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심스런 자연이 주는 열매
2008년 8월 최영수 소장
더위의 열매인 시원한 소나기가 열정적으로 대지를 두드려댄다.
사람들도 너울너울 미소로 그 고마움을 기다렸다는 듯 좋아한다.
중2, 9월의 어느 날 저녁 8시경에 들은 백색소음 하나가 평생 내 가슴을 두근거리게 한다.
그냥 마당에 무심히 앉아 있었는데 너무도 진한 적막을 느낀 한 순간이 있었다. 바로 그 찰나, 내 귀에 아주 작지만 대포소리처럼 땅이 울리는 듯한 큰 소리가 아득히 먼 곳에서 들려왔다. 두리번거리니 달맞이꽃의 봉오리가 벌어지는 모습만이 유일한 움직임으로 내게 감지되었다. 그리고 내 귀를 봉오리가 터지는 꽃에 들이댔는데…펑! 펑! 그렇게 달맞이꽃의 꽃봉오리가 계속 터지고 있었다. 그렇게 큰 소리를 내며 꽃을 틔울 줄이야. 내겐 마치 지축을 흔드는 대포소리처럼 들렸던 것이다. 아주 잠깐 동안이었지만, 꽃을 피워내려 산고를 겪는 고통소리임에 나는 순간 놀라고, 자연의 산고를 확인하는 압도된 깨달음에 멍했다.
그러고 보니 저만치 달이 떠 있었다.
내겐 바다와 모래사장, 푸른 하늘과 적당한 구름 몇 점,
그리고 숲과 바위가 적당히 어우러진 산이 있는, 사람은 없는 그런 사진이 있다. 나는 그 사진을 들여다보는 것을 참 좋아한다. 그리고 두 팔을 문지르며 즐긴다. 왜?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나는 어느 새 온갖 꼼지락과 꼬물거림을 느낀다. 숲에선 아주 작은 곤충들의 움직임과 그에 따라 움직이는 풀잎, 나뭇가지들의 사근거림이 보이고, 땅 속에선 온갖 벌레들이 흙과 씨름하며 때로는 다솜짓(스킨십)으로 서로 어우러지고 때론 영차영차 서로 추임새를 넣는 소리가 들리곤 한다.
그렇게 보이지 않는 생물들의 하모니를 온 몸으로 듣는 나를 감지하곤 한다.
그래서 자연의 아주 작은 움직임이 주는 오케스트라에 소름끼치도록 전율하는 나를 즐길 수 있어 보는 것 자체로 무지 행복함을 느낀다.
그 꼬물거림이 가져다주는 에너지로 내 가슴이 따뜻해지는 그 순간이 어쩜 내 삶의 엔진일수도 있기에 늘 보고 또 보곤 한다. 참으로 신통한 느낌이다.
자연은 이렇듯 조용한 무심함 속에서 평소에 많은 일들을 일구어내고 있는데, 어느 날 문득 접한 자연에 놀라 감탄과 감사를 표하면서 호들갑 떠는 나를 보곤 한다.
그래서 나는 자연끼리의 소통에, 그렇게 만든 아름다움에 관해 믿는다.
숲속의 나무 하나 하나도 함께하는 생장과 소멸에 성실하게 줄서기함을.
산의 바위도 바닷가의 모래알도 모두가 자연에 온전히 내맡긴 채 대화함을.
자신의 일부를 내어주는 대가를 치루며 그 자리에 머무는 최선을 선택했음을.
그렇게 나는 자신만의 몫의 가치를 스스로 알아서 부단하게 꼭 꼭 챙기는 정성을 자연을 통해 읽고 배울 수 있는 행복함에 젖는다.
이렇게 나는 그 사진을 통해 자연과 작가와 소통을 하며 ‘나’란 열매를 익혀간다.
우리는 자라면서 겪은 성장통이나 살면서 얻은 경험통으로 인한 흔적들이 우리를 서로 다르게 만든다. 그래서 우리는 사고방식, 습관, 선호하는 기호, 익숙한 표현 등이 다 다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렇게 다 다른 사람들이 함께 사용하는 같은 한국어라고 무심히 쓰다보면 서로에게 의도하지 않은 오해를 낳는다. 그 뿐만 아니라 열심히 파헤치며 설명하는 서로의 변명은 선입견으로 서로에게 자리매김 하게 된다. 결국은 서로에게 상처와 고통으로 인한 감정들이 쌓이면서 의사소통불능상태가 되풀이된다.
그래서 나는 상담 할 때에 가끔은 미술치료를 통해 소통불능의 문제해결을 시도하기도 한다. 눈으로 확인할 수 있기에.
그렇게 다른 이와의 만남은 물론, 자신과의 만남도 아가처럼 못 그리는 단순한 그림으로 만나고 소통하기 연습을 제안한다.
9월은 우리말로 열매라는데,
우리는 소통이라는 열매를 위해
우리의 엄마들처럼 제살의 아픔을 통한
다양한 따뜻함으로 익어가는 ‘나’를 한가위 보름달에 꿰자.
‘손에 손잡고~’ 코리아나의 노래처럼 그렇게 세상과 공명을 하자. <행가래로 76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