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정적 사고 “손안의 2% 모자람은 손등만하다”
2006년 6월 최영수 소장
지금도 그렇지만, 우리가 자랄 때는 없는 것 투성이라서 사람마저 모자라면 큰일로 생각했는지 부모님들이나 선생님들로부터 실수나 틀리는 일들을 저지르는 것 자체를 해선 안 되었다. 분명 어리기에 잘 모를 수도 있고, 단순한 호기심으로라도 일을 저지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것들이 어른의 체면내지 자존심으로까지 확대되어 너무도 당연하게 엄청난 꾸중과 체벌을 받는 일이 왕왕 있었다. 그러다 보니 모두들 비록 어릴지라도 완벽을 추구하고 완벽함을 연출하는데 매달려 지내는 생활이 이어졌고 자연 불특정 다수의 남 눈을 의식하게 되고 상대의 감정이나 상태를 의식하며 자신을 점검하는 버릇이 들게 되었다고 본다. 그러한 처신들이 결국엔 남을 비난하게 되고 남의 잘못이나 모자람은 지적하며 가르치려고 달려드는 사람으로 만들고 나아가 이 세상을 그런 사람들로 북적거리게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우리는 같은 모양새임에도 불구하고, 제 모습은 제대로 모르거나 못 보고 남에게 손가락질을 하면서 아웅다웅 거리며 살 수밖에 없는 존재로 길들여진 것 같다. 그런데 이런 성향의 사람들 내면에서는 완벽을 추구하고 겉으로는 모자람을 드러내지 않으려 하다보면 점점 소극적으로 상황을 대처할 수밖에 없고 소심해져 갈 수밖에 없음을 본다. 즉, 틀리면 안 되니까 자신 있는 적극적인 대응이 어렵고 실수를 줄이려니 열두번이나 더 따져보아야 하니 마음이 자꾸 오그라들 수밖에 없겠다. 이런 나를 손으로 비유할 수 있겠다. 손등이 사람들이 잘 보는 나, 또는 내가 잘 보이고 싶은 나일 수 있겠다. 어쩌면 완벽에 가까운 모습 투성이(98%)에 해당할 수 있겠다. 손안은 비록 남에게 보이지는 않지만 나의 감추고 싶고 모자라는 모습(2%)에 해당한다면 그것에 대한 스스로의 인식은 대부분 손등이란 키 높이만큼 강조해서 기억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자신의 모자라는 모습, 예를 들어 2%부족한 경우일지라도 그 모자라는 2%에 대한 의식이나 인식은 ‘98%만큼 잘 갖춘 나’라는 산을 못 넘는 경우가 허다함을 본다. 그렇게 완벽을 추구하는 사람들 대부분은 완벽을 앞에 두고 더 이 상의 완벽을 향해 발걸음을 떼지 못한다. 그 형상이 마치 ‘98%나 갖춘 나’란 산 밑에 주저앉아 있거나 2%란 모자람을 98%만큼 크게 인식한 나머지 98%만큼 잘 준비된 나를 아예 무시하는 꼴이다. 즉, 손등을 다른 사람들이 나를 보듯이 밖에서 보는 것이 아니고 손안에서 손등이란 키만 본다. 그리곤 포도가 시어서 못 먹는다는 이솝우화의 여우마냥 도망치기에 바쁜 모습이다. 이렇게 완벽을 추구하는 한 쪽 끝은 ‘소심’이 자리 잡아 결국엔 소극적인 사람이 되어 부정적 사고의 소유자로 머물고 만다. 그러나 이에 비해 자기 손등을 바로 해서 남들이 보아주듯이 똑같이 자신을 볼 줄 아는 사람들은 손안의 모자람을 ‘2%네’하며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다 보니, 보다 적극적인 자세로 날마다 키 높이를 재는 용기를 내고 날마다 크는 나무가 되어 결국에는 완벽이란 자신의 나무에 오른다고 믿는다. <행가래로 51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