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란 초를 잘 태우자
2006년 11월 최영수 소장
돌아가신 시어머님을 모시면서, 친정엄마를 보면서 ‘나의 노후는 어떤 모습이면 좋을까’를 가끔 생각했다. 요사이 내 모습을 보아도 옷 색이 밝아지고 몸에 치장을 하는 편이다. 젊은이처럼 기운 있어 보이고, 밝게 보이고 싶은 마음이 드는 정도가 마치 내가 나이 먹음을 저리로 밀쳐내면 밀쳐질 것처럼 착각하는 듯 보인다.
사실, 시어머님은 돌아가시는 날까지 화장실을 당신 발로 가시고자 젊은 사람들을 ‘일으켜라, 붙들어라, 잡아라, 놓아라.’ 등의 말씀으로 시중드는 사람이 잘 맞추도록 설명에 열심이셨다. 시중드는 입장에서는 그냥 기저귀차고 계시는 것이 힘도 덜 들고 다칠 위험도 줄어들어서 편할 것 같기도 하였다.
성품이 꼿꼿한 어르신들은 자식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 혼자서 사시겠다고 상당한 노력을 하시는데 그 모습이 자식입장에서는 답답할 때도 있다. 기운이 쳐진 채 뎅그러니 혼자 계신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고 끼니때마다 말동무도 없겠구나 생각하면 목이 메면서, 한편 그게 앞으로 내 모습이다 싶으면 “그럼, 씩씩하게 살아야지, 인간이 본시 외롭지. 당연한 거야.”라고 읊어대고 있는 나를 느낀다. 그러면서 마치 초에 불을 붙여 놓으면 바람이 훼방 않는 한 자신의 몸을 꼿꼿이 세운 채 잘 타는 촛불의 이미지에 나를 비견한다. 내친김에 나를 들여다본다. 나란 양초의 심지가 똑바로 심어져 있는지, 나를 마지막까지 잘 태우려면 심지가 꼿꼿하게 박혀 있어야 하니까. 그래. 가슴에 패인 이랑을 고르자. 그러면 심지도 절로 바로 서겠지.
세상을 지나면서 생긴 가슴밭의 이랑에 생긴 예쁘거나 어지러운 발자국들 몽땅 다 평평하게 잘 고르자. 그렇게 하면 내가 숨 쉬는데도 한결 수월하리라 믿어진다. 이 가슴밭이랑고르기는 자연거름이 되어 누구를 만나더라도 쉬이 보듬어 줄 수 있을 테고, 또 누구라도 제집인양 들러 가볍게 쉬어갈 것도 같다. 물론, 가슴밭 청소는 ‘내가 아프네. 내가 행복하네.’로 시작하지만 본격적인 고르기는 다른 이의 ‘그래, 그랬구나. 내가 어떻게 하면 되겠니? 고마워.’ 등등의 맞장구라는 추임새가 있어야만 마무리되리라. 이렇게 가슴밭이랑고르기로 그동안 돈 안주고 쳐다본 하늘값, 돈 안주고 매일 등산하던 땅값, 마냥 공짜로 마셔댄 공기값 등등 공짜라고 허겁지겁 지낸 세상의 삶에 대한 빚갚기가 시작되면서 비로소 자기의 행복을 위한 자신에 대한 봉사를 익히게 될 터인즉, 이 익힘이 절로 ‘누구와 함께 하는 최선’으로 이어지리라 믿으며, 거기서 인간세상의 미래를, 희망을 기다린다. 그렇게 봉사는 짧지만 진한 ‘순간의 행복’을 느끼는 사람이 먼저 시작하고 ‘자신과 함께 하는 최선’으로, ‘누구와 함께 하는 최선’으로 이어지게 될 터이다.
이제 나든 상대든 남아있는 가슴의 진한 흔적들,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간에 나도 상대도 모두 내게 충분히 갚음할 시간을 주자. 특히 자식노릇을 열심히 시킴으로써 나란 초의 완전연소를 꿈꾸고 내 사후에라도 그 자식들의 마지막도 나를 본 받아 ‘자식농사=100년지대계’를 이룰 때 진정한 나의 완전연소를 이루리라. 가깝고도 먼 100년의 꿈 실현에 새해에는 적극 도전하자. 아자! 아자! <행가래로 55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