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 21:1]
저희가 예루살렘에 가까이 와서 감람산 벳바게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두 제자를 보내시며......"
예루살렘에 가까이 와서 - 갈릴리와 베레아 지경에서의 전도사역을 마치신 예수께서는 유대인들의 3대 절기 중의 하나인 유월절 행사에 참석하기 위하여, 그리고 동시에 이미 구약에서 예언되었고 3차에 걸쳐 자신도 이미 예고한 바대로의 수난과 죽임을 당하기 위하여 예루살렘을 향하여 길을 떠났다.
소경의 눈을 고치신 여리고에서 예루살렘까지의 거리는 약 24Km로, 당시 성인 남자가 하룻동안에 걸어갈 수 있는 정도였으나 예수께서는 해발 약 900m의 이 군사도로를 통해 예루살렘에서 약 3Km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베다니에 도착, 하루 밤을 보내신 후에 그 다음날, 즉 일요일에 다시 감람산 남동쪽 기슭에 위치한 벱바게에 도착하셨다.
생애의 마지막 순간을 보낼 예루살렘에 가까이 옴에 따라 예수의 메시야되심은 사람들에게 더욱더 널리 전파되고 있었다. 한편 예수께서는 자신이 걸어가야 할 길이 끝내는 고난의 십자가를 향한 것임을 알고 계셨기 때문에 예루살렘으로의 길이 바로 자신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기 위한 희생과 대속의 길이라고 하는 비장한 각오를더욱 깊이 마음에 새기는 장엄한 순간 순간이 되었을 것이다.
감람산 - 해발 약 800m에 위치해 있고 네 개의 봉우리로 되어 있는 이 감람산(혹은 올리브산)은 성전이 위치하고 있는 언덕보다 약 90m 정도 그리고 시온 언덕보다 약 30m 정도 높아서 동쪽으로는 요단계곡과 사해의 웅장한 모습을, 남쪽으로는 넓은 유대 광야를, 그리고 서쪽으로는 예루살렘성의 아름다움이 한 눈에 내려다 보이는 곳으로 이스라엘 사람들의 종교생활의 주요 통행로(즉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오는)의 역할을 하였다.
특히 감람산은 슥 14:4에서 메시야 대망과 연관이 되고 있는데 '그날에 그의 발이 예루살렘 앞 곧 동편 감람산에 서실 것이요'가 그 내용이다. 그래서 24:3에서는 감람산이 세상 종말에 그리스도의 개림이 예언되는 장소로 등장하고 있다. 벳바게 - 마가와 누가의 본문에는 '벱바게와 베다니'가 함께 언급되고 있기 때문에 벱바게와 베다니가 동일한 지명일 것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 하시기 전날 밤에 이미 베다니에서 기숙(寄宿)하셨으므로 (요 12:1, 12) 이곳은 베다니와 예루살렘 사이에 있는 한 마을이 분명하다고 보는 것이 오히려 적절하다. 즉 여리고에서 예루살렘으로 이어지는 도로의 인근 마을이며, 감람산 동편에 위치했을 것으로 생각되는 이곳은,
아직 정확한 위치가 확인되지는 않았지만 오늘날의 '케프르에트 투르'가 이곳과 동일시 되고 있다. 두 제자를 보내시며 - 이 두 제자가 (1) 베드로와 요한(눅 22:8), (2) 야고보와 요한, 혹은 (3) 고침을 받고 예수를 따랐던 여리고의 두 소경, 혹은 (4) 두 제자중의 한 사람이 나귀의 임자일 것이라고 하응 추측(Zahn) 등이 있으나 어느 견해를 취하더라도본문이 의미하는 바를 손상시키지 않는다. 여하튼 중요한 것은 예수께서 제자들을 보내시어 나귀를 끌어 오게 하신 이유에 있다.
