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은 신에게, 우리는 최선을
비합리적인 신념7.-
인간의 문제에는 완벽한 해결책이 있고 만약 그 해결책을 발견할 수 없다면 이는 끔찍한 일이다
2003년 7, 8월 최영수 소장
매스콤에서 자녀동반 자살 사건을 열심히 보도하면서 각양각색의 의견들을 토해낸다. 그런 상황의 당사자를 떠올려 볼 때 그녀가 가졌을 많은 생각의 이면에는 분명 이러한 비합리적인 신념이 있었을 것이다. ‘인간의 문제에는 완벽한 해결책이 있고 만약 그 해결책을 발견할 수 없다면 이는 끔찍한 일이다’란 신념 말이다. 짐작컨대 그녀는 빚은 졌고 갚을 길은 없고 어디에서도 애 셋을 키우며 살아갈 길은 망막한데 혼자 죽어 버리면 이 아이들의 운명은 어찌될까 하며 몇날 며칠을 밤새우며 골똘히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완벽한 해결책을 찾을 수 없었고 그럴 때의 상황은 끔찍함으로 그녀에게 다가왔을 것이다. 얼마나 절박한 심정이었을까? 자신이 누구에게나 귀찮고 불편한 사람이 되었으니 자존감은 완전히 바닥에 내려앉고. 얼마나 힘들었을까? 마지막 남은 자존심으로 어쩌면 제 자식을 제 맘대로 처리하려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사실 상담소에서 일을 하다 보면, 정말로 믿을 구석이라곤 한 군데도 없지만 소도 비빌 언덕이 있어야 비빈다고 속는 셈치고 믿어주는 것이 진심으로 도와주는 것일 만큼 딱한 사람들이 더러 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지만, 전혀 스스로는 무위도식할 줄밖에 모르는 사람들도 있어서 그들이 의욕을 가질 때까지 지속적으로 누군가는 도와주어야만 함에도 불구하고 제도적으로 해당이 안 되어 다시 사회에 부적응자가 되는 경우도 허다하다. 그런데 이런 류의 사람들 마음속에는 이러한 비합리적인 신념이 대신 자리잡고 있기때문에 완벽한 해결책은 찾을 수 없고 현실을 끔찍한 것으로 받아들이면서 때로는 사기를 치고 절도를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되어진다.
한편, 여러 직종의 사람들이 모여서 빗나간 사춘기 아이를 상담할 경우에도, 외견상 상당히 완벽한 시스템을 이루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부모의 협조가 제대로 되지 않아서 그 아이를 바람직한 위치로 돌려놓는데 실패한 경우도 있었다. 부모와의 상담은 언제나 시간도 충분치 않았고 그분들은 대개 고지식해서 끝없이 옳은 이야기만 하실 뿐이셨다. 측은지심을 끌어내기엔 그들의 삶에 빈틈이 없기도 했다. 아마도 내가 이러한 비합리적인 신념에 매어 있었다면 나 역시 많이 끔찍한 일로 여기며 버거워 했을 것이나, 다행스럽게도 그 아이를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은 그분들임을 알고 있기에 그분들의 사랑을 아이에게 전해주면서 마무리를 한 적이 많았다.
이러한 비합리적인 신념을 고집한다면
1. 부정적 사고를 하게 된다.
