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마귀와 비둘기의 교훈(021.2011.1.30) 8:6-12

작성자김영윤|작성시간11.03.22|조회수1,016 목록 댓글 0

까마귀와 비둘기의 교훈(021.2011.1.30)   

8:6-12

 

이 시간에 ‘까마귀와 비둘기의 교훈’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본문의 배경은 홍수가 그치고 물이 감하여 노아의 방주가 아라랏산에 머물고 물이 더 감하여 산들의 봉우리가 보이기 시작한 후 사십 일을 지나서 노아가 방주의 창을 열고 지상의 형편을 살피는 내용입니다. 이 일을 수행함에 두 종류의 짐승이 쓰였습니다. 그 짐승은 바로 까마귀와 비둘기입니다. 처음에 까마귀를 내보내 임무를 감당하게 하더니 그만 두자 대타로 비둘기가 투입되어 사명을 이어가게 함을 봅니다. 이 말씀은 우리의 영적 생활에 귀한 교훈을 줍니다. 우리 영적세계에도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세상에 속한 사람과 영에 속한 사람입니다.

오늘은 노아가 그 창을 통해서 무엇을 밖으로 내 보냈습니까? 그것은 ‘까마귀와 비둘기’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지난 시간에 창에 대해서 생각했기 때문에 이왕 생각한 김에 이 두 짐승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을 생각하도록 하겠습니다. 이미 우리가 본문을 읽어 보아서 아는 대로 이제 홍수가 그친 후 약220일정도 되었는데 그때 방주 안에 있던 노아가 이제 밖이 어떻게 됐었나? 비가 그쳤나? 안그쳤나? 물이 좀 말랐나? 안 말랐나? 나가도 되나? 안 되나? 를 살피기 위해 먼저 해야 할 일이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계속 방주 안에만 있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노아가 먼저 까마귀를 그리고 나중에 비둘기를 내 보내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까마귀와 비둘기’ 는 신령한 의미에서 신자. 즉 일꾼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방주 밖으로 내 보냈다’ 하는 것은 무엇하러 내보냈겠습니까?

그것은 ‘밖의 사정을 알아보라고’내 보낸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바로 사명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또는 그 일꾼이 맡은 직분, 또는 일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일꾼은 저 나름대로 각각 맡은 사명이 다 있다는 말인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먼저 까마귀를 나중에 비둘기 이렇게 두 마리를 방주 밖으로 내보냈다’ 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고 있습니까? 그것은 신자. 즉 일꾼에는 두 종류의 신자와 일꾼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즉 까마귀 같은 신자와 비둘기 같은 신자를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까마귀와 같은 일꾼과 비둘기 같은 일꾼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럼 어떤 신자, 어떤 일꾼이 되어야 하는지를 까마귀와 비둘기가 한 일에 대해서 생각해 보면서 알아보겠습니다.

 

1.까마귀와 비둘기입니다.

까마귀는 방주에서 나가자 마다 안돌아 온 반면, 비둘기는 자기가 안전하게 지낼 수 있는 보금자리가 마련된 후에야 방주를 떠났습니다. 창8:7‘까마귀를 내놓으매 까마귀가 물이 땅에서 마르기까지 날아 왕래 하였더라’하였습니다. 여기서 ‘왕래 하였더라’의 원래 뜻은‘날아갔다가 되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방주 안으로 돌아 온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고, 방주 주변을 배회하면서 쉴 곳을 찾아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것’을 말합니다.

