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반의 기대로 큰그릇을 준비하자
비합리적인 신념6.-일이 뜻대로 진행되지 않는다면 이는 무시무시하고 끔찍한 일이다.
2003년 6월 최영수 소장
사실 10년여를 넘게 봉사하면서 나는 봉사 초기의 동료들과 함께 하는 시간들 속에서 알게 모르게 마음에 상처를 많이 입었었다. 왜? 그 당시 내가 배운「봉사」는 마음으로 주기만 하는 것으로 알고 익혔기에. 그리고 「일」처럼 일정한 계약에 따라 주고받는 것이 확실한 것이 아니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봉사란 이름이 있는 그 곳에는 私心이 없어야 한다고 믿었었다. 그래서 주위에서 아주 가끔씩 드러나는 사사로운 욕심에 대해 나는 온 몸으로 저항했던 기억들이 있다. 내 생각에 봉사를 한다면서 사사로운 욕심을 부린다면 이는 나의 경우, 무시무시하고 끔찍한 일로 여겨졌고 일이 뜻대로 진행되지 않는다고 생각했기에 무슨 큰일이나 나는 것처럼 난리(?)를 치곤 했었다. 상담소를 차릴 즈음 참으로 다행스럽게도 극히 일부의 경우이긴 하지만 ‘봉사’란 이름으로 여유 있는 사람들이 사치 부리듯 일을 수행 할 수 있다고 받아들이게 되었다.
‘일이 뜻대로 진행되지 않는다면 이는 무시무시하고 끔찍한 일이다.’라는 비합리적인 신념으로 지내면,
1. 융통성을 발휘할 수가 없다.
초보운전시절에 나는 내가 가야 할 길을 완벽하게 확정짓고 그대로 길을 가야한다고 여러 번 머리 속으로 운전을 실습한 끝에 길을 나서곤 했다. 그러다 돌발 상황이 벌어지면, 그 순간의 상황이 나의 예견대로 진행되지 않기에 무시무시하고 끔찍한 일로 여기면서 당황하게 된다.
그 상황에 먼저 재빠르게 대처를 해야함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미 내가 머리 속에 심어 놓은 길대로 가려는 데서 무리를 하게 되고 때로는 뜻하지 않은 사고를 유발시키기도 했었다. 이처럼 미숙한 일에 있어 보다 더 완벽하게 준비를 할 경우에 우리는 오로지 준비한 정답(?)에 맞추려고만 하는 성향이 강하다보니 융통성이 발휘되지 않는다.
2. 따뜻한 마음을 드러낼 수가 없다.
큰 아이가 초등학교 1학년이었는데 그 때 음표와 박자를 학교에서 배우는 때였었다. 나는 사과를 가지고 가르치려고 생전 처음으로 아이와 오랜 시간을 함께 했던 기억이 있다. 결국 피아노를 가르치게 되면서 ‘일이 뜻대로 진행되지 않는다면 이는 무시무시하고 끔찍한 일이다.’란 생각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왜 그 때는 큰 아이가 박자를 쉽게 배우지 못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그렇게 힘들었던지. 큰 아이가 커 가면서 그런 경우를 나는 여러 번 반복을 했었고. 그럴 때면 나는 무시무시한 공포에 사로잡힌 사람처럼 아이를 성급하게 야단치며 주위에 난리가 난 것처럼 목청을 돋우곤 했었다. 잘 몰라서 더욱 불안한 아이에게 따뜻한 마음으로 다가서도 될지 말지 할 일을 윽박지르기만 했으니.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부끄럽고 아이에게는 많이 미안하다고 사과를 단단히 해야 할 일인 것이다. 아마도 내 아이가 모든 것을 당연히 잘 할 것이라고 무의식적으로 가지는 여지없는 기대가 나로 하여금 우리 아이가 제대로 알지 못한다면 이는 무시무시하고 끔찍한 일로 받아들이게 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런 나의 두려움 때문에 아이에게는 내 밑바닥에 깔려 있는 안타까운 그래서 염려하는 따뜻한 엄마의 마음을 보여줄 수가 없었다.
3. 진정한 의미의 대화를 할 수가 없다.
