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골통」들이다.
2005년 4월 최영수 소장
어린 시절에 그림을 그릴 때 나는 주위의 친구들을 보면서 ‘왜 나는 그들처럼 그릴 수가 없는 것일까?’ 하면서 노심초사했던 기억이 있다. 다른 친구들이 그리는 것을 따라 나도 흉내 내기 바빴기에 정물화나 풍경화를 그리는 것을 상당히 싫어했고 지금도 추상화나 비구상보다 덜 좋아한다. 지금 생각해 보니 내 눈에는 그 풍경이나 정물이 그들처럼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말하자면 숲을 위에서 내려다보면 무성한 잎들의 바다만 보이지 그 밑에 숨어있는 큰 나무기둥은 내 눈에 안보이기에 어떻게 숲을 표현해야 할지를 몰라 허둥댔던 것이다. 그러나 친구들은 자신들이 경험했던 숲을 상상하면서 지금의 숲을 열심히 표현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숲은 정말 숲처럼 그려진다는 것을 깨달을 여유도 없이 나는 살아왔다. 그렇게 내 머리는 언제나 숲을 그렇게 내가 처음 친구들 것을 베낀 대로 아무런 저항 없이, 아무런 의문 없이 지금껏 그려오고 있음을 이제 와서 문득 느꼈다. ‘아, 나는 눈을 뜨고 보고 있되 보지를 않고 머리로 살고 있구나. 결국, 넌 「있는 그대로」 사물을 보는 것이 아니라 늘 네 머리로 안 보이거나 못 보는 것을 완성시켜 보는구나.’
아마도 대부분의 어른들이거나 깜찍하게 똑똑한 아이들은 그러리라고 본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는 것이 교양을 갖춘 모습이고 배운사람다운 체면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렇게 교양덩어리 즉 머리로 사는 우리를 「골통」이라고 불러본다. 즉 머리만 커다란 통이라는 의미로. 원래 머리가 둔하면 「꼴통」이라 하지만, ‘있는 그대로’ 보지 않고 늘 머리로 생각하며 완벽함을 보이고자 애쓰는 그래서 상상력이나 추리력이 무시로 활개치는 인간을 나는 골(뇌)로만 사는 통(덩어리)으로 본다.
사람들과의 첫 만남에서도 우리는 관계 맺기를 골통답게 머리로 한다. 예를 들면 본인이 갔음에도 불구하고 비서를 통해 명함을 요구하여 사전에 소홀함이 없도록 준비하거나, 명함을 서로 교환하면서 명함내용에 걸맞는 화제를 찾아 대화를 시작하는 것도 그렇고. 힘겨루기에서 결코 밀려선 안되는 경우, 작은 무기를 상대가 가진 것을 눈치 챈 자는 큰 무기를 가졌을 때 상대와 관계 맺기에 자신감을 가지고 주도적으로 나올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우리는 작은 무기를 갖고도 큰무기를 가진 것처럼 머리를 굴려야 되는 사람과 큰무기를 갖고도 가지지 않은 것처럼 머리를 굴리는 사람으로 관계 맺기를 팽팽하게 맞서는 경우를 일상에서 흔히 경험한다.
이렇게 우리는 머리굴려 세상을 익힌 「골통」이기에 때로는 우리의 자녀들에게 ‘너는 그것도 안보이냐?’ 며 얼마나 많은 강요와 윽박지름으로 다가가는지……‧우리와는 너무도 다르고 여린 그 「골통」에 우격다짐으로 쑤셔박으면서 한편으론 그 골통을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우리 식으로 위장을 하고 다듬느라 바쁘지는 않았는지……또 때로는 우리들 스스로가 편하고자 그렇게 여리고 다른 골통에게 순도최선의 것들로만 차곡차곡 채우며 순진무구한 ‘바보 골통’을 만들어 놓고, 다 자란 후에는 세상살이에서 밀려다니고 떠다닌다고 ‘꼴통’이라고 세상 사람들처럼 똑같이 쥐어박는 우리들 모습은 없는지……
장님만 코끼리의 모습을 다르게 표현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우리 모두는 각 자의 자질도 다르지만 각 자의 서 있는 위치도 다르다. 그러므로 눈높이에 따라 또 보는 위치에 따라 분명 다르게 보일 것이다. ‘틀렸다, 맞다’가 아닌 ‘아, 네게는 그렇게 보이는구나.’ 이렇게 상대방의 관점을 일단 수용을 하자. 그러면 함께 생각을 나눌 수 있는 행복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21세기는 감성의 세기답게 창조력이 강조되는 세상이다. 이제라도 우리들은 바삐 돌아가는 머리 회전을 일단 정지시키고 주위와 사물, 사람을 보고 느낀대로 표현하는 법을 익히자. 그래서 ‘있는 그대로’ ‘보이는 그대로’를 자유롭게 편하게 표현함으로써 그런 ‘다양함’을 존중해 주고 그렇게 서로가 ‘다름’에 행복해 하는 세상, 「다양함을 누리는 행복」을 만들어 가자. <행가래로 39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