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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이야기

헤이그 밀사 이위종의 '한국을 위한 호소' 내용과 분석

작성자멋진사람|작성시간26.06.20|조회수30 목록 댓글 0

헤이그 밀사 이위종 한국을 위한 호소전문 분석

 

헤이그 밀사 사건이란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에 1905년에 있은 을사조약의 부당함을 세계에 알리기 위하여 고종이 세계만국평화회의에 밀사를 파견한 사건이다. 대한제국은 이미 외교권을 상실한 상태였으므로 회원 자격이 없었고 일본의 방해와 러시아의 방조로 회의에 참석하지 못함.

 

전문 내용(국사편찬위원회 ‘신편한국사’)

 

러일전쟁 중 일본이 공언한 전쟁목적의 두 가지는 첫째, 한국 독립의 유지와 영토보전, 둘째, 극동의 교역을 위한 지속적인 문호개방의 유지였다. 또한 일본의 정치가들은 이번 전쟁이 일본 자신만이 아닌 모든 민족의 문명을 위한 싸움이라고 선전하였으므로 동양에 파견된 영. 미인 모두가 일본의 언명에 대한 이행을 믿었으며, 특히 한국은 일본과 동맹관계를 맺고 전쟁 수행에 필요한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지원했을 뿐만 아니라, 우리들 한국인들은 오랫동안 장기집정으로 인한 부패, 과도한 세금 징수와 가혹한 행정에 허덕여 왔으므로 일본인들을 애원과 희망으로 환영하였다. 그 당시 우리들은 일본이 부패한 정부 관리들을 처벌해 주고, 일반 백성들에게는 정의감을 북돋워 주고, 정부 당국의 정치. 행정에 대해서는 진실한 조언자가 되고, 한국민들의 개혁운동을 잘 인도하여 줄 것으로 확신하였다. 일본인들은 거듭하여 그들의 한국 진출을 한국의 문호개방과 모든 백성을 위한 기회균등의 보존을 공고히 하기 위함이라고 극구 강조하였다.

 

그러나 일본은 연승을 거두게 되자 태도를 바꾸어 추잡하고 불공평하고 비인간적이고 이기적이고 가혹한 처사를 감행하였고 지금도 여전하다. 그들의 맨 처음 요구는 한국 영토의 대부분을 점하고 있는 미개간지를 하등의 보상도 없이 50년간 그들에게 양도하라는 것이었고, 두 번째의 요구는 일본 황제 특사인 이토가 저들 군마보포병을 동원하여 궁궐을 애워 싼 가운데서 11월 15일에 제시한, 그들에 의해서 꾸며진 조약체결 내용을 황제가 동의하라는 것이었다. 특히 이 조약의 초안은 첫째, 한국의 대외적 문제의 관할 및 지휘는 일본에게 위임할 것, 둘째, 한국 정부는 국제적 성격의 어떠한 회합이나 약정일지라도 일본의 중개없이는 결정짓지 않는다는 것을 서약할 것, 셋째, 서울에 일본 통감을 배차할 것, 넷째, 한국 내에 일본 주재관을 임명할 것 등 네 가지로 되어 있다.

 

한국 황제와 대신들은 이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을 결심했는데도 이토가 이를 고집했기 때문에 황제는 이에 동의하느니보다는 오히려 죽음을 택하겠다고 선언하였다. 그러나 17일 저녁까지도 결론을 짓지 못하자 일본은 “이를 수락하지 않으면 만사에 있어서 즉각적인 파괴를 의미할 뿐이다.”라고까지 위협해 왔다. 공포에 질린 대신들은 주변에서 나뭇 잎이 바스락거리는 소리만 듣더라도 일본 군인들이 살그머니 옆에 접근해 오는 것으로 상상할 정도였다.

