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나’라는 나무
2006년 4월 최영수 소장
오늘이라는 단어가 나에게 주는 의미는 나의 가장 젊은 시간이라는 것이다. 그런 느낌이기에 나에게 엄청난 에너지를 준다. 무언가 오늘 하루 나에게 주어진 일들에 대한 내 마음의 설레임은 물론이고, 그것들을 마주해서 멋지게 넘어갈 내 심장에의 든든함, 그리고 오랜 경륜에서 얻어진 낯선 부딪침에의 의젓하고 늠름함. 이 모두 ‘아 내가 살아있네. 아 아직 괜찮네. 음 잘 할 수 있겠네.’ 등등의 말들이 꼬리를 이어가며 나를 향해 릴레이를 한다. 그 말들은 다 오늘의 나를 향해 마치 카 레이서가 시간과 다투며 최고속으로 질주하는 것처럼 내게 다가온다. 그러나 오늘의 나는 20대의 젊은 시절엔 무언가 분명치 않고 흐릿하고 막연한 생각뿐이었으나, 50대의 오늘의 나에게는 꼭 이루어내고 싶은 그래서 꼭 성취해야만 하는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있다. 그렇기에 오히려 최고속과 함께 딩구는 젊음이기보다는 최고속과 분리되어 즐길 수 있는 여유 있는 ‘오늘의 나’이다. 그 여유로 인해 나는 나의 상황에 맞는 최고속을 조절할 수 있는 오늘의 나를 믿고 좋아한다. 물론 원숭이처럼 나무에서 떨어질 때도 있다. 그러나 그 순간조차도 오늘의 나는 내게 미소를 보낼 수 있다. 젊은 20대에 견주어 미미한 정도의 자신의 지나침임을 알기에 ‘너 많이 컸네.’라며 격려를 해 줄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더 좋은 마무리를 향해 조금 더 신중해질 수 있는 ‘오늘의 나’를 맞이하는 준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나의 ‘오늘의 나’는 나이 먹어가는 노년을 앞에 두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매일 매일 성장하는 나를 눈여겨보게 해준다. 그래서 나는 ‘오늘의 나를 통한 나이 먹음’으로 인해 날마다 크는 한 그루 나무가 된다. 이 나무의 존재를 기억하며 나는 스스로를 향해 흐뭇하게 미소 짓고 행복해 한다. 이렇게 ‘오늘의 나’란 내 나무는 뿌리를 내린다.
지구라는 별에 그리고 세상에서 유일한 한 남자와 함께 한 공간에서, 세상에 제일 예쁜 자식들 곁에. 또한 ‘오늘의 나’는 남편과 90세까지 함께 한다는 목적도 가지고 있다. 아직은 안경 없이 글을 보기에 ‘오늘의 나’는 여전히 책을 보고 글을 쓰고 하는 임무를 나에게 주고, 그를 통해 나는 젊은 에너지를 키워내고 토해낸다. 되도록 키워낸 에너지만큼 소진하려 애쓴다. 그것이 ‘오늘의 나’란 나무의 한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 한계가 더욱 ‘오늘의 나’란 나무를 자연스럽게 자라게 할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노년으로 갈수록 에너지의 비축은 낭비를 자아내기 때문이다. 그래야 ‘오늘의 나’는 날마다 나를 새롭게 준비하며 그 새로움이 설레임으로 순환하며, ‘오늘의 나’란 나무 물올리기가 잘 될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지지대의 청송처럼 저 편한대로 휘어지고 자라서 더욱 아름다움이 돋보이기에 ‘오늘의 나’는 그러한 아름다움을 가지고픈 소망을 품는다. 그래서 ‘오늘의 나’는 50대, 60대, 70대, 80대, 90대다운 나를 준비하며 날마다 크는 한편, 자신의 한계로 버텨내는 나무가 되려 할 것이다.
오늘은 그런 의미에서 나에게 가장 젊은 날이고, 그렇기에 무엇이든 도전할 수 있고 성취를 이루어내고자 극복에의 용기를 짤 수 있는 날이다. 오늘을 열심히 살아야 하는 이유는 바로 ‘오늘의 나’란 나무 덕이 아닐까? <행가래로 49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