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나의 좋은 관계형성으로 행복을 주도해 나가자 - 25호

작성자행가래로|작성시간12.02.13|조회수21 목록 댓글 0

나와 나의 좋은 관계형성으로 행복을 주도해 나가자

 

-비합리적인 신념9. 행복이란 외부사건들에 의해 결정되며 우리는 통제할 수 없다.

 

 

2003년 12월 최영수 소장

 

  나는 30년도 훨씬 넘어서 만나는 카페 친구들이 참 반가웠다. 컴퓨터를 잘 다루는 친구도 자랑스러웠고, 각자가 함께 나누어도 좋다고 생각하는 이야기들을 올리는 부지런함도 부러웠고, 그렇게 자신 있게 자기의 판단대로 카페를 채우는 모습도 그들이 살아온 자부심으로 여겨져서 나도 열심히 꼬리글을 달면서 덩달아 행복해했다. 그런데 얼마 안 가서 나는 내가 혼자 표현하는 일방적인 의사소통(아주 잠시인데도)에 갑갑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짧은 글로 내 느낌을 친구들과 공감하면서도 나답게 표현하고 싶은 강한 욕구도, 표현의 서투름도 다 한 몫을 했다. 내 자신이 봉사한다는 생각에만 치우쳐 마냥 한 쪽만 바라보고 살아왔다고 스스로 강하게 인식해서인지 의외로 내 모습은 나의 옛날 모습으로 다가가서 그 때처럼 같이 웃고 싶다는 한 가지 마음으로만 그들과 나누고 싶어하는 나를 보게 되었다. 아마도 그동안 치우쳐 살아 온 내 모습이 고스란히 보여서 친구들이 나를 부담스러워할까 봐 많이 조심스러웠나보다. 그리고 친구들이 나의 유치한 모습을 보면서 변함 없는 내 모습을 아주 반가워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내가 또한 불편할 수도 있겠다고 여겨지기도 했다. 대부분 행복은 외부의 사건에 의해 결정되며 우리는 통제할 수 없다고 믿고 있지만, 나의 경우, 나를 내가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행복하기도 하고 때로는 불편해하기도 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분명히 행복은 우리들 자신이 스스로를 사랑하고 믿어주고 소중히 여기는 가운데 자신들에게 하는 대접에 달려 있음을 느낀다.

 

  이러한 ‘행복이란 외부사건들에 의해 결정되며 우리는 통제할 수 없다.’라는 비합리적인 신념을 가지고 지낸다면,

 

  1. 언제나 ․․․ 탓을 하고 원망이 많아진다.

  언젠가 TV드라마에서 들은 이야기인데-네 잎 클로버는 행운이지만 세 잎 클로버는 행복이라고, 모두들 네 잎 클로버의 행운을 찾느라 행복을 비켜간다- 얼마나 세 잎 클로버에게 미안했던지, 요새는 네 잎 클로버를 찾겠다고 쭈그려 앉는 일이 내게서 없어졌다. 행복이란 것이 세 잎 클로버처럼 우리들에게 보인다면 그리고 내 손에 쥘 수 있다면 우리들은 그만큼 행복을 못 느끼고 살겠지 싶다. 하긴 남 탓을 하는 동안만큼 그만 큼 덜 불행할 수도 있겠다. 그래도 매 순간 지천으로 널린 행복을 찾아 눈을 번득이자.

 

  2. 자신에 대한 신뢰가 없어진다.

  나의 행복이 내 남편과 자식 손에 달렸다고 가정을 해보자. 나는 끊임없이 그들을 살펴야 하고 나중에는 눈치보느라 숨도 제대로 못 쉬게 되고, 한편 그들은 나를 행복하게 해주려다 급기야는 부담 때문에 자신의 욕구도 접어 버리게 되어 서로가 다 불행한 스스로의 모습을 보면서 절망감 속에서 허우적거리게 될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이치다. 나에 대한 문제 해결이 너의 손에 쥐어있으니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어지고 결국엔 자신의 무능으로 비쳐지고 나아가 자신에 대한 신뢰가 너도나도 없어 지게 된다. 행복은 내 손에 있다는데 알아차릴 방법이 없으니․․․

 

  3. 끼리끼리 모이게 되어 불행의 시나리오를 쓰게 된다.

  문득 문득 느끼는 일이지만 내 주위에는 나랑 닮은꼴들이 많음을 알 수 있다. 마치 끝말잇기처럼 내 모습의 어느 한 자락에 링크되어 모이는 군상들을 보면서 내 문제의 극복이 없이는 주위의 어떤 문제도 특히, 사람관계 에서 그 해결이 쉽지 않아 좌절에 빠져 있는 나를 자주 본다. 이렇듯 상황 의 공감이나 사건의 동의를 주위에서 얻음으로써 나를 합리화하는 방법 밖 에 없다면 우리는 끼리끼리 모여 비슷한 기를 교환할 뿐이다. 틀림없이 함께 불행해지는 공범으로서 어깨를 나란히 씩씩하게 행진하고 있으리라.

 

  어릴 적에는 끊임없이 부모의 생각대로 키워진다고 하는데 그것은 믿을 것이 못 된다. 부모의 생각이란 것 자체가 남과의, 아니면 부모 자신과의 비교에서 만들어지는 키 재기이니까. 게다가 학교생활이 사회생활의 연습이 아니라 무한 경쟁으로 치닫다 보니 자신의 모습은 자꾸 세상의, 부모의, 교사의 요구대로 덧칠을 하게 되고 그것이 너무 두껍다 보니 벗겨내는 작업도 만만치 않다. 그런데 컴퓨터 보급으로 펼쳐진 인터넷 세상은 새로운 나를 마음대로 만들어 낼 수 있으니 이러한 인터넷 세상의 익명성으로 우리는 더욱 미궁으로 빠져든다. 겉으로 보이는 내가 나임에도 불구하고 상대는 나를 알아볼 수 없음은 물론이다. 더구나 성형술의 발달과 더불어 예쁜 외모에의 욕구를 부추기는 여러 사회적 행태로 인해 우리는 어느 새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나를, 스스로 아름답게 성장시킨 나를 자신이 버려버리거나 스스로도 택하지를 않은 채 잃어가고 있다. 여기에 과학의 엄청난 발전도 한 몫을 거든다. 다시 갈피를 찾고자 원점으로 돌아가려 해도 처음에는 돌아갈 곳도 어딘지 몰라 헤매고 나중에는 정말 돌아갈 수 있기나 한 것인지 자문을 할 만큼 멍청해진다. 외부로 눈과 귀를 향한 채 살아 온 우리의 나들이는 너무 멀리 왔기에 내게로 돌아가는 일 또한 결코 쉽지 않다. 매일 매일 행복 하고픈 욕망만큼이나 행복으로부터 멀리 도망친 꼴이라니․․․. 나로부터 도망친 내 모습이 아니겠는가?

 

  이제 양어깨를 나의 두 팔로 꼭 껴안고 눈을 감아보자. 그리고 나의 탄생을 기뻐해 준 사람들을 생각하며 그들의 표정을 5분동안만 생생하게 느껴보고 상상해보자. 자 눈을 떠보자. 5분전의 나와 지금의 나는 어떻게 다른가? 이렇게 ‘아름다운 나’를 만나는 연습을 시작으로 나만의 아름다움을 익히고 사랑하면서 주위에 산재해 있는 신이 내게 예비해준 행복의 조각들을 적극 맞추어 가자. 그러면 내 안의 나도 나 따라 덥석 행복해지리라. <행가래로 2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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