자! 그러면 여기 까마귀가 그렇게 쉴 곳이 없으면 비둘기처럼 방주로 일단 되돌아 왔다가 나중에 쉴 곳이 있으면 그때 떠나지 왜 나가자마자 돌아오지 않고 방주 주위를 배회하며 맴돌았을까요? 아마 여러분들도 다 아십니다만 이 까마귀는 원래 그 식성이 풀이나 곡식보다는 고기를 좋아하고 고기 가운데서도 특히 썩은 고기 덩어리를 좋아합니다. 그런데 그런 까마귀가 이때까지 방주 안에서 지내면서 고기를 먹어봐야 얼마나 먹었겠읍니까? 그러다 지금 막상 방주밖에 나와 보니 온 천지가 다 고기 덩어리인 것입니다. 방주로 돌아갈 생각이 나겠습니까? 주인이 그립겠습니까? 두고 온 이쁜이가 생각나겠습니까? 사명이고 오명이고 기억나겠습니까? 까마귀가 방주에서 나가자마자 왜 안돌아 왔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썩은 양식에 눈이 어두어, 그거 먹느라 정신이 팔려서 그런 것입니다.

까마귀와 같은 사람입니다. 7절에 까마귀를 내어놓았다고 했습니다. 본문의 까마귀가 일하는 모습을 통해서 까마귀의 속성을 봅니다. 참고로 욥38:41에 ‘까마귀 새끼가 하나님을 향하여 부르짖으며 먹을 것이 없어서 오락가락’한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까마귀는 배가 고프면 소리를 크게 내고 오락가락 날아다닌다는 말씀입니다. 본문 해석에 도움을 줄 귀한 말씀입니다. 아라비아 신화에도 까마귀는 날씨를 예측하는 새로 기록되어 있듯 날씨에 관한 한 까마귀가 비둘기보다 더 영특한 지혜가 있다고 합니다. 예를 들면 까마귀 울음소리가 보통 때보다 시끄럽게 울면 폭풍우가 다가온다든지 까마귀가 배가 고플 때라고 합니다.

본문에도 보니까 까마귀가 지면에 거할 곳을 찾지 못하고 방주 위로 날아다니는 장면입니다. 이 모습은 지면의 상태가 거할 곳도 없지만 먹을 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귀소본능이 없는 까마귀를 왜 먼저 놓아주었을까요? 노아가 그렇게 한 것은 까마귀가 귀소본능은 없지만먹을 것만 있으면 질퍽이는 땅도 아랑곳하지 않는 까마귀가 다시 돌아올 정도라면 밖의 상태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까마귀가 돌아오되 방주 안 노아의 품으로 돌아온 것은 아니었습니다. 7절을 보면 ‘까마귀가 물이 땅에서 마르기까지 날아 왕래하였더라’고 했습니다. 여기 ‘왕래하였더라’의 원문 뜻은 ‘날아갔다가 되돌아오는 것’을 의미하는데 그러나 방주 안으로 들어온 것이 아니고 방주 주변을 배회하면서 쉴 곳을 찾아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사람을 세상에 속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까마귀는 물이 찬 세상을 방황하는 새입니다. 7절‘까마귀를 내 놓으매 까마귀가 물이 땅에서 마르기까지 날아 왕래하였더라’아직도 땅에 물이 있었지만 까마귀는 돌아오지 않고 물 위에서 방황하였습니다. 까마귀는 분명히 방주로 돌아오지 않아 죽었을 것입니다. 물이 찬 땅에 먹을 것이 있습니까? 발붙일 땅이 있습니까? 까마귀는 그런데도 안 돌아왔습니다.

캐나다 맥길 대학의 팀이 연구 발표한 바에 의하면 가장 머리 좋은 새가 까마귀와 어치라고 합니다. 앵무새는 예상외에 가장 멍청한 새라고 합니다. 가장 머리 좋은 새와 가장 머리 나쁜 새의 차이는 별 것 아닌 것 같습니다. 머리가 좋다는 까마귀가 방주에서 나가서 방주로 다시 돌아오지 않습니다. 자기 머리로 살려고 하는 사람이 그렇습니다. 머리가 좋은 사람이 구원의 방주로 돌아오지 않고 방황합니다. 이런 사람들을 보면 아주 잘 사는 것 같지만 죽은 것입니다. 머리가 좋은 사람, 건강한 사람, 얼굴이 예쁜 사람, 지나치게 배경이 좋은 사람, 이런 사람이 세상에 빠지기 쉽습니다.

