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형에 예쁜 옷 입히듯
2008년 1월 최영수 소장
새해가 온다는데…지난해에 가슴 아픈 일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특히, 부모의 이혼과정에서 상처받고 죄의식에, 외로움에 한없이 떠는 아무 죄 없는 어린 아이들이 제일 먼저 떠오른다. 똑똑한 젊은 엄마들도 떠오른다. 그리고 그들과 짝을 이루는 마마보이들도 떠오른다. 요즈음 똑똑한 젊은 엄마들은 시각을 다투듯 결정을 내린다. 마치 똑똑한 사람들은 지거나 참는 것을 할 수 없음을 증명하려는 듯. 그리고 아빠들은 결혼 전에 누리던 복을 행여나 누가 가로채갈까, 안 뺏기려 고성에 폭력을 쉽게 쓴다. 마치 총각시절 누린 그 복과 응석을 그들의 엄마처럼 똑같이 해 달라고 공갈 협박하는 듯. 그 와중에 아이들은 그들의 흥정대상이 되거나 아예 관심은커녕 무지막지하게 뱉어낸 말들 속에서 아직은 이혼과정 중임에도 불구하고 벌써 눈치만 보며 주변을 서성인다. 불안에 휩싸여 또는 죄책감에 휩싸여 또는 자신의 존재의 의미를 몰라서. 그렇게 내 생각의 편린들이 꼬리를 문다.
이렇듯, 이혼이라는 부모들의 ‘파괴적 행동’으로 인하여 아이들은 두려움과 불안을 느끼게 되고, 이런 감정들이 안으로 내재화되면서 ‘죄책감’을 스스로 심게 되고 이 죄책감이 ‘수치감’으로 가슴속깊이 자리매김하게 된다. 처음에 아이들의 감정은 ‘부모님이 이혼하면 어쩌나’하는 불안과 두려움이었는데, 이것이 점차 이혼이 확실시 되면서 ‘내가 잘못해서 그런 가 봐. 어쩌지’하는 죄책감으로 자리매김하고, 더 나아가 ‘부모는 이혼하고 나는 그런 사람의 아이’라는 수치감이 들게 된다. 그래서 그 후로는 인간관계 맺을 때마다 이런 과정들이 자동으로 작용을 해서 보다 부정적인 쪽으로 빠른 결론을 내고 갈등을 하게 된다. ‘내가 사랑하면 다 헤어지는데…내 삶에서 누군가를 좋아하다니…말도 안 돼. 내가 사랑을 제대로 받아 보지 못해서 사랑도 정상인처럼 못하는 사람임을 알면 부끄럽고 창피한데…그래 만나지 말아야지.’ 그렇게 자신도 잃고, 자기도 버려간다. 이러한 과정들이 악순환 고리로 연결되어 끊임없이 순수한 마음을 갉아먹게 된다. 다람쥐 채 바퀴 돌듯 맴돌다 보면 마치 그것이 삶의 지침서인양 각본을 짜서 들이댄다. 이렇게 자기 안의 각본대로 움직이는 것조차 상처받은 우리들은 알아채지 못한 채 우리는 로봇화 되어 매사 깨달음을 앞질러 처리하는 자동사고를 지니게 되고, 그렇게 우리는 원래의 사랑받으며 태어난 나를 잃으며 다른 사람이 되어 간다. 그리고 성장이란 이름으로 우리 각각의 얼굴이 다름을 그럭저럭 합리화시키면서 한편으로는 그렇게 다른 얼굴을 세월나이 따라 지키고 저장해 간다. 그러다 그것이 ‘어떤 계기’를 만나면 부정적 편린-왜곡된 사고, 반항, 거부, 마침내 폭력으로 표출케 된다.
근래 들어 도처에서 양성평등을 외치지만, 여전히 기혼 여성들의 직업으로는 ‘돌봄’에서 맴돌고 있다. 고속정보화 시대에 들어오면서부터 전업주부도 한 가정의 CEO로 자리매김해가고 있는데…. 그렇게 똑똑한 엄마들이 넘쳐나는데…. 이렇듯 여성들이 당연히 남성과 동반자로 충분한데…. 그래서 이혼의 위기로부터 가정도 지키고 사회에서도 그런 능력으로 보다 당당해져야 되는데…. 역사적으로 보아도 뭇 남성들은 무릇 위대한 엄마 품안에 있고 여성의 모성성은 ‘빈둥지증후군’에서 알 수 있듯이 여성들은 손이 비는 허전함을 견디지를 못해 우울증을 앓기도 한다. 그러나 여성의 위대함은 이러한 위기에서 더욱 빛을 발한다. 여성은 강하다. 그러나 그 강함이 힘을 발휘하게 함에는 여성 자신이 먼저 행복해져야 한다. 이렇듯 강하고 위대한 모성성을 바탕으로 먼저 여성 자신이 행복해지는 투자를 시작하자. 가정의 CEO자리에 머물면서 100년지대계를 세워 투자하자. 이 일은 ‘마음먹기’만 하면 최고의 경영자 자리는 바로 따 놓은 당상이니까. 그래, 이제는 스스로 자신에게 CEO처럼 말을 걸고 CEO같이 생각하며 행동하게 하자. 그렇게 나를 CEO로 구체화하자. 그럼, 인형에 예쁜 옷 입히듯 하면 된다. 그러니까 어린 시절에 하던 인형놀이를 다시 하자. 그 때, 내 안의 모성성을 내게 투자하자. 그래서 나를 먼저 돌보자. 가장 예쁜 옷을 내게 입히자. 내가 가장 입고 싶은 옷을, 꼭 걸치고 싶은 때에 내게 반드시 입히자. 그렇게 나를 행복하게 하자. 행복의 내음을 내게서부터 피우자. 그 냄새 따라 가면서 만나는 사람들을 안아주자. 그렇게 우리 가정을, 사회를 보듬어 가자. 그렇게 우리 여성들이 가정의 CEO로서 희망을 품듯이 그렇게 이 사회의 아픔을 보듬어, 이 세상에게도 가장 예쁜 옷을 입히는 치료자로서, 변화매개자로서, 주창자로서, 선도자로서 열심히 참여함으로써 자아성취하는 보다 많은 기회를 누리고 당당하기를 제안한다.
밖이 춥다. 치매 걸린 사람이 집을 나가 아사한 얘기를 들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고픈 사람들이 많다. 그들을 생각하며 소극적인 ‘나부터 아낌’에서 적극적인 ‘나부터 돌봄’으로 여러 고픈 사람들을 보듬는 시작을 하자. <행가래로 69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