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 19:16]
어떤 사람이 주께 와서 가로되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본절의 문장 초두에 개역 성경에는 번역되지 않았으나 감탄사 '보라'가 첨가되어 있다. 이는 뒤이어 나오는 사건의 돌발성 및 중요성을 일깨우며 주의를 환기시키는 역할을 한다(1:20). 아마도 본 사건은 유아 축복 사건이 일어난 바로 그날 발생했을 것이다. 어떤 사람이 - 22절에 의하면 이 사람은 재물이 많은 청년이며, 막 10:17에 의하면
계명을 다 지키었음에도 불구하고 구원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에 예수에게로 달려 나와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영생을 구한 열정적인 구도자였으며, 눅 18:18에 의하면 그의 직업은 '관원'으로 알려졌다. 물론 '관원'이란 유대인들의 회당 관리를 가리킬 수도 있고 로마 정부에 의해 임명된 징부 관리를 가리킬 수도 있는 것이므로 그가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인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새번역에 의하면 그는 의회원중 한사람으로 번역하고 있다. 이 부자 청년은 젊음, 재물, 명예를 다 얻었으나 구원의 확신이 없음으로 인해서 마음의 평화를 얻지 못한 채 나날이 회색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불신 세대의 한 전형적인 인물이다. 이 부자 관원의 이야기는 공관복음서에서는 모두 어린아이를 통한 교훈 뒤에 수록되어 있는데,
이는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자와 들어갈 수 없는 자가 어떠한 자인지 분명히 깨우치기 위한 목적에서 편집되었을 것이다.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 먼저 이 청년이 예수를 '선생'으로 부른 것은 그가 예수를 율법 교사인 랍비로 보고 있음을 나타내준다. 물론 이말은 '랍비'라는 칭호를 직접 사용한 것보다는 그 존칭의 의미가 약하지만, 어쨌든 그 청년은 예수를 자신의 문제를 능히 해결해 줄 수 있는 선생으로 인정하고 있다.
한편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서는 질문자가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라고 질문을 시작하고 있고 예수께서는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고 대답하고 있다. 마태에 나오는 예수의 대답은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오직 한 분이시니라"고 하였다.
여하튼 본질적으로 선하다는 뜻을 지닌 '아가도스'가 문장 어디에 붙든지 상관없이 예수의 대답은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분이 없다고 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 청년에게 있어서 영생을 얻을 수 있는 선한 일은 바로 하나님의 존재를 정확히 인식하고 그분이 명하는 바를 따라야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청년은 믿음의 도(道)에 의해 구원에 이르게 됨을 알지 못하고, 다른 바리새인들처럼 공적에 의해 의롭게 되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지금 그가 해야할 것은 선한 일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선한 하나님을 바로 알며 그분에 의한 선한 역사인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믿고 따라야 하는 것이다.
영생을 얻으리이까 - 청년이 지닌 치명적인 과오를 일깨워 주는 말이다. 사실 '영생'이란 영존하시는 하나님의 생명에 참여하는 것으로서, 오직 하나님의 지적이고 선택적이며 개방적인 은총에 의해서만 부여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청년은 얼마나 많은, 그리고 어떠한 선행을 쌓아야지만 메시야의 나라에서 그 영생을 쟁취할 수 있는가라고 질문했던 것이다.
이 청년이 이러한 왜곡된 생각을 한 데는 그 당시 랍비들의 그릇된 구원관 교육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있다. 랍비들 가운데는 계명 중에도 영생에 이르는 계명이 있는가하면 영생에 아무런 지장이 없는 계명이 있다고 가르쳤다. 그리고 끊임없는 기도와 율법과 시편의 암송, 또는 노인들에 대한 공경 등을 통해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가르친 것이다.
그래서 이 청년은 그가 하나님에게 인정받고 메시야의 왕국에서 영생할 수 있도록 하는 고상한 행위법을 예수께 물었던 것이다. 그러나 영생을 얻는 길은 바리새인들 처럼 규율을 준수하는 데에 있는것이 아니라 어린 아이처럼 절대 선하신 하나님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순수한 영혼과 순종의 마음을 지니는 겸손한 존재가 되는 데에 있는 것이다.
