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고, 다른 것.
애오라지
여름휴가를 맞이하여 엄마와 함께 호주 시드니에 있는 사촌 삼촌 가족의 집을 방문하게 되었다. 내가 누군가를 챙기면서 해외에 가는 것은 처음이기에 비행기를 제대로 탈 수 있을지, 입국심사에 통과하지 못해서 우리나라로 되돌아오면 어떻게 하나라는 다른 사람들이 잘하지 않는 고민들을 잔뜩 안고 출발하였으나 조마조마 할 때마다 웃는 얼굴로 퉁치고 무사히 공항에 도착하여 마중 나온 가족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리고 날씨가 쌀쌀하다라는 것과 운전석이 우리나라와 반대라고 인지한 것을 제외하고는 역시나 그 나라에 재빨리 적응한 나였다. 내가 적응했다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걸어 다니는 사람들의 외모도 다르고, 들려오는 언어가 달라도 별달리 새롭게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해외에 많이 나가보지는 않았지만, 나는 늘 적응을 빨리 했던 것 같다. 왜냐하면 어디를 가는 나는 ‘사람 사는 곳은 다 똑같다’라는 전제가 밑바닥에 깔려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을 하다 보니 나와 그들의 다른 점은 일을 하고, 안하고 밖에는 없었다. 그래서 자연스레 하게 된 것이 우리나라와 호주의 다른 점을 비교해 보는 것이었다.
차를 타고가면서 우리나라에서는 볼 수 없는 나무들을 발견하고 반가워하는 것을 시작으로... 호주는 면적이 크기 때문에 차가 없으면 자유롭게 다닐 수 없는 곳이었다. 심지어 슈퍼를 가려해도 차를 가지고 가야 한다하여, 걸어서 갔다 와도 되지 않겠냐고 물었으나 대부분 사람들이 차로만 이동하기 때문에 여성들이 납치당해도 목격자가 없어 범인을 잡을 수도 없는 곳이라는 무시무시한 말로 돌아왔다. 특히 동양여성들은 서양남성들의 이상한(?) 환상으로 인해 더욱 위험하다는 것이었다. 트레인이 있는 지역이면 조금이나마 이동이 자유로울 수 있지만, 그렇지 않고 드문드문 버스가 다니는 곳은 정류장끼리의 거리도 멀고 안내도 제대로 안 되어있다 하여 나는 일정이 없는 날임에도 아무데도 가지 못해 격렬하게 아무것도 하지 않는 상태로 있을 수 있었다. ㅠ.ㅠ 원하는 물건을 자유롭게 어디든 걸어가서 살 수 있는 우리나라가 고맙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사촌동생도 집 근처 아무데나 바로 편의점이 있는 것과 전화한통으로 치킨이 집으로 배달되는 것이 너무 부럽다고 말하는 것을 들으며, 작은 땅에서 함께 어우러져 살아가는 것도 재미있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인류평화에 기여하기 위해 나는 운전을 하지 않는 것이 맞다라고 생각했는데, 언제든 꼭 필요한 수단이 될 수 있기에 운전연습을 단단히 해야겠다고 마음먹게 되었다. 또 하나 호주는 벌금이 무지하게 쎄서 아예 범법행위를 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 특히 아이들의 먹거리나 이동시에 있을 수 있는 사고에는 더 엄격하여 도시락을 가져가야 하고, 등하교를 부모가 시켜주어야 해서 숙모는 작은동생이 중학교 다닐 때까지는 3시의 신데렐라라고 불렸다고 한다. 무슨 일이 있어도 무조건 3시에 가서 동생을 데리고 와야 했기 때문이었다. 이곳에서 도시락과 스쿨버스 사업을 하면 대박나지 않을까라는 재미있는 상상과 더불어, 사고를 미연에 방지하는 것도 좋지 않지만 책임지지 않기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는 모습이 너무 몸을 사리는 것은 아닌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나라는 급식과 스쿨버스 등 좋은 제도가 있지만 간혹 여러 가지 문제들이 발생하여 안타까운 마음이 들 때가 많았는데, 호주와 우리나라 제도를 현실에 맞게 적절히 융합된다면 아이들을 위한 더 좋은 제도가 마련되지 않을까라고 나름 생각해 보았다.
땅이 넓다보니 시티나 번화가가 아닌 곳에서는 2층 이상의 건물을 보기 어려웠고, 공공요금은 3개월 분기별로 한번 씩 낸다는 등의 여러 가지를 보고, 들으면서 ‘사람 사는 곳’은 ‘그곳 사정에 맞춘 방법들이 있는 거구나.’를 새삼 느끼게 되었다. 누군가 내게 호주 시드니에서 제일 인상 깊었던 것을 물어본다면, 유명한 관광지인 오페라 하우스나 블루마운틴 등을 이야기하기 보다는 그곳에서 자신만의 영역을 구축하고, 꿈을 향해 열심히 힘내던 내 사촌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며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맛있는 음식을 먹으러 갔던 것들에 대해서 이야기 할 것 같다. 나는 나와 같은 ‘사람’들이 어디를 가든 어우러져 살아야 된다는 것을 다른 나라의 모습을 통해 다시 알게 되었고, 그리고 그 사람들이 나에게 소중한 사람임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