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 19:11]
예수께서 가라사대 사람마다 이 말을 받지 못하고 오직 타고난 자라야 할찌니라....."
사람마다 이 말을...타고 난 자라야 - 예수의 답변 중의 '이 말'은 제자들의 극단적인 견해인 '장가들지 않는 것이 좋삽나이다'를 가리키는 말이다. 한편 '받다'의 뜻인 헬라어 동사 '코레인'은 그릇이 일정량의 빗물을 받듯이 '어떤 것을 위한 공간의 자리에 담겨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단순히 지적인 이해의 범위를 넘어서
그와 상응하는 도덕적 의지가 뒤따르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말을 받는다고 하는 표현은 말 그대로를 전의지적으로 따른다고 하는 의미가 담겨져 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아무나 결혼을 하지 않는 독신 내지 금욕생활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타고난 자라야 할 수 있다고 하셨다.
그런데 이 '타고난 자'란 결혼 문제에 있어서 인간적인 고집이나 선택에 의해 자제하는 것이 아니라 위로 부터 부름받고 은혜를 입어 믿음으로 응답함으로써 결혼을 자발적으로 포기한자를 가리킨다.
이런 관점에서 공동번역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사람'으로 번역하고있다. 예수께서는 12절에 새 유형의 고자를 예시함으로써 이 말의 의미를 더욱 확실히 소개해 주셨다.
[마 19:12]
어미의 태로부터 된 고자도 있고 사람이 만든 고자도 있고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된 고자도 있도다 이 말을 받을만한 자는 받을찌어다..."
어미의 태로부터 된 고자 - 선천적인 성불구자나 성욕이 완전히 핍절한 자를 가리킨다. 여기서 '고자'란 원래 '침실을 맡은 자'란 뜻으로 고대 동양에서 왕의 침실에 수종들던 내시가 모두 거세당한 자들인 데서 유래하였다.
한편 이스라엘에서 고자는 제사장이 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여호와의 총회에 참여할 자격도 주어지지 않았다
사람이 만든 고자 - 고대 동양에서는 왕의 아내들에게 수종드는 남자들로 하여금 그들의 생식기를 거세하게 하였는데, 이는 그들에게 왕의 부인과의 성적 접촉을 금지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또 여자가 사제인 이교에서도 그들을 돕는 남자들도 역시 거세되었는데, 예를 들면 에베소에 있는 다이아나신전에서 봉직하는 자들도 그러했다.
선천적인 고자나 내시나 환관 등의 특수 계급의 고자는 모두 장가를 들수 없도록 만든 사람들로서 성욕에 대해서 자발적으로 자제하는 자들이 아니라 성욕 자체가 생겨나지 않는 수동적이고 불가피한 절제자들이다.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된 고자 - 대표적인 사람으로 동양의 오리겐을 들 수 있다. 한편 여기서 '천국을 위하여'란 '천국을 얻기 위하여'가 아니라, 천국의 요청과 천국에 대한 깊은 관심 때문에 독신 생활을 하는것을 가리킨다. 이 구절에 대해 결혼한 사람이 천국을 위하여 결혼 안한 사람같이 된다고 하는 페이의 의견은 잘못된 것이다.
사도 바울은 고전 7:32, 33에서 '장가간 자는 세상 일을 염려하여 아내를 기뻐할 일에 골몰하고 장가를 가지 않은 자는 주의 일을 염려하여 주께서 기뻐하실 일에 열심을 다하게 된다'고 하였다.
또한 알롄산드리아의 클레멘트는 말하기를 '참된 고자는 육체적인 쾌락에 빠질 수 없도록 된 사람이 아니라, 육적인 쾌락을 거부하는 사람이다'고 하였다. 한편 본문의 말씀은 결혼을 천박하게 본 것이 아니라 결혼을 훨씬 능가하는 가치, 즉 하늘 나라 봉사를 위해 결혼을 희생하는 것이 고귀함을 강조한 것일 뿐이다.
받을 만한 자는 받을지어다 - 이는 모든 인간에게 적용되는 절대적 규범이나 명령이 아니라 영적고자로 부름받은 소수의 사람들의 선택적 규범이다. 이를 가리켜 사도 바울은 받은 바 은사의 다양성에 따라 되어진 자발적인 선택의 일로 보고 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예수나 그의 제자들은 독선 생활이 결혼 생활보다
더 거룩한 것으로 보지 않았을 뿐 아니라 복음 사역에 있어서 최고의 차원으로 간주하지도 않았다. 다만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더 유용하게 쓰임받기 위하여 특별한 소명을 부여받았다고 하였다.
