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홀로 서기
- 막다른 골목에서의 응석만은 사양하자
상담소장 최 영 수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의지해야만 하고 의지할 강한 누군가가 있어야만 한다고 신념처럼 믿고 있다.
천안 공원묘지를 가보면 온 산과 하늘이 어우러져 숱한 사연들을 합창하듯 마구 토해내는 것처럼 느껴진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음을 맞으면서 고통스러워하고 두려워했을까? 죽음 앞에서 누군가를 붙들고 분노와 절망으로 절규하기도 하다가 신의 이름은 또 얼마나 부르며 간구 했을까?
우리는 뱃속에서부터 엄마에게 의지해야 생명을 유지하는 것이 가능했기에 누군가에게 의지하고 응석과 투정을 부리면서 세상을 만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엄마와의 첫 만남에서부터 시작되어 커가면서 우리 스스로가 본능적으로 터득하게 되고 익혀가게 되는 것들이 삶의 틀로 자리잡으면서 우리의 일생을 좌지우지하게 되는 것 같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대부분 그 때 익힌 응석과 투정 시나리오로 일생을 살면서 때로는 성공적인 만남에 천생연분을 노래하고 때로는 좌절과 분노로 ‘이 웬수야’로 일그러진 자신의 모습을 보기도 한다.
`88년도 서울 장애인 올림픽 개막식에서 나는 많은 감동을 느꼈었다. 그 자리에서 일어설 무렵에는 식장 밖으로 나가기가 무척 부끄러웠었다. 두 손 두발이 멀쩡한 내가 해 놓은 것이 너무도 없어서…. 조금 상하고 조금 부족할 뿐임에도 남 탓만을 해대면서 얼마나 많은 불평과 불만으로 내가 해야만 할 일들에 게으름을 부렸는지….
보통 어려운 상황이 벌어지면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의지해야만 하고 의지할 강한 누군가가 있어야만 한다고 철석같이 믿고들 지낸다. 그런데 장애우 대부분은 오로지 자신의 힘으로 무언가를 해내고 싶어하고 그러한 자신의 모습을 그리며 그 날이 오기를 손꼽아 기다린다. 우리들 또한 우리가 늙어 가는 모습을 그리면서 설령 외롭다할지라도 자식에게 부담스런 존재가 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곤 한다. 이렇듯 우리들은 의외로 신체적으로 아프거나 장애가 있을 때조차도 홀로 서기를 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평소에는 모든 것이 일상처럼 진행되거나, 어떤 어려움에 처하기 전에는 언제나 ‘제 스스로 잘 났다’는 듯이 고개를 쳐들고 다닌다. 그러다가도 막상 어려움에 봉착하면 누군가를 찾아서 그에게 매달리고 보다 더 강한 누군가를 찾아 헤매는 모습들을 스스로에게서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순식간에 해결되길 바라기에 어딘가에 있을 마술지팡이를 찾아 정신 없이 두리번거리곤 한다. 어쩌면 이와 같은 마술지팡이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세상이 응석과 투정으로 혼탁해지는 지도 모르겠다. 책임지는 일일랑 각자가 믿는 신에게 떠 넘겨 버린 채….
이렇게 누군가를 믿고 의지하며, 보다 더 든든한 구세주를 찾으려 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첫째, 원칙이 지켜지지 않게 된다.
우리나라 헌법 11조에는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라고 되어 있다. 그러나 힘없는 서민들의 입장에서 보면 대부분의 경우, 법은 힘이 없고, 돈이 없고, 빽이 없는 자에게는 어찌해 볼 기운 마저 빼앗을 만큼 대단하게 군림한다. 그러다 보니 힘없는 서민들이 모여 힘을 형성하게 되고, 때로는 초법적이 되기도한다. 이는 법 앞에 평등함이 어떤 것인지 법학자들만이 이론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보통의 어진 국민들은 법 없이도 살아지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래서 어진 국민들이 아주 사소한 일상에서 법 앞에 평등함을 느끼게 하는 작은 사례집을 만들기를 원한다. 그래서 아주 작은 권리를 누리는 순간에도 고함소리 대신에 합리적으로 말을 나눌 수 있기를 바란다.
둘째, 페어플레이(FAIR-PLAY)정신이 없게 된다.
