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의 브랜드는 바로 나”-모두가 희망이다.
비합리적인 신념 5-완벽한 능력이 있고 사교적이고 성공을 해야만 가치 있는 사람이다.
2003년 5월 최영수 소장
개인의 성향을 알아보는 공부를 하면서 나는 내가 완벽주의자의 성향을 띠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아마도 어려서 아버지가 장기간 외국에 나가 계심으로 인해 홀로 설 수밖에 없었고 그래서 훌쩍 웃자랄 수밖에 없었던 나는, 엄마와 대화상대가 되는 동시에 엄마를 돌볼 수 있는 능력을 지녀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실수를 할까봐 얼마나 두려워 했었던지... 어느 틈에 나는 영악한 「애 늙은이」가 되어 있었다. 아이답지 않은 세월 탓에 내 또래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친구 관계를 충분히 가져 보지도 못하고 늘 앞서든지, 혼자 뒤에 남든지 하기를 반복하면서 나는 항상 외로움도 힘든 것도 당연히 참아야 하고, 가지고 싶은 것도 당연히 주위에 있는 사람에게 양보하게끔 나를 그렇게 스스로 키웠다. 그래서 마치 나는 온갖 것을 다 가진 양 주기에 바빴고 그래서 어느 새 누군가로부터 받는 것이 오히려 불편한 어른이 되어버렸다. 사실 어린 시절의 나는 실수를 해도 뒤를 받쳐줄 아버지가 없었고, 엄마에게는 부담스런 존재가 되어서는 아니 되었기에 일을 저지를 수가 없었다. 그러니 자연 나는 말이 없어지고 행동반경을 좁힐 수밖에 없었고, 결국 공부 외에는 나를 지켜줄 것이 없다고 생각하며 공부만 하는 범생이로 자랄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이상의 예에 비추어 볼 때, 완벽한 능력이 있고, 사교적이며, 성공을 해야만 가치 있는 사람이라는 신념대로 산다면,
1. 눈치꾼이 되어 소심해진다
범생이는 학교에서는 공부뿐 아니라 모든 면에서 완벽한 선도그룹으로, 부모입장에서는 최고로 성공한 자녀의 모습이다. 그러나 정작 그런 자녀의 내면을 보면 언제나 또래들을 책임지는 위치이며 본이 되는 짓만 해야 하고, 언제나 앞서 가야만 하기에 자기를 돌아 볼 여유가 없고 그저 남의 눈치만 보기 바쁘게 된다. 따라서 늘 긴장하고 있으면서 항시 모든 사태를 다 파악, 대처가 가능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 모든 것에 있어서 구도하는 스님처럼 확실하고 철저하도록 스스로에게 채찍질을 가해야 한다. 따라서 성인이 되어서는 소심하고 까다롭고 지적만 해대는 모습을 지니게 되기도 한다. 이러한 모습은 결코 그들 자신의 성공을 성공처럼 누리지도 못 할 뿐더러 그들의 삶 속에는 늘 우월감만큼이나 열등감을 지닌 채 정서의 불안정으로 우왕좌왕하고 있기에 오히려 주위의 안타까운 마음만 높여 주게 된다.
2. 대등하고 동반자적인 관계에 서툴다.
오늘날 고속정보화 사회에서 무한경쟁을 하면서 살아야 하는 우리는, 수평적으로도 다 꿰뚫어야 하지만 수직적으로도 더 높은 곳을 확보해야만 성취감과 만족감을 느낄 수 있다고 본다. 그래서 ‘저 높은 곳을 향하여’ 외롭게 앞만 보고 달리다 보니, 자신에게 아주 소중한 몇 안 되는 사람들은 으레 내 곁에서 늘 함께 하며 챙겨주는 사람이라고 내 기분대로 소홀히 하여 그들을 놓칠 수도 있다. 또한 일에 있어서는 자신 외에는 믿을 수가 없기에, 그래서 ‘남과 함께’가 안 되기에 본의 아니게 습관적으로 자신에게 고독한 질주만 채찍질하게 된다.
3. 사소한 문제에 매달려 끙끙거린다.
