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아무개는 행복성의 성주다.
2006년 10월 최영수 소장
분명 나이를 먹는다는 것을 두려움으로 받아들인 어느 시점이 있었다. 인간이 서로를 인정하고 가늠하기 위해 만든, 그렇게 ‘역사’로 기록되는 시간들이기에 평소에 뒤를 잘 돌아볼 여유가 없는 나로서는 세월을 받아들임에는 아주 당연히 여기며 제법 의젓하기까지 하다고 스스로를 생각한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점점 거울을 뒤로하는 나를 본다. 그래서 오랫동안 거울을 가까이 안 하여 이젠 거울을 보지 않음이 습관처럼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이 40에 자신의 얼굴에 책임을 지라’는 말 앞에 전과 달리 요사이 나는 부끄러움을 느낀다. 하나는 점점 깊어지는 이마의 주름 앞에서 어린 시절 범생이 모습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자신의 호오보다는 상대의 호오에 충실하려는, 마치 착한아이로 ‘길들여진 아이’가 계속 착한 아이로 인정받고 싶어 하는 모습이 흔적으로 남은 것 같아서이다. 설령, 이마의 주름이 유전일수는 있지만, 그런 의미의 범생이 기질까지 유전인자로 전수되는 것은 원치 않는다. 아이가 ‘성인아이’로 자라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아마도 아이들이 동화 속 아이답게 순진하고 순수하게 자랄 수만 있다면 세상의 많은 문제들이 존재조차 않을 거라고 나 혼자 생각해보기도 한다.
두 번째는 얼마 전에 본 나의 완전 정면 스냅 사진이다. 엄격한 인상이었다. 세월의 흔적이 이마만큼 지났음에도 상대에게 힘으로 엄격함을 얘기하는 나의 단순함이 느껴져서 부끄러웠다. 내 생각으로는 단순한 힘은 젊은이들의 무기여야지, 세월을 아는 사람들의 모습은 아니라고 믿는다. 왜냐하면 ‘나이 듦’은 유연해 보이지만 결코 만만하지 않는 탄력으로 젊은이들을 받아들이면서 세월의 힘을 따라오게 해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렇게 나는 마치 사진의 한 컷처럼 성장이 정지된 내 모습에서 나를 챙길 수 있어 다행스럽다. 사실, 미숙한 부분도, 덜 성장한 면도 있지만, 나는 아직까지 내가 건강함에 감사하고, 여전히 식구들과 함께 함에 감사하고, 지금도 배울 일이 있음에 감사하는 ‘幸福城’에 머무르고 있다.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처럼 幸福城에 상주한다고 믿는다. 우리들 대부분은 부모로부터 ‘완벽한 사람’으로 행동하도록 교육을 받은 탓에 자신의 모습 중 ‘2% 부족’한 그 부분에 대부분 매달려 살다 보니 스스로를 행복성의 성주로 자처 않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이렇듯 어린 시절에 미처 채워지지 않거나, 충분히 경험되어지지 않은 설익은 것들이 우리의 몸속에 마치 사격장의 연습용 타깃 마냥 언제고 명중되기를 웅크리고 있다가 때로는 미숙이란 변명으로, 때로는 성장이란 도전으로 우리의 세월을 삽시간에 집어삼키듯 울컥 토하며 서투름으로 채워버리니 우리네 세상살이가 당연히 시끄럽고 힘들 수밖에 없다고 생각도 해본다.
어쨌거나, 세상에 태어나면서 ‘나는 아무개’로 등록된 만큼 이 세상에 존재할 충분한 가치를 지녔다. 나는 매일 매일 아무개로 불리 울 때마다 상대가 대답을 듣고자 원하는 이는 오로지 나 한 사람이니 내가 곧 상대에게는 세상이고 우주다. 그러니 나는 나 혼자 뿐으로 가진 것이 아주 적을 지라도 상대에게는 나, 아무개로서 100% 충분히 필요한 존재이다. 누구에겐가 한 두 사람에게는 꼭 필요한 존재이므로 우리 모두는 행복성의 성주 될 자격이 충분하다. 이제 행복은 내꺼다. 마음껏 누리자. 나, 아무개는 행복성의 성주다! <행가래로 54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