만약 스스로 이러한 생활이나 훈련을 자처하는 사람들은 우정에 불타는 것보다는 결혼하는 편이 낫다고 하는 바울의 권면에 귀기울여야 할 것이다.
[마 19:13]
때에 사람들이 예수의 안수하고 기도하심을 바라고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꾸짖거늘....."
때에 - 결혼과 이혼에 관계된 예수의 가르침이 있은 바로 직후라는 의미를 강하게 내포한 말이다. 결혼의 신성함을 말씀하셨던 예수께서는 이제 그 결혼 생활의 고귀한 열매를 인정하시고 축복하시고 계신다.
사람들이...버린 아이들을 데리고 오매 - 예수 당시의 사람들은 종종 자신의 어린 아이들을 랍비들과 장로들에게 데리고 가서 안수라는 관례적인 방법을 통하여 그들이 축복받게끔 하였다
그런데 원래 이 안수는 상징성이 강한 행위로서 한 집안의 가장이 아이가 태어났을 때나, 길을 떠날 때 혹은 죽음이 임박하여 자손에게 특권과 축복을 시여할 때 주로 행해졌는데, 대부분 축복의 기원이 그 내용이었다. 이 안수의 축복은 유대교에서 전례되어 초대 교회에 정착되었고 또한 오늘에까지 계속 이어지고 있다.
여하튼 이런 관점에서 사람들은 단순히 자신의 병고침과 필요만을 위해서 모여든 것이 아니라, 메시야이신 예수의 축복이 자신의 집안 대대로 이어지기를 기대하는 믿음에서 아이들을 예수께로 인도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본 기사를 기록하면서 안수받는 대상에 대해 마태가 7세 이하의 '작은 아이들'이란 용어를 사용한 것에 반해서 누가는 눅 18:15에서 신생아 또는 젖먹이 아이, 즉 유아(乳兒)를 가리키는 말인 '브레페'를 사용하였다.
이를 종합해본다면 그때 많은 사람들이 아이를 데리고 왔는데, 그 중에서 부모의 손에 이끌려 나온 아이도 있었고 품에 안거나 어머니 등에 업혀 온 아이들도 있었음을 시사한다.
이는 18:1-10의 말씀에서 당시 어린이들을 무시하고 거추장스럽게 생각하던 사람들과는 달리 예수께서는 아이들을 귀히 여긴다고 하는 사실이 사람들에게 전하여진데서 나온 행동들일 것이다.
이 문장에서는 무엇보다도 아이들을 예수께로 데리고 온 그 사람들의 믿음이 강조되어야 한다. 제자들이 꾸짖거늘 - 여기서 '꾸짖다'는 뜻의 원어 '에피티마오'는 '책망하다', '경고하다' 등의 의미로 엄히 말하는 것을 가리킨다. 그런데 이때 제자들이 꾸짖은 대상은 어린아이들이 아니라, 그들을 데리고 온 자들었다
이 때 제자들이 화를 낸 것은 어린아이들이 많이 몰려옴에 따라 예수의 권위가 손상된다거나 예루살렘으로 가던 여행이 지체될 것을 생각하고서 그러한 행동을 한 것으로 생각할 수 없다. 그 보다는 많은 병자와 사람들이 예수의 만져주심을 바라고 나왔으므로 여전히 아이들에 대해서 귀한 보배라고 하는
인식이 없었던 제사들은 무엇보다도 먼저 어른들이 예수로부터 고침을 받고 축븍받아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제자들에게 있어서 최우선은 어른이며, 그 다음이 아이들이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비록 나이가 어리고 신체적으로 미숙하며 지적인 발달이 미진한 어린이라고 할지라도 이미 하나님의 형상을 소유한 한 사람의 인격체로 여기며 그들이 당신의 백성이 되는 것을 기뻐하셨다.
[마 19:14]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린아이들을 용납하고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 천국이 이런 자의 것이니라 하시고...."
용납하고...금하지 말라 - 예수께서 아이들이 자신에게 기뻐 달려오는 일을 용납한 것은 천국이 어린아이의 것이기 때문이 아니라, 천국이 어린아이들과 같은 자들의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용납하고'란 능동태 명령형으로서 '상관치 말고 그들이 원하는 대로 내버려 두라'는 뜻의 강한 요구이다.
