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〇〇〇방송국이다
2005년 2월 최영수 소장
우리는 각각의 고유한 이름을 딴 방송국을 가지고 있고 각 자가 보여주고 싶은 것만 보여주는 TV 모니터를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많은 사람에게 인정받고 사랑받고 있음을 과시하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만나는 사람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 중에서 보여주고 싶은 것만 보여주려 부지불식간에 준비하고 있다.
‘조 하리’란 학자에 의하면 가로변을 ‘나=I’변으로 세로변을 ‘남=YOU’변으로 1~10까지 표시해서 내가 나를 안다고 생각하는 만큼 줄을 내려 긋고 남이 나를 안다고 생각하는 만큼 줄을 가로로 그으면 두 개의 줄이 교차하면서 4개의 방이 자연스럽게 생긴다. 이 방들에는 ‘나만의 특수상황’으로 인해 얻거나 생긴 것들이 각 방마다 가득 들어있다.
나는 알고 있으나 남은 모르는 비밀의 방, 남은 다 알고 있는데 나는 모르는 눈감은 방, 그리고 나도 너 도 모르는 깜깜한 방도 있다. 비밀의 방엔 자라면서, 살면서 얻은 상처와 좌절 등이 차곡차곡 또는 어지럽게 쌓여 있다. 특히 그 방엔 일생을 두고 혼자만 보고 챙기면서 없애지도 못하고 간직하기엔 버거운 것들로 그득하다. 언제든지 살짝 건들려지기만 해도 끝없이 자신을 몰아갈 수 있는 만반의 채비를 하고 있는 결코 불을 밝히고 싶지 않은 아주 어둡고 컴컴한 지하방이라 할 수 있겠다. 보통 사람들은 이 방이 발각되지 않은 채로 행복한 모습을 지니려 간절히 원한다. 그러니 이 방이 작고 더 이상 건드려지지 않는다면 더욱 행복한 사람이겠다. 가끔씩이라도 이 방의 공기를 환기시키고 청소를 해서 치워버릴 수 있다면 스스로의 행복을 더 보탤 수 있겠고, 더욱 진한 행복을 누릴 수도 있겠다. 눈 감은 방은 남의 허물은 보고 자신의 허물을 못 보는 그래서 우리 인간들의 가장 흔한 약점이 그득한 방이다. 그래서 이 방이 클수록 자신은 물론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조차 외롭게 만든다. 그 다음에 깜깜한 방은 나도 남도 모르기에 오직 신만이 알고 계시리라 믿는다. 마지막으로 너도 알고 나도 아는 공개된 방이 있다. 이 방 때문에 우리는 저마다 자신의 이름을 딴 방송국을 가지고 있다고 본다. 물론 한 개로 고정되어 있는 유일한 채널이다.
어쨌거나 나에게도 너에게도 보여줄 게 많고 공개되어도 아무렇지도 않은 것들 투성이여서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늘 보여줄 수만 있다면 그런 방을 지닌 사람들은 마음도 얼굴도 실제로 두루두루 평안하고 주위도 곁따라 편안해 보이겠다. 게다가 그 방이 넓을수록 그런 방을 가진 사람들은 평소에 웃으며 너그럽게 지낼 수 있겠다.
그래서 나는 아주 평안함이 그득한 방이고 싶다. 그래서 요사이 나는 상대의 얼굴에 되비친 내 모습을 열심히 찾는다. 그리고 설령 내 모습이 밉더라도 그렇게 미운 내 모습도 많이 쓰다듬어 주고 얼러준다. 왜냐하면 그렇게 다독여줌으로써 조금씩 평안한 모습으로 바뀔 것이라는 믿음 때문에. 또 그렇게 하는 것이 바로 내가 보다 더 편안한 모습을 지닐 희망이 비치니까. 내 TV 수상기에 나오는 것들은 오로지 나 혼자 짓고 만들고 지운 것들이다. 이제는 내가 세상에 보여 주었던 것들을 거두어들여야 할 것 같다. 살아 온 세월을 빚 삼아 되감아 보여주는 것에 나를 고정시켜야 하겠다. <행가래로 37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