하나님의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세상으로 돌아가려고 하는 인간의 죄성은 예나 지금이나 계속되고 있습니다. 애굽은 세상의 상징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미 애굽을 떠났지만 다시 돌아가려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런 자들은 결국 멸망당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를 믿지만 세상의 즐거움을 버리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토마스 머턴은 ‘우리 마음은 까마귀와도 같습니다. 까마귀는 쇠붙이가 둥지에 얼마나 불편하든 관계없이 번쩍거리기만 하면 무엇이나 다 주워옵니다’눈에 보기 좋은 것을 가집니다. 귀에 듣기 좋은 것만을 듣습니다. 피부에 즐거움을 주는 것은 무엇이든 가리지 않고 취합니다. 이런 사람이 세상에 빠져 사는 까마귀와 같은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비둘기는 나가자마자 이내 돌아왔습니다. 먹을 양식이 산더미같이 쌓여 있는데 왜 돌아옵니까? 그 시체 위에서 잠을 자도 될텐데 말입니다. 비둘기는 더러운 것을 싫어하는 정결한 짐승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바로 진정한 성도는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도 아니하며, 오만한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한다는 말인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세상 것만 추구하고 썩은 양식에 눈이 어두운 까마귀와 같은 그런 삶을 살지 아니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요새 우리 주위에 보면 까마귀와 같은 삶을 사는 사람들이 참 많지 않습니까? 자기의 사명이 무엇인지는 관심이 없습니다. 교회가면 가고, 말면 말고, 그저 땅만 바라보고, 땅을 위해서 사는 사람들, 이 얼마나 우리 주위에 많습니까?

비둘기는 물이 찬 세상에서 방주로 돌아오는 새입니다. 9절‘온 지면에 물이 있으므로 비둘기가 발붙일 곳을 찾지 못하고 방주로 돌아와 그에게로 오는지라’아직도 방주 밖에는 물이 있습니다. 발붙일 곳이 없습니다. 방주 밖이 불안정하면 얼른 돌아와야 합니다. 돌아올 줄 아는 것은 지혜입니다. 아닌 곳을 가다가 돌아올 줄 아는 것은 지혜입니다. 바른 곳이야 돌아서지 말아야지만 세상으로 향하던 걸음을 돌려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휴가는 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오는 것이 중요합니다. 돌아올 줄 알아야 합니다. 선교나 봉사도 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돌아오는 것이 중요합니다. 아프가니스탄에 억류되어 있는 우리 청년들이 속히 돌아오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두가 세상에 인질 당하지 말아야 합니다. 돌아올 줄 알아야 합니다.

2.까마귀는 배은망덕했습니다.

 

까마귀는 원래 야성이 강한 동물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믿는다고 하나 까마귀와 같은 신자가 있음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면서도 하나님의 품에 안기지 못하고 아직도 세상을 추구하며 방황하는 심령들이 그들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교회를 출석하는 것 같지만 하나님께 한 발 세상에 한 발 그렇게 살아갑니다. 이런 사람은 세상에서도 만족을 찾지 못하고 하나님의 은혜도 아직 체험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이것을 일컬어 성경은 육신에 속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고전3:3에 ‘너희가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했습니다. 성도라고 불리운 고린도 교인들에게 한 말씀입니다.

방주에서 구원을 받은 까마귀이니 완전히 불신자라고 할 수는 없지요. 그러니까 까마귀 신자는 세상을 더 추구하는 아직 영적 어린이 같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고전3:1에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고 했습니다. 까마귀가 방주 주변에 날아다닌 이유는 무엇일까요? 지면에 발 붙일 곳이 없어서입니다. 이처럼 까마귀 신자는 상황이 좋아지면 언제든지 세상에 나갈 사람입니다. 까마귀는 어느 기간 왕래라도 했지만 그 까마귀는 지면 상황이 좋아지자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물이 걷힌 곳은 아직 질퍽하긴 하지만 어느새 연한 새 풀이 돋아나 먹을 것이 생겨났기 때문입니다.

