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경, 서경제도, 대왕세종, 세종대왕, 드라마 세종대왕, 세종, 황희, 황희 정승, 역사,
서경 (고려·조선 제도) [署經]
고려와 조선 시대 신임관원의 임명과 법령, 시호(諡號) 제정 등 주요사안에 대해서 대간(臺諫:고려시대에는 어사대와 문하성 낭사, 조선시대에는 사헌부와 사간원)의 서명을 받아야 했던 제도.
전자를 고신서경(告身署經), 후자를 의첩서경(依牒署經)이라고 한다. '서'는 '서명', '경'은 '거친다'는 뜻이다.
고신서경은 인사담당 부처에서 관원을 선발하여 오늘날의 사령장에 해당하는 고신을 작성하면, 고신과 4조(四祖:父·祖·曾祖·外祖)를 기록한 단자(單子)를 대간에 보낸다. 대간에서는 각각 관원 2~3명씩을 보내 양사가 합좌하여 신임관원의 가계와 전력(前歷), 인물됨 등을 심사하여 전원이 찬성하면 고신에 서명했다. 부결되면 '작불납'(作不納)이라고 쓰고 서명하지 않았다.
서경을 통과하지 못하면 관원은 해당관직에 취임할 수가 없었다. 조선 후기에는 반대가 나오면 3차까지 재서경을 하여 그래도 부결되면 임명이 취소되었다. 그밖에 가계나 전력에 결함이 있어 인사담당부서나 청요직(淸要職)에 임명할 수 없는 자는 '정조외'(政曹外)라고 단서를 달았으며, 한품서용 대상자는 '한품자'(限品者)라고 적었다. 서경 대상 관원은 고려와 조선이 크게 달랐다.
고려시대에는 1~9품은 전관원이 서경을 받아야 했다. 그러나 조선은 건국초에 5품 이하 관원만 서경을 받도록 했다. 고신의 격식도 2가지로 나누어 서경이 필요 없는 4품 이상 관원의 고신은 관교(官敎)라고 하여 왕이 바로 하사하고, 5품 이하 관원은 교첩(敎牒)으로 했다. 이를 관교법이라고 한다. 이 조치는 조정에서 상당한 논쟁을 야기하여 몇 번 수정되었으며, 한때는 전관원 서경법으로 환원되기도 했다.
그러다가 1423년(세종 5) 태조 때의 조치가 확정되었다. 이후에도 여러 번 개정이 있었고 한때는 군사고신도 대간이 서경하게 했다가, 1470년(성종 1)에 태조 때의 구분을 확정하여 〈경국대전〉에 수록했다. 또 50일 이상 서경하지 않으면 왕에게 보고하게 함으로써 서경권이 더욱 약화되었다.
의첩서경도 절차는 고신서경과 거의 같았다. 고려시대에는 전관원이 서경을 받아야 했으므로 서경제도는 대간을 통해 왕의 권한을 제약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조선에서는 고려 때와 같은 의미는 퇴색했지만 5~6품에 몰려 있는 지방수령과 무장들의 인사에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조선은 중앙집권제를 강화하여 지방관을 대폭 증가시키고, 이들의 품계를 6품 이상으로 상승시켰다. 따라서 서경은 백성을 직접 통치하는 직책인 이들 관직에 대신의 친인척·측근·문객(門客) 또는 토관(土官) 및 서리 출신이 왕이나 대신에게 특채되는 것을 견제하는 데 커다란 의미가 있었다. 조선 후기에 지방관의 매관매직, 문음자(門蔭者) 임명 등이 증가하자, 지방관인 도사(都事)·수령은 4품 이상 관원도 서경하게 했다.
다음으로 서경은 양반관료사회의 품격을 유지하고 신분제의 문란을 막는 데도 중요한 목적이 있었다. 이 점은 고려시대에도 마찬가지였다. 서경에서는 가계부정자, 서얼, 음행녀, 재가녀(再嫁女)의 후손, 장죄자(贓罪者:횡령, 뇌물수수자 등) 등이 중요한 심사대상이 되었다. 16세기 이후에는 의정부·대간·정조·장례원 등 주요부서의 관원은 처(妻)의 4조도 고찰하게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