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의 기억이 주는 더 중요한 메시지
2007년 1월 최영수 소장
아주 어릴 때 전쟁을 겪은 탓인지 그 충격적인 장면들을 지금도 도화지에 그릴만큼 선명하게 기억을 하고 있다. 그러나 푸르스름한 안개 속을 지날 때, 죽어 있는 군인들을 밟지 않으려고 조심조심 걸으면서도 그들의 몸에서 나왔을 법한 피는 전혀 기억이 안 난다는 사실이 지금도 불가해한 일이라 생각하고 있다. 다만 미루어 짐작하기로는 자신에게 너무도 충격적이어서 꼬맹이 스스로 두려움과 불유쾌함에 대한 방어를 그렇게 철통같이 해 내었을 것이라는 심증이 있을 뿐이다. 신기한 인간의 부인 본능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다 크도록 전쟁의 공포 속에서 문득 문득 두려워하며 살았다. 그 두려움은 항상 내가 열심히 삶의 정상이라고 생각하고 치열하게 흥분하면서 열을 낼 때 마치 내가 성공하고 싶지 않은 사람마냥 내게 찾아와서 나를 잠깐씩 푹 몸 담그고 있게 하곤 했다. 전쟁이 없었다면, 싸움터 한 가운데 있지 않았다면 결코 생각하지 않을 꼬맹이가 겪은 최초의 죽음이란 경험이 나를 지속적으로 유혹을 하는 것이다. ‘넌 결국 죽을 것인데 지금 네가 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물음으로 나를 내몰곤 했다. 그렇게 가끔씩 힘들게 전쟁의 공포와 죽음을 극복하기 위해 나는 크도록 한 가지 명제를 내 자신에게 각인시키려고 무척 애를 써 왔다. ‘인간이 달을 정복할 때까지는 우리나라에서 전쟁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 구체적으로 설명을 할 수는 없으나, 그 덕에 나는 나의 두려움을 다독여가며 충분히 열심을 다 해 나를 성장시킬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때부터는 중요한 결정을 할 때마다 나는「죽음」을 생각하였다. 내가 생각해도 나의 죽음은 슬펐다. 그러나 인간의 의지는 내게 다른 쪽도 가르쳐 주었다. 죽음 자체는 슬프지만, 즐겁고 행복한 죽음을 추구하는 방법을 내게 안내하는 것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내게는 지금의 내 모습을 있게 한 참으로 의미 있고 소중한 선택의 순간들이었다. 내게 있어 젊은 날의 독서와 공부는 그런 선택의 순간, 49:51의 선택을 보다 유능하고, 보다 진실 된 쪽을 안내해 주는 지침의 정보들인 셈이었다. 덕분에 나는 그렇게 열심히 책을 읽고 공부를 해낼 수 있는 숨은 본능을 키울 수 있었다. 그것은 내가 내게 제일 감사할 일이다. 지금도 나는 나이와 함께 하나씩 하나씩 깨달음을 보태는 기쁨이 나이듦의 불편함을 젖히는 게임을 펼칠 수 있기에 더욱 지금의 나에게 감사한다. <행가래로 57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