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 19:23]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 그리스도께서는 재물과 탐욕이 얼마나 큰장애물이 되는가 하는 것을 제자들에게 경고하셨. 막 10:23에 의하면 부자는 바로 '재물을 의지하는 모든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며, 이들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참으로 어렵다고 하였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부자나 빈자나 하나님보다 재물을 더 의지하는 자는 영생의 축복을 받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가난한 사람이라고 해서 영생에 들어가고 부자라고 해서 영생을 얻지 못한다고 하는 것은 잘못된 견해이다.
그러나 실제로 부자들일 경우에 재물이 많기 때문에 그것에 의존하는 정도가 지나칠 가능성이 많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들에게도 영생의 길이 완전히 막혀 있는 것은 아니다.
본문에서 나온 '어렵다'의 뜻인 부사 '뒤스콜로스'는 소화되기 어려운 나쁜 음식을 먹은 것처럼 힘들게 나마 부자도 천국에 들어갈 수 있음을 나타내는 말이다. 그 방법은 꼭 한가지, 즉 모아두었던 재물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 다시 말하면 자기를 부인(否認)하는 것 뿐이다.
[마 19:24]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신대..."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 부자가 영생을 얻기 어렵다고 하는 내용을 강조하기 위하여 사용된 이 비유는 극단의 상징성 때문에 학자들에 의해, 상징된 단어의 완곡한 이해가 종종 시도되었다. 그중 바클레이에 의하면 우선 바늘귀란 '작은 문'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흔히 성곽을 두르고 있는 도시에는 문이 두개가 있었는데, 그중의 큰문은 낮에 사람이나 짐수레 등이 다니는 것이며 작은 문은 밤에 사용되는 것으로서 사람이 서서는 들어갈 수 없을 정도로 작은 것으로 흔히 '바늘귀 문'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따라서 이 비유는 당시의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장 큰짐승 중의 하나로 이해하고 있는 약대가
이 작은 문으로 통과하려는 것처럼 어려운 일을 가리킨다고 해석되었다. 한편 칼빈은 약대를 가리키는 말의 헬라어가 '카멜로스'이며 배에서 사용되는 '밧줄'(rope)의 헬라어는 '카밀로스'인 점으로 미루어서 약대가 아니라 밧줄이 바늘귀에 통과하기 어렵다고 말한 것으로 해석하고있다.
그러나 바늘귀가 '바늘귀 문'이며 약대가 '밧줄'이라고 하더라도 역시 약대는 바늘 문으로 통과할 수 없으며, 밧줄은 바늘귀에 매어 쓸수 없는 것은 확실하다. 따라서 이 비유를 완곡하게 표현하려는 학자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 불가능성의 정도는 좀처럼 줄어들지 않는다.
랑게에 의하면 육중한 몸무게의 약대가 부자를 상징하고 있고, 눈으로 볼 수 있는 가장 작은 통로인 바늘 구멍이 하늘나라로 가는 영적통로를 상징하고 있다고 함으로써 문자 그대로의 의미를 찾으려 하고 있다. 적어도 본문은 이같은 문자 그대로의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예수께서 가르치시고자 하는 진의를 더욱 확실히 해 줄 것이다.
한편 이와 비슷한 격언으로 바벨론 탈무드에는(B. Berakoth 55b) '약대' 대신 '코끼리'가 사용되었는데, 그 이유는 바벧론에서는 코끼리가 흔하고, 가장 큰 동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이와 유사하게도 이슬람교의 코란경에는 '약대가 바늘 귀로 지나갈 때까지 천국 문은 악인에게 닫혀있다'라고 가르치고 있다. 아마 이는 이 복음서에서 빌어 쓴 듯하다.
여하튼 구원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은 문'인데, 더구나 교만과 자기 만족으로 살찌운 사람이 들어가기에는 더욱 더 좁은 것이다. 이 비유가 영생의 불가능성을 이야기하는 만큼 영생을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는 그 만큼 더 놀라운 것이며 감사한 것임을 깨닫게 한다.
