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자람을 공유하는 삶
2007년 3월 최영수 소장
나이가 들면서 그 나이만큼의 세월을 극복하느라 여러 경험을 두루 섭렵하였기에 스스로에게 나는 많은 신뢰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요사이 의외로 부정적인 생각과 행동들이 스멀스멀 잘도 기어 나오는 형국의 내 모습으로 인해 나는 적잖이 당황하고 놀란다. 내가 기대한 노년은 보이는 만큼 보고, 들리는 만큼 듣고, 기억나는 만큼 행동하는 모자람의 향유였다. 지금껏 삶의 관성으로 그대로 시간 속으로 가면 되고 나를 놓아두면 된다고 믿었다. 그런데 주위가 시끄럽다. ‘최선’의 모습이 아니란다. 불편하단다. 조금 더 젊었을 때의 내 모습을 요구한다. 나는 과거의 ‘탱탱함’이란 끈을 놓고 여유롭고 싶은데, 세상살이의 완벽함이 ‘홀로서기’란 아름다운 이름으로 ‘모자람’을 그 누구도 도와주거나 채워줄 여유를 기대해선 안 된다고 압박을 해 온다. 내게 있어 「세월의 극복」이란 지독하도록 느낀 나의 모자람을 주위에 인정받고 격려 받는 것이다. 이제는 나이듦을 빌미로 나의 모자람을 공유하고 싶은데….
‘상담을 한다.’라는 말을 나대로 정의한다면 나는 ‘자신의 부족함을 알아가는 것이다.’라고 말하고 싶다. 지금껏 나의 모자람을 극복하고자 애쓰는 와중에서 내가 세상으로부터 얻은 경험과 지식을 세상에 되돌려주고 그 끝자락에는 정녕 빈 마음과 빈 머리이고 싶은데, 자꾸만 편안하게 털어내고자 애쓰는 내게 주위는 반듯한 모습으로, 최선의 모습으로 누구도 알지 못하게 가만가만 털어내라고 한다.
사실, ‘나이듦’을 인정하기란 쉽지 않다. 언젠가 노안이 진행됨을 알았을 때 일주일가까이 자신과 실랑이 끝에 나는 거울도 안 보는 여자로 살아가는 편안함으로 전향할 수 있었다. 그래도 문득문득 어제의 내 차림이 어색하다고 느껴지면 그 순간의 당황함이 수치심으로까지 한달음에 다다른다. 마치 ‘나이 먹음’이 나만이 저지른 잘못인 양 치부되면서 한걸음에 삶의 시계를 거꾸로 돌려 자신의 탱탱함으로 무장한 시절에 머문다. 그리곤 ‘지금 이 순간’을 낭비하며 기억 속에 자신을 가두고 만다.
며칠 전 ALS병을 앓는 환자들의 다큐멘터리를 우연히 보게 되었다. 제목에서 가슴이 쿵 했다. 제목은 ‘살아있는 죽음, 바이탈 사인’이다. 한 일본 여성은 13년을 그런 남편을 뒷바라지하고 있는데 얼굴표정은 ‘행복함’ 그 자체였다. 그 남편은 최근 2년 동안은 눈꺼풀조차 움직일 수가 없어 의사소통을 전혀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는 살아있음에도 불구하고 의식 있는 뇌사자로 숨만 쉬고 있다. 그녀는 그에게 온갖 생활을 끊임없이 눈으로 직접 보고 대화하듯이 열심히 편안하게 웃으며 얘기한다. 순간 소름이 쫙 돋는다. 이어지는 그녀의 얘기는 더욱 놀랍다. ‘안락사’문제를 2년 전에 충분히 얘기 못했음을 후회하면서, 그러다 지금은 뇌파로 얘기를 나눌 수 있어 너무 행복하단다. 이 날, 나는 낭비된 내 삶의 많은 부분들을 볼 수 있었고 느낄 수 있었다. 내 사지가 온전함이 정말로 부끄러웠다. 눈꺼풀로도 의사소통을 못해서 슬퍼하는 세상도 있는데, 나를 포함하여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입장만을 챙기기 급급한 나머지 말을, 마음씀을 낭비하고 사는지…진솔함을 나누기엔 인생의 시간들이 그렇게 녹녹하게 많은 것이 아님도 진하게 느낄 수 있었다.
영화 ‘빠삐용’에서 빠삐용이 염라대왕 앞에서 자신의 인생을 낭비한 죄로 벌을 받았듯이 우리들 대부분은 이에서 결코 자유롭지 않으리라. 이제라도 자신의 진심과 마주서는 용기를 뼈아픈 모자람의 기억에서부터 출발하자. 그리고 공유하자.
분명히 한 구석은 자타가 공인하는 모자람을 의식하도록 키우려 애썼건만, 어느 새 다 자란 자식들은 ‘새내기 어른’노릇을 마치 神인양 완벽함으로 우뚝 서고자 열심이다. 그만큼 세상살이가 치열함을, 인간관계가 만만치 않음을 말하리라. 그러나 가까이에서 본 부모의 모자람만큼은 누군가와 함께 하면서 꼭꼭 채워가는 삶이기를 간절히 바란다. <행가래로 59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