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편안함을 지닌 청노인을 바라면서 - 28호

작성자행가래로|작성시간12.02.14|조회수11 목록 댓글 0

오래된 편안함을 지닌 청노인을 바라면서

 

2004년 5월 최영수 소장

 

 

  수원 지지대를 오고 가며 운치를 더해주는 노송들을 바라보며 언제나 노송처럼 '있어서 더 좋은 노인'의 모습을 떠올린다. 푸른 솔 같은 노인-'청노인'을 그려본다. 나는 노송(老松)들이 사계에 맞춰 늘 행하는 모습을 보며 노년의 내 모습이 그러하기를 바란다. 게다가 노송처럼 동(動)조차도 정(靜)으로 표현하는 모습을 닮고 싶어 '오래된'이라는 수식어를 붙여보았다.

 

  어쩌면 우리는 안톤 체홉의 '결박당한 사나이'에서처럼 어릴 적 자신이 추구하던 모습을 따라 크다가 어느 날부터는 그 모습에 우리 스스로 갇혀서 끙끙대며 그러한 상황이나 모습이 부담스러움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헤어 나오지 못하는 것 같다.

 

  그래서 나이를 먹으면서 우리 스스로 소외를 자초하지는 않는지.... 삶은 소멸과의 싸움이라는데.... 인연만큼 강한 이정표도 없다는데.... 인생이란 나이가 먹으면 먹을수록 가벼워져야 한다는데.... 자녀와 친구되고, 손자녀들과 친구 되면 얼마나 사는 일이 역동적이고 신이 날까?

 

  내 마음에 내 관을 준비해 놓고 늘 보아야 하겠다.

 

  나이를 먹으면서 눈이 잘 안 보이더니, 이제는 피곤하면 귀도 잘 안 들린다. 체력도 그전 같지 않음을 느낀다. '그전'을 생각하면서 화를 쌓지 말고 준비해 놓은 내 관을 생각함으로서 나이에 어울리는 행복을 찾아 모아야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죽는 자와 남아 있는자의 행복한 이별을 준비하기 위해 '그게 네가 할 수 있는 전부구나. 그럼, 내가 도와 줄 일은?'이라는 문장도 그 관 위에 새겨 놓아야겠다. 시렁 위에 얹힌 자신의 관을 늘 올려다보고 살았던 선조들처럼 '죽는다'는 사실을 무기 삼아서는 안 되겠다.

 

  혼자서 잘 놀아야겠다.

 

  시어머님은 열심히 살아온 사람답게 돌아가시는 날까지 자식을 자식으로만 만들어 놓으셨다. 쉰이 넘도록 자식 노릇만 한 며느리가 어머님의 죽음으로 하루아침에 어른 노릇을 해야 하는데 시어머님께서 내게 어른으로서 연습할 시간도 좀 주고, 잘 못할 때는 한 번 더 찬찬히 가르쳐 주셨더라면.... 많이 아쉽다.

 

  나는 '그전'의 내가 아님을 느낄 때마다 그 만큼씩 물러서고 비켜서는 것을 내 스스로 선택해서 실천하고 싶다. 그래서 내 뒤에 오는 사람들에게 길도, 자리도 내어주고, 그들의 실수도 아는 척, 모르는 척, 기다려주고, 또한 잘 커 가는 모습을 도와주고 싶다. 그러자면 내가 혼자서 잘 노는 연습을 해야겠다. 매일 아침 걷기 운동을 열심히 하고, 봉사도 꾸준히 하고, 가족들 각각의 요구도 일주일에 1개씩 들어주고, 월 2회의 나 홀로 외출도 연습하고, 년 2회의 여행을 시도하고, 치매예방을 위한 손장난으로 월 1개의 작품도 만들어 보고.....

 

  내 몸과 내 마음을 늘 예뻐해야겠다.

 

  얼마 전에 나는 30년 만에 다시 심하게 아팠다. 그 때 처음으로 나는 내 몸이 '내게 왜 사랑해주지 않느냐?'고 칭얼대는 소리를 들었다. 내 몸이 나를 대변함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 마음에 '큰바위 얼굴'만 새겨 놓은 채 몸의 의견은 묻지도 않고 마음만 애지중지 하면 되는 줄 알고 살아왔음을 알았다.

 

  편애의 대가로 '온화한 표정, 평안한 마음, 고운 목소리'는 여전히 내 몸에 익혀야 하고 몸은 몸대로 여기저기 힘들다고 아우성이다. 다행히 젊어서 함께 해온 병들과 친구가 된 탓에 이만큼 남 눈치 안채이게 산 것도 내 경력으로 앞으로 나이 먹으며 사는데 보탬이 될 것 같다. 사실, 내 맘대로 버려 둔 얼굴도 이제는 버려 둔 표가 나면서 자칫 심통으로 보일 때가 많음을 느낀다.

 

  그래서 젊을 때보다 더 자주 웃고, 야호 소리도, 움직임도 더 크게 하려고 노력을 한다. 내 맘대로 버려 둔 내 몸의 세포들이 버림받음을 기억한 채 모두 움추려 들기만 할까 봐 염려가 되어서다. 그들도, 병도 다 내 사랑 속에서 행복하게 지내게 해야겠다. 그러면 나는 10대에서 50대를 다 살아본 사람으로서의 넉넉함과 자신감으로 나와 마주한 사람들과 'May I help you?'하면서 친구로서 눈높이를 너끈히 맞출 수 있을 것 같다.

 

  사실, 가끔은 나도 남들처럼 나를 돌아본다. 아쉽게도 돌아온 해답은 내게 익숙한 것들에 매달려서 내가 서툰 것의 강요에 성을 내고 그래서 결국 퇴보에 안주하는 고집쟁이인 내 모습이 자주 보인다. 그래서 배운 티가 전혀 안나는 노인의 모습이 감지되어 많이 불안하다. 인생선배로서 앞장서 선도의 자리를 지켜야 함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정보와 사고(思考)를 외면하고 거꾸로 소외의 억울함을 심술로 푸는 그런 치매 노인의 모습도 그려진다.

 

  흔히들 빈손으로 와서 빈손으로 간다는데, 나는 스스로 세상에서 얻은 지혜를 세상에 다시 돌려주고 가려 안간힘을 쓰고 있다. 내가 세상에서 잘 살면서 알게 모르게 진 빚과 내 자녀들이 스스로 원해서 태어나지 않은 빚까지 탕감하고 싶어서다. 또 내가 살면서 새긴 아는 척, 잘난 척 등등의 척 자국들이랑 나의 흔적들을 잘 지우고 싶다. 그래서 뒤를 돌아보기보다는 '지금 이 순간'에 몰입해 삶으로서 나이만큼 행복한 청 노인이 되고 싶은지도..... 매 순간 나는 내가 가장 행복한 쪽으로 발걸음을 떼고 싶다.

 

  오늘도 나는 나의 어깨를 얄팔로 꼭 껴안고 눈을 감은 채 나를 낳아준 부모님, 나를 가장 사랑해준 사람들을 잠시나마 진하게 느끼는 연습을 통해 행복의 주인공 답게 미소를 짓는다.

 

  오래된 편안함을 지닌 청 노인이 되기 위해서..... <행가래로 2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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