많은 아이들을 데리고 캠프를 가끔 떠나곤 했다. 그럴 때면 으레 안전사고 점검에 거의 모든 시간을 할애한다. 만에 하나라도 완벽하게 해결되지 못 하면 이는 실로 끔찍한 일이다. 그래서 모든 세부일정을 꼼꼼하게 챙기고 담당자들의 일거수 일투족을 점검하느라 눈빛이 날카롭고 마음이 온통 긴장되어 참여하는 아이들에게조차 따뜻하고 반가운 표정이 전달되기는커녕 따지는 표정과 지시적인 말투는 물론 ‘--마라’ 투성이의 말들만 습관적으로 쏟아놓게 된다. 이렇듯 매사를 사고와 연고와 연관지어 빈틈없이 경계를 한다는 것이 부정적 생각을 지니게 하고 이러한 부정적 생각이 거꾸로 화를 자초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만큼 우리 인간은 주위와 알게 모르게 나누는 기(氣)가 있다. 이왕이면 도전적인 기를 최대한 살려서 캠프를 가는 목적도 충분히 살려야 한다. 각 자 좋은 기를 만들고 서로 교환하여 좋은 장을 만들자. 우리의 얼굴도 훨씬 예뻐진다.
2. 불신감을 조장하게 된다.
아픈 몸으로 캠프에 참여한 적이 있었다. 만약에 강의할 선생님이 갑작스럽게 못 오시는 아주 특별한 경우를 생각해 보자. 이럴 때 ‘그분 아니면 안 된다’고 생각하고 이를 끔찍한 일로 여기고, 그분 외에는 완벽한 해결책이 없다고만 생각한다면 어떤 해결책도 실행에 옮길 수가 없어진다. 더구나 어떤 해결책도 발견할 수 없다면 이는 더욱 끔찍한 일로 여기며 더더욱 끙끙거리기만 하게될 뿐이다. 그러므로 해결을 도와주려는 주위의 사람들도 충분히 자신을 발휘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상대의 능력에 대한 불안감이 불신감뿐만 아니라 인간관계에서도 불신감이 싹트게 된다고 생각한 다. 나는 “모든 인간은 자기 그릇만큼의 능력이 있다”고 믿는다. 그것이 혹여 싹에 불과하다면 그것을 키울 시간을 기다려 주면 된다. 우리도 기다려 주자. 기다림의 여유는 나도 평안하고 그도 너도 다 평안해지니까.
3. 용기를 잃게 된다.
갑작스런 선생의 불참으로 맡겨진 일을 하려는 사람에게 전반적인 강의에 대해 설명을 해주며 “만약에 당신이 제대로 못할지 모르니 그 때는 내게 넘기라”고 한다면 그 담당자는 분명 용기를 잃고 하다가 어디쯤에선가 그 사람을 찾게 되는 눈빛을 보이고 결국은 ‘다 된밥에 재 뿌리기’형상으로 물러나게 되기 십상이다. 하지만 강의가 시작된다는 것은 무척 흥이 나는 일이다. 그리고 기대 이상으로 해주면 더욱 신이 나겠지만 설령 그렇지 못했다해도 이는 충분히 반가워 할 일이다.
우리는 아주 작은 것에서부터 만족해야 하는 연습도 충분히 할 필요가 있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용기를 낼 수 있으니까. 그 곳에서 희망을 볼 수 있게 되니까. 어차피 우리 인간 자체가 미완성이지 않은가? 삶도 미완성, 일도 미완성…. 지금의 세상을 보라. 우리가 잘 살겠다며 저질러 놓은 모습들을! 자연의 경우, 모두가 잘 살자며 열심히 산 속으로 들어가서 자리잡는 아파트 타운들, 그들 덕분에 더욱 많이 쏟아지는 쓰레기와 공해물질들. 지금의 새만금은 어떻고 -서로의 이해득실이 첨예한 가운데 각 자가 예비한 신들도 다 참여했는데- 해결은? 이렇듯 우리 인간은 자신의 모자람을 신에게 의지하고 살기도 하고 때로는 각 자 예비한 신이 다르다고 또 미워하는 그리고 전쟁도 불사하는 모자람을 지니지 않았는가? 이제 우리는 완벽함일랑 신에게 돌려드리고, 우리끼리는 이웃 사촌으로서의 따뜻한 배려를 나누고 우리 스스로는 우리에게 주어진 정성을 다하여 열심히 최선을 다해 살아가자.<행가래로 23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