[마 19:17]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 평행구를 이루는 막 10:1과 눅 18:19 및 에브라임 사본에는 본문을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차이점에 대해 몇몇 학자들은 뒤이어 나오는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와 연관지어 예수와 하나님의 존재론적 차별로 인해 예수의 신성이 부정될까 하는 염려에서 의도적으로 변경시켰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대부분의 권위있는 사본들과 라틴 벌게잇 역 등에는 예외 없이 본서의 읽기를 따르고있다. 이러한 표현상의 차이를 분석하기 전에 먼저 본 기사의 핵심 내용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즉 본 기사에는 예수가 선한 것이 무엇인지 잘 모르는 청년에게 그의 질문을 되받아 묻는 내용이 들어 있다. 실로 영생을 얻기 위해서 필요한 절대적 의미에서의 선은 오직 하나님 뿐이시다
따라서 본문에서는 예수가 하나님의 본질인 '선'을 하나님과 함께 공유하고 있는지 아닌지에 대해서는 논의되지 않는다. 더욱이 예수는 지금 선한 것이 무엇인지 결정짓는 하나님의 뜻 이외에는 다른 아무것에도 관심을 지니지 않으셨다. 이런 측면에서 본 대화를 기술한 마태의 표현은 세 공관복음에서 공통적으로 다루고 있는 중심 문제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데,
이러한 마태의 표현은 마가-누가 보다 훨씬 더 분명하게 중심 문제에 근접해 있으며, 앞의 기사들과 훨씬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즉 마태의 기록에 따르면 이 청년은 천국에 속한 자들과는 엄청날 정도로 정반대의 자리에 서 있는 것이다. 이러한 구조로 볼 때 막 :10:18이 예수의 무죄성을 묻고 있지 않듯이 본절도 역시 예수께서 선한 것을 판단할 합법성을 지니셨는지의 여부를 묻고 있지 않다.
한편 마태, 마가-누가 그 어느 기자도 다른 전승을 의존하고 있지 않으며 다만 마가의 기록이 마태보다 먼저 기록된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그렇지만 마가 우선설 때문에 만일 예수가 죄를 지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독자들의 가능성을 마태가 의도적으로 배제시켰다고 마태를 비난할수는 없다. 실로 마태는 마가복음을 의존하여 본문을 기록하기는 했지만 그 자신이 본 사건에 대한 생생한 지식을 갖고서 목격자의 입장에서 재구성 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복음서 기자들은 그들의 보고 문학 형식에서 상호 모순되지 않고 허용할 수 있는 통상적 범위 안에서 독자적인 보고를 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선한 일을 묻는 그 청년에게 하나님만이 그리고 하나님의 일만이 유일하게 선한 것임을 지적함으로써 인간은 그 누구도 하나님 앞에서 선을 행할수 없고 자신을 선하다고 말할 수도 없음을 가르치셨다.
그런데 문제는 이 말을 예수의 신성과 절대 무흠하심을 부인하는 뜻으로 이해하려는 시도들이 있다는데 있다. 그러나 분명한것은 예수께서는 '선하다'는 말을 자신과 연관시켜 사용하신 것이 아니라 그 청년의 잘못된 신앙관을 해결하기 위해 사용했다는 것이다. 즉 그 관원은 예수를 하나의 '선생', 곧 인간으로 이해하고 있었으므로 예수께서는 그 청년의 이해 수준에서,
그렇다면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도무지 선할 수가 없다고 선언하신 것이다. 실로 예수께서는 그 청년의 왜곡된 사고와 신앙관을 깨우치기 위해 '선'의 주체이시며 궁극적 원인자이신 하나님을 두드러지게 강조하셨다. 따라서 선을 행함으로써 구원을 얻으려는 이 관원의 바리새적인 구원관은 인간은 결코 스스로는 선한 존재가 될 수 없을 뿐 아니라
선을 행할 수 없다고 하는 예수의 말씀에 의해 벽에 부닥치게 되었다. 정녕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다만 믿음을 통해서 의인된 죄인만이 있을 뿐이다.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 - 여기서 '생명에 들어가려면'이란 16절의 청년의 질문과 짝을 맞추기 위한 예수의 의도적 문구로서 '영생을 얻으려 한다면'이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여하튼 본문의 말씀은 계명을 지킴으로써 영생을 얻게 된다고 하는 말이 아니라, 생명에 들어갈 자, 곧 구원받을 자는 계명을 지키는 생활을 하는 자임을 말하고 있다. 사실 신구약을 통틀어 '선한' 분이신 하나님의 계명은 이미 '그속에 생명의 약속이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계속 인정해 오고 있다
즉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요약될 수 있는 계명을 다 지킴으로써 인간은 영생의 삶을 살 수 있다. 왜냐하면 이 길은 바로 계명의 명령자이신 하나님과 그 계명의 완성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대로 따르는 것이 전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란 모세의 십계명을 맹목적이고 외형적으로 지키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즉 계명을 문자 그대로 실현하는 것이 아니라 계명의 원목적을 온전히 이해하고 그 정신대로 삶을 사는 것을 의미한다. 실로 계명의 참 순종(순종)은 생명에 들어가는 참믿음의 결과요 증거이다.
