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생각하고 충전하는 시간들
2008년 5월 최영수 소장
가정의 달 5월도 어느 덧 지나고 머잖아 현충일이다.
5월 5일 어린이날이면 도로가 나들이로 꽉 차는 모습을 보며 큰 감탄과 함께 또 한편 무언가 안타까운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하루만 어린이날을 기념하는 대부분 아빠들의 바쁨을 수긍하는 한편, 그렇게 하루를 때우는 것임을 알기에 마음 한 켠이 허전하다.
부모에게서 심어진 공부우선주의가 일중심의 숱한 엄마 아빠를 낳고 일류대의 숱한 꿈들이 최고를 지향하며 종국엔 고효율성만을 따지는 삶으로 변질된 그들이 아닌가? 그렇게 자신의 일상을 메워 가는 사고와 습관을 부모로부터 익히게 된 것이라고 생각하면, 그렇게 만든 사람들에 대한 어쩔 수 없는 분노가 가끔은 내 가슴 저 밑에서 차올라 혼자 끙끙거린다. 왜? 나를 이생에 불러준 분들인지라 감히 맞설 수 없기에.
우리의 어린이들은 깍꿍 할 때처럼 혼자 두되 부모의 따뜻한 눈빛만 있으면 스스로 느끼며 물으며 깨달아가는 시간을 가질 수 있을 텐데… 고효율 때문에 대부분의 부모들은 우리의 자녀를 스스로 잘 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려주지도 않고, 따뜻함도 함께 나누는 시간조차 봐주기가 될까 망서릴 만큼 차갑고 매서움으로 무장한 부모들이 대부분이다. 이렇게 우리 가정의 차갑고 매서운 역사는 되풀이되어 어쩌면 그렇게 판박이이듯 열성이 지나쳐 극성맞은 부모 사랑이 전승되고 있는 현실이다. 이렇게 어버이날도 흘러간다. 고효율에 쫓아 안간힘쓰며 허둥지둥 살아가는 자식들에게 부모는 어쩌다 마주쳐도 더 잘 하라는 부모님의 채근에 밀리고, 으레 봐 주기만 하던 부모님의 일방적 메시지의 당연함이 그렇게 우리 부모의 노년을 돌보는 귀찮음, 꺼름칙한 부담으로 느끼게 한다고.
가끔, 마음이 평안해지면 나는 죽음을 생각하며, 무덤을 떠올리며 묘비명을 뭐라할지 또는 마지막 순간에 게송을 부를 수 있을지 그러면 무어라 부를지를 상상하고 또 그런 나를 머릿속에다 그려보곤 한다. 그렇게 나는 내게 내가 사는 이유를, 또는 내가 잘 지내기 위한 숱한 핑계를 발굴하고 개발해 가는 나를 보며 멋 적은 웃음을 짓곤 한다. 왜? 문상을 가면 어김없이 생각하는 나의 자동사고 때문이기도 하다. 그런 주검 앞에 있는 사람들을 나도 모르게 관찰하며 그들이 슬퍼하며 내뱉는 말들이나 모습에서 죽은 자가 그들에게 심어 놓은 모습을 훑는 나를 보기 때문이다.
대부분 그러하겠지만, 우리 부부 역시 다 부모에 대한 기억을 먹으며 스스로의 삶을 살아낸다고 느낀다. 국립묘지에 묻혀 있는 수많은 군인들을 매년 찾아오는숱한 사람들을 생각해봐도 그렇다. 무언가 뇌리에, 가슴에 남은 어떤 것들이 그들로 하여금 발길을 그 곳으로 안내한다고 나는 믿는다. 아마도 그곳을 찾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들을 기억하는 잠시 잠깐의 아주 작은 기억조각들이 그들의 가슴에, 뇌리에 살아 숨 쉬고 있는 덕분이라고 믿는다. 어쩌면 지금 현재 살아가는 자들에게 살아 있는 동안 내도록 그들을 기억하는 편린들을 얘깃거리로 위안 삼으며 그렇게 그 뜻을 새기며 실천하며 살려는 애틋함이라고 느껴지기도 한다.
나의 경우 초등학교 5․6년 때의 담임선생님인 그 분에 대한 기억 때문에, 그분께서 내게 챙겨주신 사랑 때문에 이생에서 내도록 그 분에게 자랑스러운 사람이고 싶었다. 그렇게 나는 그 분을 따랐고 지금도 그 분께 누가 안 되려 몸을 사리며 산다.
우리 아이들은 촌지를 하지 않는 엄마 탓으로 꼭 타보고 싶은 ‘착한 어린이상’을 한 번도 타지 못했지만, 초딩시절 그들의 마음에 자리한 선생님이 각각 두 분씩이나 계시는 행운을 가졌다. 두 분씩이나 아이들 마음에 살아계셔서 두 배로 이생에 있는 동안 내도록 그들의 마음을, 생각을 점검해주고 채점해주시니 내 아이들은 얼마나 평안한 삶을 살아갈 것인가 여겨지면 나는 마냥 행복할 수가 있다. 내가 설령 끝이 보이는 길에 있더라도 아무런 두려움이 없으리라는 믿음에 가슴이 떨려오는 행복을 느끼기도 한다.
나는 믿는다. 많은 이들이 부모를, 아이를 생각하며 지금의 자신들을 돌아보는 5월임을. 그리고 보다 멋진 자신으로 다시 돌아와 앉아 거울을 보리라는 것을.
그 거울을 마주하고 “지금의 나는 어떻게 여기 있는가?”로 삶의 에너지를 채우자.
“왜 여기 있는가?”라면 대부분 후회와 연민으로 겉으로 드러난 자신을 비하하고 열등감에 비난과 꾸짖기 바쁠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로 자신에게 묻는 순간, 자기탐색이 시작되고 과거를 정리하며 현재를 수용하게 되고 나아가 미래를 계획할 에너지까지 얻으리라고 확신한다.
사람 노릇하느라 바쁜 5월을 지나 나무처럼 여름을 기다리자.
서로에게 일용할 에너지를 주자. 1분간의 따뜻한 눈빛으로.
6월의 절로 채워진 에너지가 여름으로 내달리자 하네,
달리자! 갖고픈, 하고픈 마음 담아 달려가자! <행가래로 73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