자 여러분! 여기 까마귀가 방주를 위해서 한 것이 무엇입니까? 아무것도 없습니다. 덕만 보았지 덕을 끼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은혜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은혜에 대해 보답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집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런 귀한 직분주시고 사명 주신 것은 우리가 잘나서가 아닙니다. 똑똑해서도 아닙니다. 돈이 많아서도 아닙니다. 위대해서도 아닙니다. 이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그리고 나중에 주님 오실때 칭찬받고 상 받으라고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 주신 선물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일꾼이 해야 할일이 무엇이라 봅니까? 잘하든 못하든 일단은 이런 은혜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그리고 하나님을 위해서 살고, 하나님의 사업을 위해서, 교회를 위해서 일해야 될 줄 믿습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일꾼의 기본자세인 것입니다. 그런데 은혜를 갚기는 커녕 잊어버린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우리가 잘 아는 가룟유다를 보십시오. 또한 데마는 어떻습니까?(딤후4:10) 열명의 문등병자는 어떠했습니까? 그래서 다윗은 스스로 말했습니다. ‘내 영혼아 여호와 은택을 잊지 말찌어다’라고 한 것입니다. 우리 또한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말고 감사의 생활을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난도 은혜입니다. 고통을 주지 않으면 그 영혼이 멸망의 길로 나가기 때문입니다. 우리들도 육체를 가진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런 성향이 충분히 존재합니다. 그러므로 바울처럼 늘 육체를 쳐서 복종시켜야 합니다. 만사형통하고 부하고 고난이 없어 봐요. 환경이 좋아지면 믿음이 나빠집니다. 평안하면 교회출석 범하기 시작합니다. 기도시간도 줄어지고 사명보다 다른 일이 더 급합니다. 세상사는 재미에 빠져 그렇게 돌아가는 것입니다. 목숨 바쳐 신앙생활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까마귀 신자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이런 까마귀 신자 한 사람도 없기를 바랍니다.

 

3.까마귀는 자기 사명을 잊어버렸습니다.

신령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봅니다. 비둘기 같은 성도입니다. 까마귀는 좋아서 열심히 먹이를 먹었지만 지면은 아직 비둘기가 살기에는 적당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9절에 ‘온 지면에 물이 있으므로 비둘기가 접족할 곳을 찾지 못하고 방주로 돌아왔다’고 말씀합니다. 지면이 질퍽거려 비둘기가 거할 수 없었습니다. 아직 방주를 떠날 때가 되지 않은 것입니다. 이처럼 신령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은혜를 앞세웁니다.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며 준비합니다. 초조하거나 성급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9절 후 반절을 보면 ‘방주로 돌아와 그에게로 오는지라 그가 손을 내밀어 방주 속 자기에게로 받아들였다’ 했습니다. 비둘기의 귀소본능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이것이 까마귀와 다른 점입니다. 까마귀는 나갔다가 방주 주변만 날아다닐 뿐 돌아오지 않았지만 비둘기는 방주 노아의 품에 정확히 돌아왔습니다.