[마 19:18]
가로되 어느 계명이오니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증거하지 말라,...."
어느 계명이오니이까 - 예수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청년은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바의 게명이 이미 자신이 다 실천하고 있는 것을 가리키는 것인지, 아니면 자신이 알지 못하는 또 다른 계명인지를 예수께 묻고 있다. 관원은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율법에 수 많은 조항들을 덧붙이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따라서 그는 예수가 또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과 같이 보편적이지 않고 실행하기 매우 힘들어 그 계명을 준수한 이후에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특별한 인정을 받을 수 있는 또 다른 특수한 계명을 말씀하시는 것으로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마 19:19]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니라...."
'살인하지 말라'부터 '부모 공경'까지의 다섯 계명은 출 20:12 이하와 신 5:16이하에 나오는 십계명이다. 그런데 마태는 막 10:19의 '속여 취하지말라'는 말을 생략했는데, 이는 구약의 본문에는 그러한 명령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마태의 본문은 출 20:1-16의 히브리 본문에 일치하도록 변형되었다.
또한 마태는 레 19:18의 '이웃 사랑'을 새계명으로 덧붙이고 있는데, 바울도 롬 13:8에서 십계명의 네 계명과 더불어 '이웃 사랑'의 계명을 덧붙였으며 그 당시 랍비들도 이웃 사랑의 계명이 율법을 요약한 것이라 가르쳤다. 예수께서 이 이웃 사랑을 말씀하신 것은 특별히 청년이 가지고 있던 외적 선행에 대한 '자만'을 지적하시기 위함일 것이다.
한편 페이에 의하면 본절의 두 계명은 십계명의 두돌판의 계명들을 각각 요약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는데, 즉 부모 공경은 제 5계명까지, 이웃 사랑은 제 6-10계명까지의 요약으로 이해했던 것이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 이 계명들은 모두 인간을 향한 인간의 의무 조항들이다. 즉 인간관계와 이웃에 대한 태도들을 규정하는 계명들인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제 1-5게명보다 5-10계명을 더 강조하신 이유는 (1) 당시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5-10계명들을 전적으로 무시하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강조하면서도 계명의 핵심인 의와 인과 신은 행치 않았다. 따라서 당시의 율법주의에 빠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자세를 비판하신 것이다. 이들에 의해 교육을 받은 이 청년도 이러한 오류에 빠져 있었다.
(2) 영생이란 영원한 삶을 의미하는 말이다. 그러나 '영원' 영원히 계속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합당한 것 또는 하나님의 속성에 어울리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영생이란 하나님의 속성에 어울리는 상태이며 이는 율법의 여러 조항들을 모두 낱낱이 준수하는 삶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죽기까지 자신의 모든 것을 다른 사람을 위해 내어 주는 하나님의 본체이신 그리스도의 삶을 따르는 것을 의미한다.
[마 19:20]
그 청년이 가로되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오니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오니 - 막 10:20에 의하면 '어려서부터'라는 말이 붙어있다. 따라서 인간적인 측면에서 그의 종교적 행습은 칭찬할 만하다. 그런데 율법을 다 지켰다고 하는 청년의 이 대답을 통해서 그의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을 동시에 찾아볼 수있다.
(1) 긍정적인 측면 : 세상의 열락에 빠질 만한 여러 조건들을 다 갖추고서도 그는 어려서부터 그러한 것들에 몰두하지 않은 건전하고도 경건한 삶을 살아왔다. 실로 그가 완벽한 율법 준수자라고 자처한 것도 과장이나 위선에서가 아니라 열정에서 실토한 순수한 자기 주장이었다. 마가의 보고(막 10:21,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는 이를 잘 됫받침해 주고 있다.
그러나 사람은 범죄를 저지르지 않고도 하나님의 은혜와 영광에 이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사실 청년이 예수께 찾아와 '영생에 이르는 길'을 물은 것은 바로 그가 지닌 내면적 공허함을 해결하고 외형적 율법 준수로는 얻을 수 없는 마음의 평화를 얻기 위해서였다. 그는 지금 '영적으로 철저히 고갈한 상태'였던 것이다.