 

급기야 완강히 거부하는 참정대신 한규설을 체포하여 감금한 상태에서 을사조약이 체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정치 평론가나 선전가들은 세계만방에 대하여 이 조약이 마치 한국측의 선의적이며 자진적인 양보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와 같이 가장 우의적이며 형제적인 우호 관계를 가진 체 하면서 슬쩍 상대방의 호주머니를 터는 위선가는, 공개적인 강도 행위보다도 더욱 경멸해야 할 일이며 잔인한 일일 것이다.

 

1905년 11월 17일 이후 일본은 공식적 비공식적으로 강탈. 강도 또는 잔인한 흉계 등을 감행하였으니 이로 인한 3년간의 실질적인 손해는 구 체제하 정부의 가장 잔혹한 정치가 50년간 저지른 해독보다 더욱 심한 것이었다. 이토가 일본에서 1억원(500만불)을 차관해 온 돈으로, 재한 일본인 관리들은 본토 봉급의 3~4배를 받았고, 수도공사는 일인들의 거주지인 제물포와 서울의 일본인가(日本人街)에만 시설되었으며, 교육 기관의 설치는 한국어를 근멸(根滅)시키고 일본어를 대신 가르치려는 것이었고, 한국인의 해외 유학은 반일주의를 호소. 선전할 우려가 있다고 불허하였으며, 행정개혁은 유능하고 신망 있는 한국인 정치가를 축출하고 일본화한 사람들로 대치한 것에 불과하였다. 뿐만 아니라 일본 정권은 개인 소유지를 군사상의 필요에서 아무런 보상없이 박탈하였으며 화폐제도를 개혁하여 한국 상인들을 파산상태로 몰아넣었다.

 

일본인들은 항상 평화를 말하지만, 어찌 사람이 기관총구 앞에서 평화롭게 살 수 있겠는가. 한국민이 모두 죽어 없어지면 모르겠지만 그렇지 않은 상태에서는 한국의 독립과 한국민의 자유가 이루어지지 못하는 한 극동의 평화는 있을 수 없다. 한국 국민은 독립과 자유라는 공동 목표에 대하여 정신적으로 결합되어 있으며, 이 목적을 위하여 한국 국민은 죽음을 무릅쓰고 일본인의 잔인하고 비인도적이며 이기적인 침략에 대항하고 있다. 여하한 행동을 해서라도 일본인과 싸우려고 결심한 2천만의 한국 국민을 대량 학살한다는 것은 일본인에게 있어서 그다지 흥미 있거나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은 사실이다. 일본은 한국의 독립과 문호개방에 대해 엄숙한 공약을 배반하였다.

 

2. 전문 분석

1) 우리 교과서나 방송을 비롯한 대부분의 매체에서는 전문의 앞부분(붉은색 부분)을 잘라내고, 뒷부분만 보여줘 일본의 부당한 억압과 위선적인 부분만을 강조하여 왔다. 전문의 앞부분은 고종의 40년에 걸친 정치를 폭압 정치로 규정하고 있다. 민족주의 사관에서는 고종을 근대화를 지향한 계몽 군주로 설정한다. 그러면서 일본의 잔혹한 억압으로 근대화를 이루지 못한 비운의 군주로 그려낸다. 계몽 군주와 비운의 군주라는 그림을 그려놓고 거기에 맞는 색깔을 입히는 것이 민족주의 사관이다. 따라서 민족주의 사관 입장에서는 고종의 정치를 폭압 정치라 규정한 앞부분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지만, 헤이그 밀사는 자주독립을 열망한 고종 만들기의 좋은 재료가 되는 것이다. 민족주의 사관이 늘 그러하듯 그림에 맞지 않는 소재는 과감히 도려내는 과정에서 앞부분이 사라진 것이다. 이 내용이 공유되고 대중에게 널리 알려지면 그동안 해왔던 고종에 대한 미화, 대한제국에 대한 미화가 한순간에 허물어지기 때문이다.