비둘기의 귀소본능이 놀랍다고 합니다. 상자에 담아 수백 km를 운반하여 풀어놓아도 어떻게 아는지 정확히 그 풀어준 지점으로 돌아옵니다. 12절 보면 그런 비둘기도 나중에 돌아오지 않았는데 그것은 귀소본능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저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라고 봅니다. 이 비둘기가 주는 교훈이 있습니다. 비둘기는 까마귀와는 달리 정확한 귀소본능이 있다는 것입니다. 신령한 그리스도인이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영적 본능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육신의 감정이 아니라 영적인 감동과 이끌리심을 받습니다. 성령을 따라 행할 때 육신의 열매를 맺지 않게 됩니다. 이처럼 우리가 신앙 생활하는 것은 어쩔 수 없어서가 아니라 내 중심 속에 성령의 감동이 있어 신앙 생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이끌림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성령의충만한 삶이 되어야 합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회개하고 아버지의 품 안에 돌아오는 것을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사60:8에 ‘저 구름같이, 비둘기가 그 보금자리로 날아오는 것같이 날아오는 자들이 누구뇨’까마귀 같이 날아온다고 하지 않고 비둘기 같이 날아온다고 했습니다. 성령의 은혜로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성령의 은혜로 온전히 죄악을 떠나 교회의 품, 하나님의 품에 돌아오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까마귀의 사명이 무엇입니까? 노아가 까마귀에게 부여한 사명이 무엇입니까? 노아가 까마귀를 내어보낸 데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 까마귀를 통해서 물이 감한 상태 및 땅의 건조 상황들을 알기를 원했습니다. 하지만 까마귀는 자기가 해야 할 그 막중한 사명을 다하지 못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썩은 양식에 눈이 멀어서 그런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보면 비둘기는 어땠습니까? 방주 밖으로 나갈 때마다 주인 노아에게 필요한 정보를 제공해 주므로 자기의 맡은 사명을 100%로 완수했습니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 각각 그 나름대로 사명을 다 주셨습니다. 여기에는 좋고 나쁨이 없습니다. 귀하고 천함이 없습니다. 높고 낮음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 사명을 얼마나 충성스럽게 감당하고 있습니까? 딤후 4:10‘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고’하였습니다. 우리 또한 세상을 사랑하여 세상 것을 위해 추구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것이 우리의 모습은 아닌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계2:10‘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하였습니다. 즉 오직 주님께 충성하는 자는 놀라운 상급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귀한 상급을 받기에 부족함이 없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4. 까마귀는 목자의 기대를 저버리고 낙심시켰습니다.

한번 여쭈어 보십시다. 여러분! 노아가 그 많고 많은 새 중에서 특별히 맨 먼저 까마귀를 선택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 나름대로의 이유와 기대가 있어서 그랬습니다. 아까도 이미 까마귀의 식성에 대해서 말씀했습니다만, 한 걸음 더 나아가 까마귀는 체질이 강합니다. 아라비아 신화에서는 까마귀가 날씨를 예측하는 새로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까마귀는 비둘기보다 더 지혜가 있다고 합니다. 따라서 이제 노아의 식구가 방주에 들어간 지 271일이 지났습니다. 아라랏산에 도착한지 115일 되었습니다. 그러기에 노아는 밖의 사정도 알고 싶었을 것이고, 빨리 밖으로 나가고 싶었을 것입니다. 새로운 삶을 빨리 시작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무작정 자기가 나갈 수는 없는 입장이었던 것입니다.

 

이때 여러분 같으면 어떠하겠습니까? 당연히 노아처럼 까마귀를 내보낼 것입니다. 그러기에 지금 까마귀는 노아의 큰 기대를 한 몸에 안고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까마귀는 그런 노아의 기대를 완전히 저버리고 말았습니다. 오히려 노아의 가슴에 상처만 안겨 주고 말았습니다. 노아가 얼마나 섭섭했겠습니까? 그래서 노아가 어떻게 했습니까? 비둘기를 대타로 내 보냈습니다. 그런데 대타로 내 보낸 비둘기가 주전 선수보다 더 충실히 그 임무를 완수하므로 노아의 기대에 부응했습니다. 이것을 야구에서는 뭐라 합니까? 그것은 ‘대타 작전성공’ 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목사도 목회를 하다보면 더 아끼고 사랑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서도 특별히 기대를 거는 사람이 있습니다. 교사들도 마찬가집니다. 많은 학생들을 가르칩니다만 그 가운데 특별히 마음이 가고 기대를 거는 학생이 있습니다. 키우고 싶은 학생이 있습니다. 내 뒤를 잇게 하고 싶은 학생이 있습니다. 예수님도 그런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누구였습니까? 바로 12제자들이었습니다. 목사도 마찬가집니다. 키우고 싶은 사람이 있습니다. 마음이 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기대를 거는 사람이 있습니다. 교회를 위해서 무엇인가 해주기를 바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좀 열심히 해주고, 알아서 해주고, 목사의 마음을 백분 이해하고, 그래서 목사의 말에 순종해 주기를 바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목사만 그렇습니까? 우리 주님은 더 하십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 한사람 한사람에게 엄청난 기대를 걸고 계십니다. 우리 교회에 대해서도 얼마나 큰 기대를 걸고 계시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다면 주님께서 얼마나 섭섭하게 생각하실까요? 뿐만 아닙니다. 우리가 주님의 그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다면 주님이 어떻게 하실 것이라 여깁니까? 나 대신 대타를 쓰시는 것입니다. 내 입장에서 볼 땐 얼마나 불행한 일입니까? 주전자리 빼앗기는 것 아닙니까? 그것은 상급이 날아가고 면류관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냥 넘어갈 일입니까? 오늘 이 자리에 나오신 여러분들은 우리를 향한 주님의 기대 꼭 성취시켜 드릴 수 있기를 원합니다.