(2) 부정적인 측면 : 율법과 계명들에 대한 진정한 이해가 부족했다. 그의 사고 방식은 당시의 유대 바리새인들의 율법관과 동일한 것이었다. 그는 많은 율법과 계명과 규례들을 일일이 다 지키었으나, 그것들이 의미하는 바의 진정한 정신은 잘 알지 못하였다. 즉 그는 율법의 의로는 전혀 부족함 없는 존재였다
따라서 그는 율법의 자구 하나하나에 얽매임으로써 아무런 의심없이 하나님 앞에서까지 '자기 의'를 주장했던 것이다. 실로 그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율법의 문자적 해석이나 실행, 자기 성취욕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명의 영적 깊이와 넓이를 이해하는 일이었다.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 -
막 10:21에 의하면 계명을 다 지키었다고 장담하는 그에게 예수께서 한 가지의 부족한 점을 지적하고 계셨다. 바울도 그 자신이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본문에서의 그는 자신이 계명을 다지키었음에도 불구하고 무엇인가가 부족하다고 하는 사실을 잘 깨닫고 있었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그는 유대 랍비들을 떠나 예수에게로 나아온 것이다.
그는 자신이 구원받을 만큼 충분히 선한 일을 했다고 확신하지 못했으며 그뿐만 아니라 그는 확실히 선한일이란 율법에 명시된 계명 이상의 것으로 생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이 바로 그가 받은 율법 교육의 잘못으로 인한 결과이다.
율법교육은 끝없이 외형적인 선과 의를 쌓으면 그것이 자신의 공적이 되고, 영생한 삶으로의 조건이 되는 것으로 생각하게 하였다. 그러나 그는 많은 계명을 지키고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으나 구원의 확신은 없었고 여전히 영혼의 불안과 궁핍을 느끼고 있었다
[마 19:21]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온전하고자 할찐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온전하고자 할진대 - 여기서 '온전하다'는 뜻의 헬라어 '텔레이오스'는 도덕적으로 완전하다거나 무죄한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인생의 궁극적인 목표인 신적인 완전에 도달한다는 의미이다. 또한 이는 인간의 자의지에 따른 결과로서의 완전이 아니라 처절하게 자신의 무능과 부족을 통감하고 온전케 하시는 하나님께 자신을 의탁함으로써 이뤄질 수 있는 완전이다
(5:48;빌 3:12). 한편 본문에서의 이 말은 좀더 특수하게, 그 청년이 목표로 삼고 있는 영생에 이르는데 조금도 핍절함 없는 완벽한 상태, 즉 절대적인 자기 부인(self-denial)과 철저한 순종 및 완전한 자기 의뢰를 이루는 것을 말한다.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 예수의 온전케 하는 계명은 겉으로는 구약의 율법에서 벗어난 것 같이 보인다
왜냐하면 구약의 어떠한 구절에서도 본문의 이 명령을 규정하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사람이 재물과 하나님을 함께 온전히 섬길 수 없음을 잘 알고 계셨다 더구나 사람은 본성적으로 탐욕스런 존재이기 때문에 재물이 많을수록 하나님보다 재물을 더 의지하게 됨으로써 차차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땅에의 욕심이 많으면 하늘에로의 관심이 적어지게됨을 아시고 그 부유한 청년이 그의 재물을 다 나누어 줌으로써 진정한 영생의 삶을 누릴 수있는 방법을 알게 하시고자 하셨다. 그러나 지금까지 이 청년은 율법에 나타난 모든 외적인 계명들을 다 준수하려고 했지만 율법에 대한 형식적인 순종의 차원에 머무르고 말았다.
즉 그는 자신의 소유를 가난한 자들에게 다 나누어주는 적극적이고 전적인 자기 포기를 수반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가 지금까지 소극적이고도 수동적으로 행한 수 백 가지의 율법 준수는 전혀 무가치한 것이 되고 말았다. 한편 소유를 다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라는 명령은 다가오고 있는 천국에 관한 임박한 종말의식을 갖고 있지 않는 사람에게는 도저히 실천 불가능한 것이다.