 

2) 일본의 한국 진출을 애원과 희망으로 환영했다는 것이다. 을사조약의 부당성을 알리기 위해 고종이 보낸 밀사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내용이 파격적이다. 고종 본인은 밀사를 보낸 적이 없다는 입장이고, 밀사가 가져간 위임장의 국세가 위조된 것이 분명한 점 등 의문이 많이 있지만, 고종이 보냈다는 것이 통설이다. 그렇다면 이들은 왜 일본의 한국 진출을 애원과 희망으로 환영했다는 표현을 넣었을까? 이들이 당시 조선의 실태와 고종의 통치에 대해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고 이해해야 할 거 같다. 세계사적으로도 드물게 고종과 민비는 왕이 직접나서 매관매직에 앞장섰다. 돈을 주고 산 관직은 투자금 회수를 위해 백성의 수탈로 이어졌다. 고종에 의해 자행된 개화파에 대한 숙청은 조선이 근대 국가로 성장 기회를 앗아가 버렸다. 이들은 계속되는 고종의 통치로 인해 조선이라는 나라는 자체적으로 정화할 능력을 상실했다고 판단한 것 같다. 자체 정화가 어렵다면 외부의 물을 끌어들여 정화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들은 조선 내부를 정화해줄 외부의 물로 일본에 희망을 걸었다는 것이다.

 

3) 조선을 새롭게 만들어줄 구세주로 일본을 바라보았지만, 일본은 우리의 믿음을 배신하고 일본을 위한 이익만을 추구했다고 일본을 비난하고 있다. 그때나 지금이나 모든 나라는 자국의 이익을 우선하는 것이 외교의 근본이다. 일본이 자국의 이익을 위해 행한 행위들을 비난하기에 앞서, 당시 조선은 왜 자국의 이익을 지켜내지 못했는가를 살펴봐야 할 것이다. 세상에는 선한 민족도 악한 민족도 없다. 더구나 약육강식이 지배하는 제국주의 시대에 남의 선의를 기대한다는 것은 어리석어도 너무 어리석은 짓이다.

 

3.헤이그 밀사와 고종의 퇴위

일본은 고종이 밀사를 파견할 것이라는 것을 몇 달 전부터 파악하고 있었다. 사후 대책까지도 미리 마련해 놓은 상태였다.

 

일본은 밀사 파견 사실을 확인하고, 통감 이토는 대신(대한제국 대신)들을 불러 밀사 관련 전모를 밝히라고 닦달했다. 그사이 “유폐 중인 황제에게는 자금이 있을 리 없다”고 판단한 고마쓰(통감부 외사국장)는 한성전기회사(고종이 지분을 가진 회사) 사장인 미국인 콜브란을 만났다. 고마쓰가 물었다. “요즘도(수시로 고종에게 뇌물을 줬다는 의미) 황제에게 용돈을 주시는가?”. 콜브란이 대답했다. “15만 엔을 달라고 해서 영수증을 받고 (황제 조카벌인)조남승에게 돈을 줬다”. 고마쓰는 곰곰이 생각해보니 조남승이 수입이 없을 텐데 요즘 갑자기 씀씀이가 헤퍼졌다는 사실을 알았고, 조남성을 불러 따졌더니 15만 엔은 미국인 헐버트와 이준, 이상설과 본인이 나눠 가졌다고 자백했다. 또 고종이 헐버트가 마련한 친서 초안과 위임장을 밀사들에게 줬다고 자백했다. 자백에 따라 한 프랑스 교회를 수색하니 각종 비밀 서류와 함께 위임장과 친서 초안이 나왔다.‘ (명치외교비화, 原書房, 1976)

 

이렇게 밀사와 고종의 관련성이 밝혀지자

 

’일본에 대한 공공연한 적의를 발표한 것으로 협약 위반을 면할 수 없는 것이므로, 일본은 한국에 대해 선전(宣戰)할 권리가 있다는 것을 총리대신을 통해 통고하였음. 황제는 급히 그것은 ‘짐과는 관련이 없다’고 변명을 하였으나, 본관은 현재의 사건은 이미 거짓말로 해결될 것이 아니라고 하고....‘(통감부 문서 5권. 헤이그 밀사 파견에 대한 한국 황제에의 엄중 경고-1907년 7월 7일) (모든 증거와 배경이 고종과 관련성을 증명하고 있는데 고종은 나와는 무관하다고 거짓말과 변명으로 일관했다. 그렇게 자주독립을 열망했다는 고종은 왜 내가 특사를 보냈다고 말 한마디 못했을까.)