완벽한 능력을 지닌 사람으로 처신하려다 보니, 늘 긴장상태로 지내면서 항상 좌불안석이 되게 된다. 그래서 범생이들은 매일 매 순간 ‘죄송합니다’‘미안합니다’를 입에 달고 살아야 한다. 왜? 완벽해야 하니까. 틀려도, 실수를 해도 안 되니까. 그러나 ‘완벽함’은 만남에서 자칫 상대를 주눅들게 하여 서로가 불편한 마음을 감추느라 서먹하거나 서로 피하려 하거나 어정쩡한 상태가 되기 쉽다. 게다가 완벽해야한다는 것에 주눅 들어 있어서 보통사람들에게는 문제도 되지 않을 아주 사소한 상식적인 일에도 극복해야할 시간이 주어져야 할만큼 일상적인 불안이나 두려움에 홀로 된 미아처럼 헤매기도 한다.
가끔 나는 택시를 타고도 행선지를 말하지 않고 그냥 갈 때가 있다. 그럴 때면 나는 내가 운전하는 양 행선지를 말하지 않아도 마치 그 차는 내가 가야할 곳을 당연히 알아서 데려다 줄 것으로 믿고 있는 나를 발견하며 놀란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우리의 아이들이 ‘내가 이렇게 가만히 있어도 나는 당연히 부모만큼 성공할거야’라고 믿으며 살고 있게끔 우리 스스로 조장하고 있지는 않는지 깊히 관찰할 필요가 있다. 왜? 부모가 준비한 ‘성공’이란 과제에 몰두하다 보면, 자신의 주위에서 일어나는 모든 편안함이 언제나 당연히 보장된 것처럼 지내다가 막상 현실에서 그렇지 않음을 맛보게 될 때는 ‘왜 나만’,‘하필’등으로, 분노와 좌절로 자신을 자학하는 사람들을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부모가 차려 놓은 환경에 익숙해지면서 얻은 습관들 때문에 우리는 의외로 상처를 많이 받고 결국 자멸하기도 하고, 때로는 대를 물려가며 악순환 시키는 가정을 자주본다. 따라서 우리는 어쩌면 우리의 자녀들에게 이렇게 가르치는 것이 보다 더 합리적이지 않을까? “인생은 고통의 연속이다. 그러나 그 고통은 넘기기만 하면 지극한 희열로 우리를 감싸준단다. 그래서 우리는 고통을 부닥치면 회피하지 말고 그 고통 속으로 뛰어들어가서 이를 극복토록 힘써 애써야 한단다.” 라고. 사실 주위를 둘러보면, 형광물질의 개발과 더불어 원래의 고유한 색보다는 튀거나 퓨전화된 것들이 유행인 이 세상에서, 눈에 띄지 않는 평범은 성공이 아닌 것으로 평가받을 수밖에 없다고 본다. 한편 획일화된 교육은 여전하고 게다가 대부분의 교육은 사회화라는 이름으로 아랫사람이나 우리의 후손들을 보다 쉽게 다루려는 의지로 길들이는 작업 또한 만만치 않다. 또한 각 가정에서는 최고의 환경과 배경으로 고품질의 자녀를 키우려는 의지 역시 완강하다.
그러나 이제는 우리 모두 자녀를 있는 그대로 놓아두자. 120세의 수명이 보장될 거라는 예견과 기계가 우리보다 훨씬 똑똑해져서 우리네 삶의 많은 부분을 책임지고 선도할 거라는 예견이 충분한 이 즈음에, ‘완벽’도 기계에게 넘겨주어 버리고 약간의 모자람이 훨씬 자연스럽고 보기 좋은 모습인 인간으로 향유할 수 있도록 내버려두자.
21세기는 창의적인 사람이 주도하는 사회로 남녀의 구분없이 ‘인간’이란 단어 아래서, 남과 다름만을 내세우면서 살아가게 될 거라고 믿는다. 그 때는 비로소 모두가 희망이고 모두의 성공이 예약되리라 기대한다. 그러나 이러한 삶에는 각자가 자기만의 고유한 「나만의 브랜드」를 창조해야 한다는 대전제가 있다. 지금부터 “최고의 브랜드는 바로 ‘나’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자신이 생길 때까지 자기의 장점, 나만의 특성을 살리는 데 과감한 자기투자를 시작하자.<행가래로 21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