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지가 없는 '자기만 옳다는 확신 = Self-righteousness' - 20호

작성자행가래로|작성시간12.02.13|조회수20 목록 댓글 0

여지가 없는 ‘자기만 옳다는 확신

= Self-righteousness’

비합리적인 신념 4

- 어떤 사람들은 나쁘고 사악하며 따라서 비난받고 처벌받아야만 한다.

 

2003년 4월 소장 최영수

 

  범생이들의 경우: 우리가 어떤 사실을 얘기할 때 보면, 대부분 ‘맞느냐?(right) 아니면 틀리느냐?(wrong)’, 또는 ‘진짜냐?(truth) 아니면 거짓이냐?(fault)’를 상정하곤 한다. 범생이들은 이런 경우의 가타 여부 확인과 옳은 선택을 열심히 하도록 길들여져 있어서 자신의 욕구도 외면한 채 주위의 눈치를 살피느라 바쁘다. 왜? 나는 착해야 하니까. 그래야 많은 사람의 인정을 받으니까. 이런 연유로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이분법적인 사고를 하게 된다.

 

  나도 ‘착한 아이’로 시어머니와 살면서 그분의 인정을 받고 싶었고, 그분 마음을 편하게 해드리고 싶어 무던히 애를 썼었다. 그러다 보니 시댁 식구들 중에서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은 무조건 나쁘고 사악하며 따라서 비난받고 처벌받아야만 한다고 나 혼자 중얼거리며 나를 다독인 세월이 많았다. 이처럼 나를 알려고는 않고 무조건 강요만 하는 시댁과의 갈등이 표출되면서 범생이로 자란 많은 며느리들은 내편 아닌 쪽은 무조건 나쁘고 사악하며 따라서 비난받고 처벌받아야만 한다에 모두 한 마음이었을 것 같다. 이렇게 마음 앓이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가 잘 모르는 사람들의 사건에서 아주 당연하게 누구는 나쁘고 사악하며 따라서 비난받고 처벌받아야만 한다고 주저 없이 말하는 나를 발견하곤 한다.

 

  소년원의 ‘착한’ 아이들: 요사이 소년원에서 봉사를 하면서 그들과 만날 때면 그들의 ‘착함’에 부닥친 다. 그들은 대부분 사람과의 관계를 맺는 일이 많이 서툴다 그러나 한 번 맺으면 옳고 그름을 떠나 의리를 지키는 것이 그들만의 인정을 받는 길이다. 그래서 그들은 ‘무조건적인 착함’으로 인해 멍부터 든다. 또한 대개는 자신을 통제하기에는 성격이 너무 급하다. 그래서 주위의 눈치를 보는 대신에 솔직하게 자신의 모자람을 들어내는 ‘무지한 순수함’에 요령부득이다. 따라서 우리가 흔히 하듯이, 가장 좋은 선택을 100점으로 보고 가장 나쁜 선택을 0점으로 본다면 그들이 선택한 것은 분명 0점짜리이나 실은 그들 입장에서는 가장 맞는 100점짜리를 선택한 것이다.

 

  실제로 이들이 공부 아닌 것을 선택할 경우, 이들은 소위 성공이란 위치에 오를 때까지 어느 곳에도 끼지 못한 채 엄청난 왕따와 방황을 겪어 내어야 한다. 그런데 그들이 흔히 겪는 일상은 이러한 이분법적인 선택과는 무관하게 목적도 모르고 이유도 모른 채 감정에 휩싸여 헤매는 경우가 더 많다. 그리고 그들의 감정은 다양하기에 이러한 상황에서 그들이 이성적인 선택을 하기에는 상당히 어렵다. 그래서 일단 한 번 선택을 하면 그들은 새로운 선택이나 변경이 어렵고 그것에 한사코 매달리게 된다고 본다. 이런 그들에게 나쁜 짓을 했으니 당연히 너희들은 나쁘고 사악하며 따라서 비난받고 처벌받아야만 한다고 하기에는 그들의 ‘외로움’이, ‘서투름’이 내 가슴을 아리게 한다. 그들은 착한 아이로서 ‘더 나은 아이’가 되는 법을 익히지 못했기에.

