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태안신문 칼럼

악의 뿌리는 무사유.......(칼럼)

작성자남제현|작성시간26.06.15|조회수24 목록 댓글 0

악의 뿌리는 무사유

태안장로교회 원로목사

회복지사

글:-남제현목사

태안신문사 칼럼니스트

 

“악의 뿌리는 무사유”이란 것이다. 이것은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이라는 개념을 한마디로 표현한 그는 서구의 전통적 정치 개념에 근본적인 반성을 제기하고 새로운 사유의 길을 열었다. 1961년 4월11일, 예루살렘의 한 법정에서 나치 독일의 전범자 재판이 열렸다. 홀로코스트 유대인 대학살를 주도한 핵심 인물 중 한 명인 ‘아돌프 아이히만’은 600만 명의 유대인들을 죽음의 수용소로 강제 이송하는 일을 맡은 최고 책임자였다. 그런 악행을 저지른 인물은 분명 극악한 ‘정신이상자’라고 예상했지만, 아이히만은 지극히 평범했다.

 

오히려 친절하고 성실했으며, 가정에 충실한 가장이었다. 그는 악마의 모습을 하고 있지 않았다. 아이히만은 판사에게 이렇게 항변했다. “나는 잘못이 없습니다. 나는 내 손으로 누구 한 사람 죽인 적이 없습니다. 그저 상부의 지시에 따라 내 일에 최선을 다했을 뿐입니다.” 그는 자신의 가족을 가스실에 보내라는 명령을 받았다고 해도 그렇게 했을 것이라며 무죄를 주장했다.. 당시 한나 아렌트는 이 재판을 참관하고 이렇게 평했다. “아이히만이 자신의 업무를 성실하게 수행한 것은 죄가 될 수 없다. 그러나 그가 유죄인 이유는 사유하지 않음에 있다.”라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자기 검토 없는 삶은 살 가치가 없다고 했다. 자기 검토란 ‘자신과 대화하는 능력’이다. 그 때문에 생각 없이 명령에 순응하고 결과에 대해 무관심하고 방관하는 보통의 사람이 큰 악행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아이히만의 무사유는 죄가 되었고 마침내 교수형에 쳐해졌다. 개인의 사유를 멈추게 하는 조직이 있다. 전체주의나 독재 치하처럼 제도적으로 억압적 권력이 작용하거나, 군대처럼 엄격한 상명하복을 강조하는 곳에서 개인이 조직에 반하는 생각과 행동을 할 수 없다.

 

그리고 조직의 총체적 지배는 인간의 자발성을 파괴한다. 또한, 중간 단계의 권위와 권한이 상실되면 더는 창의성과 책임감을 요구할 수 없다. 구성원들이 판단하지 못하고 상부의 결정만을 기다리는 비효율적 조직이 되고 만다. 우리 사회에 더는 비밀경찰도 없고 강제수용소도 없다. 그러나 우리 자신을 잉여적 존재로 만드는 조직문화가 있다. 이러한 조직문화를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사유해야 한다. 우리가 반복되는 조직의 관습에 익숙해지고, 상투적 용어들이 그 의미를 잃어버릴 때가 바로 ‘무사유’의 징후다.

 

올바른 판단을 위해서는 내가 속한 집단과의 사적인 이해관계를 초월해야 한다. 공익을 위해 정의에 동참하는 재주력을 갖춰야 한다. 사회적 연대를 나타내는 팩트 결합된 용어로, 사회적 연대 경영에 충격경영은 동반자 관계 설정, 각종 기부 등을 통해 중소기업과 저소득층과 함께 공존하는 경영을 추구한다. “나는 협력업체에 갑질을 하는 기업에 취업하고 싶지 않다” 사회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조직들은 사회에 초점을 맞춰 사용하기도 한다. 많은 영역과 주체를 아우르는 정의를 도출하기 위해 글로벌 기관들은 ‘현재와 미래’와 ‘긍정과 부정’의 관점을 더해 정의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것이 눈꺼풀이라 한다. 실제로 신체에서 가장 무거운 것은 아무래도 머리가 아닌가? 단순히 무게뿐 아니란 생각과 기억, 감정 같은 것들이 다 머리 근처에 몰려 그렇게 느껴지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인간의 얼굴이 왜 신체 맨 꼭대기에 있는지 가끔 의아하다. 그 어떤 부위보다 무겁고 중요한 것인데, 왜 가장 위태롭고 개방된 위치에 달려 있는 것일까. 조금만 부딪혀도 다치기 쉽고, 조금만 신경 쓰여도 티가 나는데 말이다.

 

신을 속인 죄로 산 밑의 거대한 바위를 산 위로 밀어 올리는 벌을 받은 시시포스. 겨우 산꼭대기에 올려놓으면 바위는 어김없이 굴러떨어지고, 그는 또다시 산 아래로 내려가 처음부터 밀어 올려야만 한다. 절대 끝나지 않는 노동, 성공이 허락되지 않은 노력. 그래서 그의 이야기는 ‘헛된 수고’의 상징처럼 자주 언급되곤 한다. 실로 마음의 상태를 관장하거나 보좌하는 것이 몸이라면, 그중에서도 마음과 가장 자주 연동되는 것이 얼굴이라면, 바닥에 자꾸 떨어지는 마음과 얼굴을 꼭대기까지 밀어 올리는 것이 현대인이 받는 벌인 걸까?

 

하루를 버티고, 표정을 추슬러 다시 세상 앞에 내놓는 일이 우리에게 주어진 일종의 형벌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아침마다 무거운 얼굴을 들어 올려 거울 앞에 서는 것 같다. 마치 시시포스가 바위를 다시 밀어 올리듯, 내려앉은 표정과 가라앉은 마음을 다시 위로 떠밀어 올리는 것이다. 그렇게 하루를 시작하고, 지친 저녁엔 또다시 얼굴이 바닥으로 떨어진다. 생각한다. 어쩌면 현대인의 하루란 바위처럼 무거운 얼굴을 산꼭대기까지 조금씩 옮겨놓는 일의 반복일지도 모른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