[마 19:25]
제자들이 듣고 심히 놀라 가로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제자들이 듣고 심히 놀라 - 유대의 지혜사상(智慧思想)에 의하면 재물과 부는 하나님의 축복이요, 가난과 빈곤은 하나님의 저주를 의미한다. 그 실례로 부자였던 욥이 고난을 당하게 되자 사람들은 그가 하나님의 벌과 저주를 받았다고 믿었다 따라서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가난은 '불편함' 이전에 '부끄러움과 멸시'의 대상이었다
그러므로 예수의 부자에 대한 경고(警告)와 재물 포기와 가난으로의 권유는 제자들에게 있어서도 전혀 새로운 사상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부자 관원들 보다 못한 자신들 역시 '구운받지 못하는 상태에 이르게 될 것'이라고 하는 염려로 아연실색하였다. 여기서 본문의 '심히 놀라'란 말은 마치 '뒷통수를 얻어 맞은 듯이
어안이 벙벙했다'는 뜻으로 제자들의 지금까지의 통념을 완전히 와해시킬 정도의 충격이 가해졌음을 시사한다. 이처럼 천국과 천국의 진리는 기습적이고도 충격적으로 각 개인의 심령에 돌입한다.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 이는 제자들의 심각한 회의에 휩싸인 질문이다.
즉 만일 천국 입성이 부자에게 그렇게 불가능할 것 같으면 그 이외의 사람들은 더더욱 어렵지 않겠느냐는 투의 놀람과 불만 섞인 물음이다. 사실 (1) 유대인의 통념상 모든 부는 하나님의 축복으로 간주되었을 뿐 아니라
(2) 세상 모든 사람들은 그러한 부를 축적하기 위한 노력과 욕망을 어느 정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되는 강제법으로 간주될 수밖에 없었다.
[마 19:26]
예수께서 저희를 보시며 가라사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
저희를 보시며 - '보다'의 뜻인 헬라어 '엠브레포'는 사려깊은 눈빛으로 상대를 주시하는 것을 가리키는 말로 여기에서는 예수께서 깊은 동정심과 사랑이 충만한 눈빛으로 제자들의 불안을 완전히 씻어버릴 정도로 그들을 바라보는 모습을 가리킨다. 구원에 대한 염려로 떨고 있는 제자들의 내면의 마음을 깊이 들여다 보시는 구원자요, 참 스승이신 예수의 모습이 잘 드러나고 있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 여기서 먼저 '사람으로'라는 말은 (1) 사람의 판단으로 (2) 사람의 힘과 능력으로등의 뜻으로 사람의 모든 노력을 가리킨다. 따라서 본문은 사람의 행함, 즉 도덕적 선행과 자유 의지의 결행 등으로는 구원이 절대 불가능함을 나타내는 말이며, 이는 약대비유의 참 의의를 그대로 드러내는 말이다.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 - '구원'은 사람의 일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일임을 공언하시는 말씀이다. 따라서 구원은 사람의 선행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믿음에 의한 것임이 분명해졌다. 오직 하나님만이 인간의 재물에 대한 의존력을 과시하시고 하나님 그 자신만을 절대적으로 의존하게 하신다.
예수께서는 절망에 빠진 제자들을 격려하셔서 하나님께 대한 새로운 믿음을 갖게 하시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소망을 품게 하셨다.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하는 제자들의 부정적인 질문은 '하나님은 다 할 수 있다'고 하는 긍정적인 대답에 의해 모든 사람이 다 구원받을 가능성이 있음을 시사하는 말로 이끌어질 수 있다.
사람이 보기에는 구제받을 수 없을 정도로 큰 죄를 지은 사람도 약대를 바늘귀에 꿰실 수 있는 하나님의 강권과 그분의 능력에 의해 구원의 가능성이 제시되고 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의지적(意志的) 선택으로 인해 심지어 구원의 문에 들어가기 거의 불가능한 부자들 조차도 천국 시민이 될 수 있었다
실로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와 초월적인 경륜(經綸)에 따른 부르심을 믿음으로 수용함으로써 재물로 인한 장애요인을 제거할 수 있었으며, 순결한 영혼으로 거듭날 수 있었고, 또 자신이 가진 소유를 하나님 나라와 그분의 영광을 위해 마음껏 활용할 수 있었다.