각 가정의 경우, 흔히 경제권을 쥔 어느 한 사람이 가장 말발이 세다. 동시에 그는 가정을 완벽하게 지지해야 하는 책임과 의무를 지니고 있다. 그리고 아주 당연하게 여기면서 매일 매일 자신의 생각대로 가정을 꾸려 나가게 된다. 이 말은 그가 행복한 가정을 이루기 위한 설계도를 열심히 그린다는 말이다. 그것도 매일매일 만사를 젖혀두고 우선 순위에 놓고 그리고 완성을 향해 마음을 늘 긴장한 채 살고 있다고 믿는다. 그러다 보니 그의 눈에는 흐트러지거나, 망가뜨릴까 봐 늘 주시를 하게 되고 그러니까 자연 지시하거나 지적하고, 강요하는 일 외에는 별로 할 말이 없다. 또한 자신이 열심히 그려놓은 설계도에 차질이 생긴다면 이는 자신의 뜻대로 진행되지 않아서 무시무시하고 끔찍한 일이 생긴다고 생각하기에 자신이 열심히 애썼다는 사실 외에는 어떤 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래서 그런 고집스런 상황의 히스테릭한 반응에 주변의 가족들은 대부분 멍할 뿐, 기대를 져버린 사람들로서 불안하고 불편한 상태에 있기 때문에 그들은 진정한 대화의 상대방이 될 수가 없다.
이렇듯 진정한 대화가 없으니 적절한 대안제시가 있을 수도 없다.
예전에 초등학교 5학년 때 나는 장차 어떤 사람이 되어 어떠어떠한 일을 하겠다고 생각을 굳혔었다. 그 때부터 자를 대고 그 길만 죽 그어 놓고 살게 되었고 따라서 그쪽으로만 귀가 열려 있고 그것에 대한 정보만 수집하게 되었다. 그런 내 모습은 내가 설정한 대로 빨리 자라서 부모의 그늘을 벗어나고자 애쓰는 그래서 위로만 자라는 나무가 되었다.
그렇게 지내 온 내 모습을 이제 와서 바라보니, 바로 융통성 없고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는 편협함으로 점점 소심해지고 고집만 세어지고 그랬던 것 같다. 그리고 내가 살아가는 길에 하나씩 뜻하지 않은 변화가 생길 때마다 일이 뜻대로 진행되지 않기에 어린 소견으로 좌절의 늪에 혼자 빠져서 ‘일이 뜻대로 진행되지 않으니 이는 무시무시하고 끔찍한 일’로 치부하며 허우적거렸던 것 같다. 그래서 남 몰래 푹 빠지는 좌절의 깊이는 더욱 깊었던 것 같다. 합리화를 시키는 시간도 많이 걸렸던 것 같고. 사실 그 나무는 지금은 외로움에 익숙한 나무에 그쳤을 뿐이다.
나는 상담소를 개소하면서 많은 여유로움과 따뜻한 마음들을 접할 수 있었다. 나는 학력이나 능력보다는 오로지 몸바쳐서 같이 일할 사람들(그것도 4명씩이나)을 만날 수 있었고 상담소 개소를 준비하는 동안에도 주위에서 처음 만난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좋은 일을 한다며 나와 동료들을 격려해 주는 많은 사람들 때문에 어깨가 절로 으쓱했었다. 어떤 기대도, 요구도 없이 함께 할 수 있어서 ‘이 나이의 자유로움’을 만끽하며 그럴 수 있는 내 모습에서 ‘성숙’이란 단어를 떠올리며 ‘지금 그리고 여기’에만 충실하면 되는 것으로 여겨져 신의 축복은 온통 내 것인양 행복했었다. 그리고 오랜 동안 심성수련에서 배운 대로 ‘지금 그리고 여기’에만 충실히 실천할 기회가 주어진 사실에 들떠 있었다. 이렇듯 어떠한 기대나 요구가 없이 무조건적인 것이 이렇게 행복할 줄이야.
성철 스님의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라는 말처럼 한 순간도 머물지 않아서 같은 것이 없는 이 세상에 살면서 절대적인 자(尺), 그것도 인간이 만든 자만을, 철석같이 믿고 거기에 모든 것을 맞추어 살다니…. 어릴 때의 꿈이 명료하고 구체적일수록 그들에게 많은 변수를 가르쳐 주고 그 어떤 변수에도 그 꿈을 지켜갈 수 있도록 어른들은 그들의 그릇을 크게 만들어 주는 일에 힘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자라나는 꿈나무들에게 절반만큼만 기대하는 대범함을 보여줌으로써 그들의 그릇을 크게 만들어주자.<행가래로 22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