끈은 삶의 고비마다의 등자언덕
2004년 11월 최영수 소장
주자는 우리에게 사람답게 살라고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을 가르쳤는데, 학창시절교장선생님은 반 이름을 인,의,예,지,신으로 붙이시면서 우리들을 이렇게 살라고 늘 말씀하셨다.
누군가는 작금의 세상에서는 ‘인의예지신’ 대신에 ‘끼깡꾀꿈끈’으로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 나는 그것을 나대로 해석을 해 보았다.
「끼」란 ‘나만의 브랜드인 끼’, 「깡」은 ‘긍정적인 사회의 길라잡이인 성실한 깡’, 「꾀」는 ‘용기있는 기회의 에너지인 꾀’, 「꿈」은 ‘행복한 내일의 안내자인 꿈’,「끈」은 ‘삶의 고비마다의 등자언덕인 끈’으로. 나는 살면서 외롭고 힘들 때마다 내게 「비빌 언덕」을 내 준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가깝게는 부모 형제 및 친척들이었고 멀게는 학연․지연으로 만나던 친구들이자 내 끈이었다. 지금도 그 때 그 등자언덕의 따뜻함을 잘 기억하고 있다. 아마도 내가 지금 상담소를 하게 된 연유가 그런 따뜻한 등자언덕에 대한 기억들과 그리고 그 따뜻함을 늘 그 때 그 온도로 지니고자 하는 나대로의 무진한 노력도 한 몫을 한다고 믿는다.
나는 늘 혼자이되, 혼자가 아니었다. 내가 혼자 있어도 내가 걸치고 있는 옷에서부터 나의 모든 것들이 등자언덕이 되어 나를 따뜻하게 해 주었다. 게다가 내 머리 속은 혼자 있어도 늘 무언가를 생각하고 그것과 관련된 누군가에게 혼자서 말하면서, 늘 누군가와 마음을 주고 받으며 텔레파시로 마음끈을 지으며, 나도 등자언덕이 될 준비를 열심히 한다.
한편, 내가 세상을 나가며 문을 연 순간부터 앞 일에 대한 두려움으로 혹은 어찌해야 할지 자신이 없을 때면 곧 좌우를 두리번 두리번거리며 내 끈들을 부지런히 찾는다. 나이 먹으니 낯가림도 점점 심해진다. 그래서 나는 내 끈들에게 등대고 비비고 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자유롭다. 나는 나만의 브랜드인 내 끼를 조용히 발산하고 살기에. 무섭거나 버거울 때는 성실한 깡으로 버티고, 두렵거나 난처할 때는 용기있는 기회의 에너지인 꾀로 살짜꿍 넘어가기도 한다. 이 나이쯤 들어 맞이하는 인생의 내리막에서조차 내게 있는 꿈이 나를 행복하게 내려 앉도록 내 길을 안내해 주는 행운도 있다.
요즘 세상은 학연․지연이 많이 문제가 된다. 그러나, 문제의 본질은 능력검증에 철저하지 못한 낯선 인간관계의 미숙과 안이한 지면(知面)우선의 게으름 탓이고, 또한 인간관계나 사회생활에서 이를 남용함에 따른 폐해를 제어할만한 이성적 처리를 하지 못하는 온정주의적인 우리의 인간적 약점이 문제의 진짜 이유라고 본다.
세상에 나를 아무리 설명해도 모르는 사람들 뿐인데, 게다가 처음에의 선입견으로 아무리 설명을 열심히 해도 시각은 모아지 않고 자꾸 벌어만지는데……이 때의 학연․지연의 힘은 많은 문제를 일시에 해결할 수가 있음을 경험한 사람들은 알리라. 정말로 끈을 수직적으로 권위를 내세움에 남용하지 말고, 이해관계에 악용하지 말고 그 순수한 선연(善緣)을 수평적으로 어깨동무를 하면서 서로의 가진 것들을 나누는 끈이어야 하고 그 끈을 넓은 자락으로 펼쳐서 보다 더 많은 이들에게 함께 할 인생의 외로움과 허전함을 어루만져주는 포근한 등자언덕이 되어야 하리라. 그 자락은 말잔등에 오를 때까지만 함께 해야 함으로 광목이기보다는 잠자리 날개처럼 투명해서 서로를 잘 볼 수 있어야 하리라. 그리고 똑같은 연유로 그 자락은 ‘살짜꿍’ 만큼의 에너지만 요하므로 예쁜 표정만 짓고도 충분히 등자노릇을 할 수 있으리라.
등자언덕에 기대되 기댄 것이 가벼워 들킬 염려가 없어 내 체면은 그대로 유지할 수 있고, 등자언덕을 내 주되 버겁지 않아 생색 낼 틈도 없어 얼굴표정이나 몸메시지가 꾸겨질 시간도 없으니 이렇게 가볍고 예쁜 끈을 서로 서로 지으며 살아보고파라.
우리 민요 ‘날 좀 보소’가 생각난다. 우리는 그렇게 흥으로 연을 맺고 끈을 짓는 민족이 아닌가? <행가래로 34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