[마 19:27]
이에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사오니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 감탄사 '보라'는 마태가 즐겨 사용하는 문구로, 인칭 대명사 '우리'와 더불어 강조 용법으로 사용되고 있다. 즉 이는 가버린 부자 청년에 비해 예수를 따르고 있는 제자들 자신을 주목해 보십사고하는 말이다. 더불어 제자들이 말한 '모든 버린것'은 바로 부자 청년이 거절한 그것을 염두에 두고 한 말로써,
사실 제자듸은 예수의 부름을 받으면서 세상적인 욕구나 생존의 터전및 자신들의 친족과 옛 생활까지 모두 갈릴리 해변에 버려두고 예수의 고난의 길을 좆아 예루살렘으로 향하였던 것이다.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 - 베드로의 이 말이 보상을 기대하는 잘못된 것으로 이해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사람의 힘으로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신 예수의 엄격한 말씀에 불안을 느낀 제자들이 영생에 대한 확증 얻고자하는 마음에서 제기된 물음이라고 하는 견해가 있다. 여기서는 후자의 견해가 더욱 타당한 것으로 본다. 만약 이 견해에 의한다면, 제자들은 자신이 소유했던 것들이 부자청년의 재물과 명예에 비해 보잘것 없는 것으로 생각하였으며,
그러나 비록 그러한 것이라도 아낌없이 버려두고 예수를 좇은 일이 과연 예수의 말씀에 적합한 것이었는가 하는 의심을 품고 초조해 하고 있는 모습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질문은 '어떤 선을 행해야 영생을 얻게 되는가'를 물은 부자 청년의 잘못된 구원관과는 달리 '행함'으로가 아니라, '버림'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하는 사실을 깨달은 제자들이 장차 누리게 될 영생에 대한 관심에서 제기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실로 버림으로써 얻는 것, 그것이 바로 구원이 지닌 신비한 역설이다.
[마 19:28]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좇는 너희도 열 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 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 이는 다음에 이어지는 자신의 발언의 진정성을 강조하는 말이다. 따라서 본문에서의 이 말은 예수가 제자들에게 하시는 그 언약의 말씀이 그대로 성취될 것이라고 하는 확신이 내포되어 있다. 즉 미래의 보상에 대한 희미한 믿음과 적은 기대를 가진 제자들에게 확신을 주심으로써,
선을 행함으로 자신의 의를 쌓아가는 바리새파나 엣세네파 사람들과는 달리, 모든 것을 버림으로써 구원을 얻으려는 새로운 공동체로서의 제자 집단만이 올바른 것임을 인식하게 하신 것이다. 세상이 새롭게 되어 - 심령이 거듭난 상태, 즉 중생을 가리킬 때 사용하는 말인 '팔링게네시아'는 만물의 재탄생 재창조를 의미하는 말로도 사용된다.
여기서의 '새롭게 됨'이라고 하는 말은 RSV에 의하면 '새 세상이 와서'의 의미로 '하나님 나라의 도래'와 관련되어 있다. 즉 사람이 거듭나야 하나님 나라에 참예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모든 만물이 완전히 '중생의 과정'을 겪음으로써 하나님 나라가 완성된다.
실로 예수의 초림으로 만물의 변화(빛이 어둠을 몰아냄)는 시작되었고 예수의 재림으로 그 변화는 완성될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사도 바울은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라고 설파하였다.
한편 세상이 완전히 새롭게 되기 위해서는 (1) 현존의 질서와 우주의 종말과 (2) 자연의 대파국)이 전제되어야 한다. 그런데 한 가지 벅찬 사실은 모든 세대가 고대하고 바라던 세상종말에 도래할 만물의 변화는 오순절 성령 강림을 통해 모든 믿는 자들이 현재적으로 향유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영광의 보좌에 앉을때에 - 이는 최후 심판의 비유의 서두를 상기시키는 말이다. 정확한 시점이 명시된 이때는 '메시야가 다시 오실 때'가 아니라 그가 '심판주로 보좌 위에 앉으실 때'를 가리킨다. 따라서 여기서의 '앉음'은 단순히 막연한 의미에서의 착석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심판의 시작을 알리는 행위가 된다.
