 나의 마음을 채우기 위해 상대에게 노력하는 것이다. 못 알아봐준다고 화가 나고, 속상한 마음은 내가 만들어 내는 것이다. 스스로 만족하고, 내 한계를 인정한다면... 그리고, 나를 드러내기 위한 방법을 계속 생각하고 시도하면 언젠가는 내 마음을 채울 수 있지 않을까? 방법이 틀린 것 같으면, 다른 방법을 생각해서 또 시도하면 된다. 오뚝이처럼 넘어져도 일어날 수 있는 힘!! 그 힘을 스스로 찾고, 기를 수 있으면 참 좋겠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첫 걸음은.. ‘나 사랑하기’인 것 같다. 매일 나에게 햇빛을 보게 해주는 일. 내 존재 자체를 스스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으면 누구도 나를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말이다.
범죄자에 빗대어 내 자신을 돌아보는 일이 과연 옳은 일인가를 고민했지만, 생각할 꺼리를 얻은 나는 이 영화가 참 반가웠다. 그러고 보니 삶이란 참 신기한 것 같다. 내 주위의 모든 것은 나에게 말을 걸고, 나에게 하나라도 더 알려주려 한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오늘도 나에게 무엇을 알려주려 하는지 귀 기울여 보고, 그 선물을 받기 위한 준비를 해야겠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나 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