 

5.까마귀는 다른 것은 외면한채 자기 유익만 따집니다.

까마귀는 방주 안에 있는 모든 사람과 짐승의 유익은 외면한 채 그저 자기 유익만을 생각했습니다. 사실 아닌게 아니라 그때 방주 안에 있는 노아와 식구들 그리고 짐승들이 까마귀가 오기를 얼마나 기다렸겠습니까? 그리고 그렇게 해서 나중에 같이 나가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까마귀는 그런 모든 사람과 짐승들의 유익을 외면하고 말았습니다. 그저 자기만 잘 먹고, 잘 입고, 잘 살고, 그저 자기뿐이었습니다. 그러나 비둘기는 어땠습니까? ‘살아도 같이 살고 죽어도 같이 죽자’ 했던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회개하고 아버지의 품 안에 돌아오는 것을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사60:8에 ‘저 구름같이, 비둘기가 그 보금자리로 날아오는 것같이 날아오는 자들이 누구뇨’까마귀 같이 날아온다고 하지 않고 비둘기 같이 날아온다고 했습니다. 성령의 은혜로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성령의 은혜로 온전히 죄악을 떠나 교회의 품, 하나님의 품에 돌아오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11절에 다시 돌아온 비둘기 부리에 감람나무의 새 잎사귀가 있었습니다. 감람나무는 올리브기름을 내어 성령의 상징입니다. 비둘기 자체도 성령의 상징입니다. 예수님께서 세례 받으실 때 성령이 비둘기처럼 임하였습니다. 감람의 어린 잎은 비둘기의 먹이가 됩니다. 이처럼 항상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생명의 성령이 임하시면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됩니다. 육으로 살면 죽을 것이요 성령으로 살면 영원히 삽니다. 심는 대로 거둡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위해 심어야 합니다. 육을 위해 심는 자는 육으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해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둡니다.

까마귀가 검다고 속까지 검을 쏘냐 말들 하지만 인생 까마귀는 속까지 검습니다. 아직 영적으로 까마귀라면 겉도 속도 하얀 비둘기가 되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비둘기 같은 성도를 기뻐하십니다. 아2:14에 ‘바위 틈 낭떠러지 은밀한 곳에 있는 나의 비둘기야 나로 네 얼굴을 보게 하라 네 소리를 듣게 하라 네 소리는 부드럽고 네 얼굴은 아름답구나’하셨습니다. 이처럼 비둘기와 같은 성도가 되면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십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입니까? 까마귀입니까? 비둘기입니까? 하나님을 섬긴다 하면서도 하나님의 품안에 온전히 안기지 않고 세상을 아울러 사랑한다면 까마귀 신자입니다. 진실로 하나님의 품 안에 안겨 행복하게 살기를 원한다면 세상 떠나 하나님을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모두 성령의 은혜로 충만하여 더욱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명 감당하는 귀한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교회에는 까마귀 같은 신자와 비둘기 같은 신자 즉 까마귀와 같은 일꾼과 비둘기 같은 일꾼이 있습니다. 바라기는 우리 모두 비둘기 같은 신자와 일꾼들이 꼭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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