그러므로 영광의 보좌에 인자가 앉으실 때는 메시야가 그의 통치권을 확립하시고 공의와 불의를 가르실 때를 의미한다. 한편 본문에 언급된 '영광의 보좌'란 단순히 재림의 주이신 예수께서 영광 가운데 나타내실 보좌라는 뜻이 아니라 그 보좌 자체가 영광의 원인이자 결과이며 그분의 영광을 반영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실로 사망의 권세를 깨치시고 만물을 심판하실 심판주요, 만유의 주이신 예수께서 앉으실 보좌는 그분의 영광의 중심이요, 그분의 충만한 영광의 광휘를 나타내는 핵심적 요소이다. 나를 좇는 너희도 열 두 보좌에 앉아 - '앉다'라는 말인 '카디조'는 '앉게 하다'의 의미로, '임명되다', '승진하다'의 뜻도 내포되어 있다.
예수의 심판주로서의 취임과 더불어 그의 제자 열 둘도 심판과 영광의 자리에 앉아서 예수의 보조 심판자로서의 역활을 담당하게 된다. 이스라엘 열 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 예수를 따르던 성도들이 마지막 날에 인자와함께 심판할 것이라고 하는 사상은 신약에서 많이 나타나고 있다
한편 예수의 사도와 이스라엘 족속의 '열 둘'이 일치하는 이러한 이유로 해서 예수의 사후, 가룟 유다의 자살로 공백이 된 사도의 자리는 반드시 메꾸어 져야 했다. 그러나 이 구절에서 열 두지파가 어떤 사람들을 지칭하는 지는 분명치않다. 즉 (1) 열 두 사도들이 문자 그대로 이스라엘의 열 두 족속을 심판하게 될 것인지 아니면
(2) 새 이스라엘로 상징되는 교회 전체(계 21:12-14)에 대해 심판을 행할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또 하나의 문제는 혹시 (3) 열 두 사도가 이스라엘 민족에 대해, 재판장의 역할을 담당할 메시야 공동체 전체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하는점이다(계 20:4).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문자 그대로 예수의 열 두 제자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할 때 이스라엘 민족을 심판할 것으로 이해하고 있는데,
이는 이스라엘 민족 전체가 메시야 되신 예수를 거부했기 때문일 것이다. 한편 본문의 '심판하리라'는 말은 선악을 구분하고 형벌을 선언하는 심판의 주체자가 될 것이라는 뜻이 아니다. 이러한 심판의 주권은 오직 예수 한 분만 가지고 계신다.
그런데 '심판하다'는 말이 '판결하다'는 뜻 외에 '통치하다' 또는 '감독하다'라는 의미로도 사용된다는 점에서 본문의 이 말은 12제자들이 예수의 권위를 덧입어 그분의 심판의 모든 절차를 보좌하고 대행할 것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마 19:29]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
내 이름을 위하여 - 막 10:29에 의하면 '복음을 위하여'로 또 눅 18:29에 의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로 표현된 것으로 비추어 볼 때 본문의 이름에 해당하는 원어 '오노마'는 자기 자신을 알리는 것, 즉 계시 또는 복음, 하나님 나라 등으로 대치될 수 있는 용어이다. 집이나...전토를 버린 자마다 -
여기서 예수의 권고는 열 두 제자들에게만 안정된 것이 아니라 그를 위해 헌신하는 모든 제자들에게까지 그 대상의 범위가 확장되었다. 특별히 예수께서는 당신을 증거하기 위하여 특별히 소명을 받은 사람들이 반드시 버려야 할 것을 세 가지 차원 (1) 광의적 의미의 가정 (2) 친족(자매, 부모, 자식) (3) 소유(전토) 등으로 구분하셨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선민 이스라엘의 조상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구하셨던 3중적 포기와 비교할 만하다. 실로 예수 자신도 복음 전파를 위하여 집을 떠나고 그의 모친과 동생을 떠나시었다. 정녕 이러한 떠나는 믿음은 얻는 축복으로 넉넉히 보상될 것이다. 여러 배를 받고 문자적으로 '일백 배'를 의미한다
이에 비해 바티칸 사본 등에는 본문을 '폴라플라시오나', 즉 '여러 배'로 표현하였다 이러한 차이는 본문의 의미를 손상시키지 않는다는 점에서 큰 문제점이라고 할수 없다. 여하튼 예수의 이 언약의 말씀은 문자 그대로의 일백 배 또는 여러 배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차고 넘칠 정도로 많은' 수를 먈한다.