그리고 '금하지 말라'의 원어 '메콜뤼에테'는 강한 부정의 의미를 지닌 '메' + 현재 명령형의 형태를 취하고 있어 지금하고 있는 일을 당장 그만두라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따라서 이 말은 '그들을 제재하는 일을 당장 포기하라', '당장 허락하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한편 오스카 쿨만에 의하면 본문에서 이 말이 쓰인 것은 원시 기독교의 세례식 용어가 반영된 것이라고 하였다. 그 까닭은 이 동사가 성경의 다른 곳에서는 세례와 관련되어 사용된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쿨만은 그렇다고 해서 본문에서 예수가 유아 세례를 지시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하였다. 오히려 신약의 교회가 이 기사를 기록하여 전하는 목적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어린이 축복 사건을 기억함으로써 부모의 믿음과 관련된 유아 세례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의도가 있었다고 하였다. 천국이 이런 자의 것이니라 -
예수께서 소개하시는 당신의 나라를 들어가기 원하는 자는 그 마음과 믿음에 있어서 어린아이같이 순결하고 순수하며, 주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있어야 했다
따라서 지금 신경질적으로 어린아이들의 접근을 제어 하는 제자들은, 무엇보다 구태의연한 인습을 떨쳐버리고 예수께서 그러하셨듯이 아이들을 친절하고 온화하게 맞아들여야만 한다.
[마 19:15]
저희 위에 안수하시고 거기서 떠나시니라...."
저희 위에 안수하시고 - 예수께서는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온 부모들의 소원을 기꺼이 들어주셨다. 그런데 그 소원들 중 '기도하심을 바란' 소원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계셨다. 이에는 나름대로 특별한 의미가 내포되어 있었는데,
실로 예수는 하나님의 본체로서 스스로의 권위에 의해 축복과 필요를 채우실 수 있으셨기 때문에 기도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으셨던 것이다. 물론 예수는 기도의 모범을 보이시기도 하셨으나
본 시점에서는 당신의 절대적 권위를 보이시기 위한 교육적 목적에서 기도없는 축복을 행하셨다고 볼 수 있다. 한편 본문은 어린아이 축복과 유아 세례의 기원이 되는 구절이다. 그런데 유아 세례의 전통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에 대해서는 그 시기를 알 수 없지만 초대 교회시대 때부터 큰 반발없이 자연적으로 확산되었다.
이 유아 세례에 관해 처음 증언한 사람은 이레니우스와 오리겐및 터툴리안이었다. 그 중 아레니우스는 유아 세례와 관련하여 180년경에 '그리스도께서는 유아들과 어린이들과 소년들과 젊은이들과 노인들 등 자신을 통해 거듭난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러 오셨다'고 자신의 글에 피력한 바 있다.
또한 자신도 유아 시절에 세례받은 경험이 있는 오리겐은 분명히 그 관습의 기원을 사도 시대로 보고 있다. 그는 특히 롬 5:9을 근거로 '교회는 사도들로부터 전통을 물려받아 유아에게 세례를 준다'고 주장했으며 유아 세례는 일종의 교회의 중요한 전통이라고 말했다.
한편 성경의 증거에 의하면 새로 회개하고 구원받은자의 온 가족이 세례를 받았다고 함으로써 유아세례의 가능성을 확실히 예시하고 있다. 더욱이 앞절에 언급된 바 있는 '메 콜뤼에테'란 말이 초대 교회 당시 빌립 집사의 선교 사역 중 구스 내시의 세례 장면에 나와 있는 관계로 보아
적어도 70년경에는 유아 세례가 보편화 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한편 종교 개혁 당시 재세례파 사람들에 의해 유아세례가 거부되기도 했지만 루터와 칼빈을 위시한 많은 교회 지도자들에 의해 그 시행의 정당성을 인정받아 왔다. 특히 종교 개혁자들의 유아 세례관은 대체로 다음과 같다.
"아이들의 신앙은 성인들보다 훨씬 직관적이요, 순수하다. 따라서 그들을 유아 시기부터 교회의 일원으로 인정하는 것은 그들이 스스로 신앙고백할 때까지 거룩히 훈련시키고 죄를 씻어 하나님의 거룩한 구원의 약속에 동참케 하기 위해 마땅한 바이다".
더욱이 개혁자은 하나님의 은혜의 선재성과 유아 신앙의 특이성 등에 근거하여 유아 세례의 정당성을 주장했다.여하튼 유아 세례는 자녀에 대한 부모의 신앙적 책임을 일깨워 주는 것과 더불어 육아의 인격적 독립성및 신앙적 의속성에 의지하여 시행되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이러한 것이 무시된 채 단순히 의식으로서의 유아 세례를 집행하는 것은 크나큰 잘못이 아닐 수 없다.
실로 교회는 마치 예수께서 어린아이들을 품에 안으시고 그들을 안수, 축복해 주셨던 것처럼 큰 사랑과 부족없는 노력으로 그들의 영혼을 훈육하고 성결히 보존하는 데 힘써야 할 것이다. 거기서 떠나시니라 - 베레아 지역을 떠나 예루살렘으로의 행보를 재촉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