아이를 키우면서 우리는 자주 갈등을 겪는다. 형제간에 분명히 약한 아이가 있고 그 아이가 일을 해결하는 방법은 누군가가 편을 들어줌으로써 해결이 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또한 학교생활에서 엄마가 자녀 편을 들어주는 경우도 이에 해당된다. 운동경기에만 fair-play정신이 요구되는 것은 아니다. 아이들도 보다 어릴 때 자존심에 상처를 입는 것이 조금 더 성장했을 때보다 그 정도가 약하고 그 치유도 훨씬 빠르다고 생각되어 진다. 그리고 나이가 어릴 때 익힌 것은 그 나이가 어릴수록 몸에 진하게 밴다. 그러므로 자기 의사를 표현하기 시작하는 그 시점을 기준으로 아이들을 독립적으로 키워야 한다. 선택의 갈등 없이는 성숙이란 없고, 고독함이 없이 선택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되도록 일찍부터 자신의 삶은 자기만의 것이란 것을 가르쳐서 깨닫게 하자.
셋째, 책임의식이 부족하게 된다.
살면서 아주 쉽게 내 잘못을 남 탓으로 돌리는 내 모습을 볼 때가 많다. 내 옆에 있는 사람들에게서도 자주 듣기도 하고 보기도 한다. 특히 어린 아이들의 경우는 거의 대부분 누군가의 탓을 하거나 응원을 막무가내로 요구한다. 이렇게 우리는 스스로 편하게 살겠다는 욕구가 본능적으로 발휘되어 책임질 일이 생기면 언제든 내 욕구대로 꺼내서 마구 보챈다.
나는 아주 가끔 절에 간다. 가만히 앉아 있다가 오면 머리도, 몸도, 마음도 맑아지는 재미로. 아마도 온갖 마음의 쓰레기를 버리고 오는 탓이 아닌가 싶다. 하지만 이 세상에서 나로 인해 일어나는 모든 잘못들을 절에 가는 것으로 대신할 수만은 없다고 생각한다. 마지막까지 혼자서 책임을 지는 모습이 신에게 뿐만 아니라 우리 인간에게도 가능하리라고 믿기 때문에 끝까지 책임을 다하는 아름다운 홀로 서기를 그려본다.
우리는 우리에게 내일이란 시간이 당연히 올 것이라 믿으면서 지금 당장 우리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쉽게 망각하고 사는 것 같다. 그리고 갑작스런 상황에 닥치면 우리는 대부분 의지할 대상을 찾아 나선다. 동시에 자신의 인과응보는 본능적으로 피하려 애쓴다.
나는 훗날 잘 죽기 위해 지금을 잘 지내야 한다고 믿고 있다. 그러므로 마지막까지 나의 노블리스 오블리쥬(Noblesseoblige)는 세상의 혜택을 많이 받은 만큼 실천한 자로서 남아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또한 그것이 내가 세상에 마지막까지 가지고 가야 할 책임이라고 믿고 있다. 아마도 우리 모두는 세상에 태어난 뜻이 있듯이 떠날 때도 그 몫을 해야한다고 나는 믿는다. 지금 세상은 모든 사람이 마음먹기에 따라 평민도 될 수 있고 귀족이 될 수도 있다. 각자의 Noblesseoblige를 챙겨서 당당하게 스스로의 삶에 책임을 다 하자.
돼지 눈에는 돼지만 보이고 부처 눈에는 부처만 보인다고 한다. 아무리 배우고 익힌다 해도 우리는 자신이 아는 만큼 알고 보는 만큼 보는 능력밖에 없음을 자주 경험한다. 사실 서로 다른 색깔의 안경을 끼고 앉아서 평행선을 긋는 얘기를 나누는 경우도 허다하다. 내 눈에 씌운 콩깍지부터 벗기기 위해 자신의 모습을 자주 열심히 돌아보자.
우리는 자신을 철저히 믿고 열심히 홀로서기를 연습해야 한다. 외롭고 힘들때면 자신을 지지해 주는 것들을 찾아서 모아 놓고 필요하면 꺼내 활용하자. 그래서 자신을 북돋우어 가며 살자.
내게는 그런 것으로 모자가 있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내게 건네 준 모자들이 그들의 사랑만큼 언제나 나를 기다리고 있다. 그래서 나는 늘 힘을 얻고 행복 속으로 잠수한다. <행가래로 18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