 

  사실 범생이들이나 소년원의 아이들 모두 ‘착한 아이 콤플렉스’에 빠져 있다는 점에서는 똑같다.

  만약에 이런 비합리적인 신념을 가지고 그대로 행한다면 이것은

 

  ⑴ 획일적인 사고에서 나오는 것이므로 독선적이고, 절대적인 것을 찾게 된다. 청소년들이 정신적 방황을 하게 되면 의지할 곳을 찾게 되는데, 이런 경우 대부분 폭력집단에 의지하는 것에서도 그 모습을 짐작할 수 있다. 이들은 ‘공부’ 아니면 선택할 것이 없고, 공부를 선택하지 않으면 갈 곳이 없는 것이 현실이다. 이러한 이분법적인 상황에서는 온몸으로 대가를 치를 수밖에 없고, 그러다 보니 그들은 몇 명이라도 집단을 형성하게 되고 그 집단의 운영으로 자기들의 목소리를 내고자 절대적인 무언가를 찾아서 맹목적인 충성과 그 집단 구성원의 도리로 의리를 지켜낸다고 본다.

 

  ⑵ 이분법적인 사고에서의 선택은 모두 100점 짜리뿐이다.

우리가 하는 대부분의 선택은 둘 중의 하나다. 즉 ‘맞느냐 틀리느냐’, 또는 ‘진실이냐 거짓이냐’이다. 그 선택에 따라 자기 대접이 달라지고, 또 자신을 건 선택이기에 그 선택 모두 100점짜리라고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선택하는 과정에서 생각나는 여러 이유가 있다 하더라도 두 개 이외의 나머지 이유들은 모두 비겁한 핑계로 치부하기에 우리에겐 중간 점수가 있을 수가 없다. 동시에 이런 연유로 우리는 스스로 합리적 사고를 하기 어렵게 만들면서 우리끼리 나눌 수 있는 대화의 끈을 놓친다고 본다.

 

  ⑶ 자기만 옳다는 확신’은 일방통행이다. 오늘날에도 종교분쟁이 끊이지 않는다. 대부분 ‘자기만 옳다는 확신’에 의한 것이 고, 더구나 신이 준 정의이기에 그들은 지고 지순한 착함을 무기로 성전에 임하기에 9․11테러 같은 잔혹한 게임을 벌이는 것이 가능하다고 본다. 요새 우리가 흔히 겪는 사이버테러도 이와 같다. 이 경우, 의사소통은 일방적이기에 자연 서로가 통하지 않게 되고 종국에는 힘의 논리에 의지해서 해결하게 된다. 이렇게 우리 사회는 자기만 옳다는 확신을 외치고 강요하는 소수 앞에서 보다 많은 다수가 침묵하는 기이한 일이 지속되고 있다.

 

  기실 지금은 모든 것이 풍요롭다 보니, 모두가 차려입고 나서기만 하면 주인이 되는 세상이 되었고 또한, 그렇게 주인이 된 자들이 그렇지 못하다고 판단한 상대를 향해 가차없이 당신은 나쁘고 사악하며 따라서 비난받고 처벌받아야만 한다고 우기는 세상이 되었다. 이제는 자기만 옳다고 확신에 찬 선택을 강요하는 사람들에게 ‘너와 내가 다르다’는 점을 일깨워 주어야 한다. 어린 시절에 가정에서나 학교에서 ‘너랑 다르기에 그는 그렇단다.’를 열심히 가르치자. 그래서 다른 사람을 다르게 대하는 법을 익히게 하자. 그러면 우리 아이들이 자신과 다르다는 이유로 상처를 받아 인간 자체를 미워하거나 불신하는 일은 막을 수 있을 테니까. 그래서 우리가 서로 다르다는 다양함으로 해서 그 존재가치도 대우받는 세상을 열어가도록 하자. <행가래로 2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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