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고정된 채널을 가지고 있다.
2005년 1월 최영수 소장
예를 들어 가정에서나 직장에서 평소에 자신의 목소리가 어느 날 갑자기 커졌음을 느끼거나, 남편이나 자녀 또는 같이 일하는 동료의 목소리가 커졌다고 느껴졌을 때, 대부분의 경우, 혼자서 여러 가지 생각과 추측을 하고 판단을 내리고 그 결론에 따라 행동을 하고 설명을 한다고 가정하자.
자신의 목소리가 커진 이유를 혼자서 따져보는 한편, 주위의 식구나 동료에게 물어 본다. 그럴 때 ‘별로 못 느꼈는데요.’ 라고 하면 ‘그냥 내 몸의 상태가 안 좋았나보다’ 하면서 지나가거나 아니면, ‘남들은 아니라는데 왜 나는 느닷없이 크다고 느꼈지?’하고 나름대로의 고민을 하게 된다.
남편이나 자녀 또는 동료의 목소리가 크다고 느꼈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내놓고 묻기보다는 혼자서 여러 가지로 생각을 하면서 각각의 경우를 순열 조합을 하면서 그에 따른 행동선택을 고민하고 있다. 그러다가 확인을 위해 변죽을 울리는 선에서 질문을 하고 그 대답에 따라 또 다른 경우의 수를 늘려가고 그러다가 몇 가지를 선정해서 하나씩 지워가기 위해 가장 확신하는 경우부터 확인을 하고 오해의 여지를 막기 위해 설명을 하곤 한다.
질문을 주고 받는다 해도 대부분은 질문을 하는 그 순간에 대답하는 사람들은 평소에 그 사람을 접한 습관대로이거나 아니면 어느 날의 경험에서 비축된 불편했던 감정들이 느닷없이 튀어나오는 대답을 들을 경우도 있다고 본다.
내가 나를 소개해 보자. 쉽게 할 수 있는 사람이 많지를 않다. 우리는 자신을 평소에 내가 생긴대로이거나, 아니면 남이 보는대로 대부분 그냥 두어두고 자신을 손보는 경우가 많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우리는 외출을 하거나 특별한 사람을 만날 때에는 자신을 열심히 손보고 여러 경우를 대비하고 준비한다. 그러나, 그 때도 충분한 내 모습을 만족하게 보여주는 경우는 드물다. 그만큼 대부분의 사람들은 평소에 자신의 외모는 물론 내면을 들여다 보는 시간 자체가 없다고 본다. 물론 하루의 일과표에 외모를 위해 투자를 하는 사람들은 요사이 많이 생겨나고 있다고 보지만.
나도 나를 잘 모른다.
나도 나를 정확하게 설명을 못 한다.
나도 나를 지배는커녕 통제를 제대로 잘 하지 못한다.
내가 지금 느끼고 있는 나를 겨우 조금 알 뿐임을 기억하자.
남들은 내가 그들에게 보내는 싸인만큼만 겨우 나를 알 뿐임을 기억하자.
때로는 내가 나를 느낀 대로, 때로는 남들이 ‘넌 그래’라고 내게 싸인을 보내주는 대로 나를 거기에 맞추어 쉽고 편하고 익숙하게 표현할 뿐임을 기억하자.
오늘도 나는 나를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 나의 일부를 내게 익숙한 단어로 마치 TV처럼 내가 말하고 싶은 부분만 고정된 나의 채널로 신나게 얘기를 하고 있지는 않은지를 돌아보고 듣는 사람도 자신이 익숙한 채널을 고정시켜 놓고 나를 듣고 있음을 기억하자. <행가래로 36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