 

헤이그 밀사 공개 후 이토 히로부미는 일본에서 건너와 고종을 알현(1907년 7월 4일)

“일본에 저항하려면 은밀히 하지 마십시오. 부디 대놓고 하십시오. 우리가 적수가 돼 드리겠습니다” (이것은 이토가 고종을 대놓고 희롱한 것이다.)

 

1907년 7월 19일 고종 강제 퇴위. 퇴위에 앞장선 사람들은 통감부가 아니라 을사오적으로 대표 되는 대한제국의 관리들이었다. 고종은 물러나지 않겠다고 저항함. 하지만 권위가 땅바닥에 떨어질 대로 떨어진 고종의 말에 순응할 대신들은 없었다. 결국 고종은 물러나고 순종이 2대 황제에 오름.

 

1907년 7월 20일 대한제국 황제 순종, 거짓 밀사 사법처리 명령함. 1907년 8월 8일 평리원은 이상설을 교수형, 이위종과 이준을 종신형에 처함. (여기서도 고종의 본성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일은 본인이 만들고, 드러나고 불리하면 누군가에 덮어씌워 본인은 벗어나는 저열한 수법)

 

1907년 8월 1일 대한제국 군대 해산.

 

 

 

*조남승이 자백을 한 이유는 처벌을 면하기 위한 것이었다. 조남승이 콜브란에게 돈을 받은 사실을 확인한 고마쓰는 사용처를 밝히지 않으면 횡령죄로 처벌하겠다고 위협했고 이에 조남승이 자백하게 된 것이다. 이 비자금을 수사하는 과정에서 헤이그 밀사와 고종 간의 관련성을 밝혀낸 것이다.(위임장과 친서 초안)

 

*위임장과 친서는 헐버트가 마련, 자금은 콜브란 제공

 

*당시 이준은 국내에, 이상설은 간도에 거주. 이위종은 러시아에서 합류. 이준과 이상설이 처음 만난 곳은 블라디보스톡이다. 둘은 블라디보스톡에서 1달간 체류. 블라디보스톡 한인들의 기록에 따르면 둘이 한 일은 동포들로부터 여행 자금을 모금하는 것이었다. 이들은 조남승으로부터 여비를 받았을 텐데 모금을 한 이유는 뭘까? 여행 자금이 모자랐거나 없거나 해서 귀중한 1달을 소비하며 모금을 한 것이 아닐까. 아니면 여비로 지급했어야 될 자금을 고종이 중간에서 가로챈 것일 수도 있다. 고종의 삶의 형태로 봐서는 배달 사고일 가능성이 가장 높다.

 

*1907년쯤에는 대한제국의 재정 관련 업무가 대부분 통감부로 넘어간 상태였다. 재정권을 빼앗긴 고종은 일본에 대한 복수심에서 헤이그에 밀사를 파견하고 그와 함께 국내 유림세력을 부추겨(고종이 의병에 자금을 지원했다고 교과서에 서술되어 있는 내용) 의병을 일으키게 한다. 고종은 재위 기간 중 왕권에 제한을 가하거나 조금이라도 침해하는 조짐이 보이면 상대가 누구든 숙청했다. 헤이그 밀사와 의병을 부추긴 행위는 자신의 권한 중 가장 중요한 재정권을 박탈한 일본에 대한 복수였던 것이다. 위 고마쓰와 콜브란의 대화는 자금줄이 막힌 고종이 밀사의 자금을 어떻게 마련했나를 확인하는 과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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