새하늘과 새땅(계 21:1)이 다가옴을 깨닫지 못하고 그곳에서의 참 보화를 소망하지 못하는 한 소유물들을 더욱더 굳게 움켜 잡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예수의 말씀의 요지는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는 것이 아니라, '와서 나를 좇으라'하는 데에 있다. '가서, 팔아, 나누어 주라'(휘파게 폴레손 카이도스)는 천국과 영생의 실체이신 예수를 좆는 제 1 전제 조건이었고,
온전함을 얻기 위한 단 한가지의 필요한 일이었다. 이와 같이 예수의 절대적 명령에 따라 '가서', '팔아', '나누어줄' 때 동시적으로 그에게 내적 변화가 수반될 것인데, 그 내적 변화는 바로 그가 지금까지 율법을 순종하면서도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을 온몸과 뜻과 정성으로 행하지 않았음을 깨닫고 겸손히 회개하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 13:44-46에서 예수께서는 천국을 '밭에 감추인 보화'나 '극히 값진 진주'로 비유하셨다. 이는 결국 본문의 '하늘에서 보화'란 이 부자 청년이 찾아헤매는 바의 영생의 삶을 의미한다. 그의 마음이 지상의 재물에서 해방되는 그 순간부터 그는 구원을 얻게 되리라고 하는 의미로, 예수께서 그 즉석에서 영생의 삶을 보장하시는 말씀이다. 실로 자기 보물이 있는 그곳에 자기 마음과 소망(所望)과 미래가 있는 것이다(6:19-21).
와서 나를 좇으라 - 가서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라는 예수의 명령은 궁극적으로 예수를 따르는 제자직(discipleship)과 연결되고 있다(Lane). 즉 하나님의 뜻, 계명에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것은(17-19절) 바로 참 생명의 주인이시요 인간을 온전케 하시는 예수를 따르는 상호 협력적인 위치에 서는 것이다.
결국 그에게 있어서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은 바로 율법의 형식적인 행함에 의해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것, 즉 자아(自我)의 전적인 포기를 수반한 복음에의 참여를 통해서만 가능해 진다. 우리는 이것을 가리켜 '은총을 통한 승리'라고 규정지을 수 있다. 본문에서 볼 수있는 바대로 예수께서는 수시로 사람들을 그의 제자로 부르셨으며 다음과 같은 제자의 길을 제시하셨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따르라고 말이다. 이 말씀처럼 구원의 기쁨을 얻고 예수의 사람이 되려는 자는 자기의 것을 다 내어 버림으로써 자기 자신을 부인하고 그리스도를 따라야 한다. 즉 세속적인 기대와 세상적인 인연에서 해방되어 오직 예수께 자신의 전부 부, 희망, 삶 등를 맡기고, 그분과 더불어 죽고 더불어 사는 일체적삶을 각오해야 하는 것이다. 이는 제자가 될 수 있는 또 하나의 크고도 힘든 장벽이자 조건이 되는 조항이다.
[마 19:22]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
재물이 많으므로 - 헬라어 원문의 뉘앙스로는 그는 현재에도 재물이 풍부할 뿐아니라 그 풍요가 지속적으로 유지될 것을 암시하고 있다. 이로 보건대 그 청년은 자신의 재물로 인한 풍요한 미래를 설계하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따라서 그 청년에게 있어서 재물은 단순한 소유 이상의 가치로서, 그의 미래와 희망과 운명이 걸려 있는 절대적 가치였다.
이처럼 영원한 세계라는 관점에서 볼 때 상대적 가치에 불과한 것들을 절대화(絶對化)하는 것은 영생과 천국을 가로막는 가장 큰 걸림돌이다. 근심하며 가니라 - '조심하다'는 뜻의 헬라어 동스 '뤼페오'는 '마음이 상할 정도로 슬퍼하다', '고통스러워 하다' 등의 뜻으로, 막 10:22에 의하면 심각한 내적 갈등으로 인해 '슬픈 기색을 띤 것'을 의미한다.
한편 16:3에서 이 동사는 궂은 날씨에 대해 사용되기도 하였는데, 이와 연관하여 '못 마땅해서 얼굴을 찡그리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그가 선택의 기로에 서있는 것은 바로 재물과 예수 사이이다. 사실 구약의 전통적 개념으로 보자면 부자는 이미 하나님의 은총을 받은 자에 속향다 그 청년은 예수의 말씀을 듣고서도
자신이 지금까지 이해해 왔던 대로 물질을 하나님의 축복으로 생각함에 따라 영생을 보장하는 방법으로써의 물질포기에 대한 예수의 제안을 거절해 버렸다. 그리하여 그는 보장된 현재 때문에 보장될 미래와 영생을 잃어버리는 불행한 선택을하고 말았다.
실로 이같은 선택을 한자에게 참된평화가 있을 수 없었기에 그는 고통 중에 '근심하며' 또다시 영원한 허무)와 갈증만 있는 형식적 율법 준수의 길로 되돌아서 가고 말았다. 정녕 참된 평화는 자기의 소욕을 극복하고 예수께 자신을 전적으로 의뢰할 때에만 주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