실로 그리스도 복음을 위해 집, 부모, 형제를 버린자는 신앙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영적 가족이 되어 수많은 신앙의 형제 자매를 얻게 될 것이다. 또한 그는 비록 물질은 상실했지만 물질보다 더 영원하고 가치있는 참 평안과 사랑과 행복의 실제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얻게 될 것이다.
영생을 상속하리라 - 마가에 의하면 백 배의 축복은 이생에서 핍박과 더불어 받는 것이며 영생의 축복은 내세에서 받는 것으로 나뉘어져 있다
성도가 이세상에서 자기 희생의 대가로 받는 축복은 물질적인 차원의 풍족함이며, 내세에서 받는 축복은 영적인 차원의 풍성함, 즉 영원한 생명이 될 것이다. 한편 영생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는 의미와 동일하다는 관점에서, 그 나라를 유업으로 상속받는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분명히 인식할 사실은 영생은 가정과 재산을 버린 것 그 자체에 대한 보상도 아니고, 그리스도의 복음 전파를 위해 핍박받은 것에 대한 공로의 보상도 아니라는 사실이다. 진정 그것은 지금까지 믿음의 조상들이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에 의해서 구원된 삶을 누리고 있는 그 자리에 함께 참여하게 됨을 의미한다.
[마 19:30]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먼저 된 자로서 나중되고 - 이 구절은 부자와 천국에 대한 교훈의 결론을 나타내기위하여 사용된 유대의 격언으로, 다음 장에 나오는 '포도원 품꾼의 비유'의 서론으로 사용됨으로써 부자에 대한 이 교훈과 비유를 연결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 본문에서의 이격언은 메시야 왕의 통치하에서 벌어지고 있는 대역전이다.
그러나 먼저된 자, 나중된 자에 대한 학자들의 해석은 다음과 같이 다양하다. (1) 어떤 사람들은 마지막날에는 거지 나사로의 비유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부자는 가난하게 되고 가난한자는 부자가 된다고 한다. 그러나 성경의 주장이 그러한 윤회로서의 역전을 말하고 있지는 않다. (2) 많은 교부(敎父)들은 먼저 된 자는 유대인이며,
나중된 자는 이방인을 가리킨다고 하였다. 그러나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별이 본 장에서 그렇게 뚜렷이 드러나고 있지는 않다. (3) 어떤 학자는 서로가 먼저 된 자라고 주장하며 논쟁하는 제자들의 모습을 염두에 두고 예수가 이 말씀을 하신 것으로 이해하는데, 이 주장은 오히려 18장에서 더 잘 어울리는 말이다.
이하 두 견해가 가장 적절한 해석인듯하다. (4) 카슨에 의하면 이 격언은 이 세상에서 부유하고 권세가 있던 자들이 하나님 나라에서도 역시 더 많은 축복을 누리게 될 것이라고 하는 낡은 유대식 관념을 모두 부정하고 그 대신 하나님의 은총을 강조하기 위해서 사용되었다고 하였다.
(5) 한편 또 다른 학자는 이 격언이 사용된 막 10:31과 눅 13:24-30에 의하면 나중이라는 의미가 천국 안에서의 '나중된 자'가 아니라 '그 나라밖에 있는 자'를 가리키며, 그런 점에서 '먼저된 자'는 그 나라 안에 있는 자를 가리킨다고 하였다. 따라서 자신들은 이미 그 나라, 즉 하나님의 나라에 도달했다고 믿는 바리새인과 서기관 등의 유대 교권주의자들은
마지막 날 그나라에서 쫓기움을 당할 것이요, 세리와 창녀등 스스로 큰 죄인이라고 느끼고 자신의 죄악을 고백하고 주를 따른 자들은 스스로 하나님 나라에서 멀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그들이 그곳에 들어가게 됨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이는 결국 영적 우월 의식과 특권 의식을 철저히 경계하시고, 대신 어린아이와 같은 겸손과 온유와 순결한 영혼을 인정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천국 시민관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