즉 두 제자를 보내신 이유는 (1) 제자들이 예수의 말씀대로 나귀를 구하러 갔을때 이미 준비된 나귀를 쉽게 구할 수 있었다고 하는 놀라운 사실을 통해서 그들은 다시 한 번 장래 일을 예견하시는 예수의 신성을 깨달을 수 있었으며 (2) 거리상으로는 예루살렘까지 약 3Km가 넘지 않기 때문에 보통의 경우에는 항상 걸어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셨던
예수께서 이번에는 나귀를 타고 들어가시려고 한다는 사실을 유의시킴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슥 9:9의 예언을 기억하고 그들의 선생인 예수께서 바로 예언된 메시야이심을 더욱 더 확실히 깨닫게 하려는 것이며 (3) 지금까지 자신이 메시야이심을 숨겨왔던 자세와는 달리 이제 그 사실을 예루살렘의 사람들에게 공개하심으로써,
이미 3차에 걸쳐 예고한 바대로 예수께서 사람들의 손에 넘기워져 죽임을 당한 후에 사흘만에 부활하게 될 인류구속의 사역이 임박해 왔음을 깨닫게 하고자 하는 의도가 내포되어 있었다.
[마 21:2]
이르시되 너희 맞은편 마을로 가라 곧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내게로 끌고 오너라....."
나귀와 나귀 새끼 - 두 마리를 언급하고 있는 마태의 본문은 70인역을 참조한 것이다. 그러나 히브리 본문에서의 슥 9:9는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로 표현되고 있고, 마가와 누가에서도 '아직 아무 사람도 타보지 않은 나귀 새끼'라고 하여 한 마리의 나귀만을 언급하고 있다.
모든 복음서 기자는 예수가 나귀 새끼를 탄 것을 증거하고 있으므로 마태의 본문에서의 어미 나귀는 아직 아무도 탄 사람이 없는 그 나귀 새끼가 순순히 따라오게 하기 위한 용도로서 언급되었을 것이다. 한편 나귀와 나귀 새끼에 대한 마태의 표현에 관해서 다음과 같은 견해를 취하는 학자들이 있다.
(1) 나귀는 오랫동안 율법의 멍에를 메고 온 유대 백성들을 그리고 나귀 새끼는 이러한 멍에를 메지않고 복음으로 말미암아 새롭게 된 이방인을 상징한다. (2) 나귀는 예수이전의 모세를 통한 신정정치를, 나귀 새끼는 예수 이후의 그리스도의 신성에 의해 형성된 어린 교회를 상징한다. 또한 예수께서 나귀를 탔다고 하는 사실은 다음과 같은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
나귀는 1차적으로는 예수께서 자신이 구약에서 이미 예언되었고 이스라엘 사람들이 오랫동안 대망해온 메시야이심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슥 9:9의 메시야 예언을 완성시키기 위한 도구로써 사용된 동물이다. 또한 2차적인 의미로서의 나귀는 초라한 짐승이어서 예후가 왕으로 선포되었을 때 그의 친구들이 행한 일이외에
이것을 탄 유대왕이 별로 없었던 점과, 세속적인 통치자들은 본래 전쟁과 승리의 상징인 말을 타고 입성한다고 하는 점과 비교해서 '평화'와 '겸손'을 상징하는 동물이라고 하는 점이다. 이와 더불어 마가와 누가가 기록한 바대로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것이라는 점에서 그분의 순결한 품격을 암시하고 있다.
따라서 그러한 속성의 나귀를 타신 메시야는 바로 순결한 평강과 겸손과 섬김의 왕이며 이는 예수가 참 메시야이심을 증거하는 것이다.
[마 21:3]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 하시니...."
주가 쓰시겠다 하라 - 본문의 경우처럼 예수께서 자신을 가리켜 '주'라고 칭하신 것은 성경에 단 한번 나오는 말로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은 견해들이 있다. (1) 마가와 누가에도 나타나고 있는 이번 경우의 '주'는 '소유주'를 의미할수도 있다. 그러나 눅 19:33에 의하면 '어찌하여 푸느냐'고 묻는 사람들이 그 임자들이라고 나와 있기 때문에 예수가 그 나귀의 소유주가 아니라고 하는 사실은 분명하다.
(2) 여기서의 '주'(主)는 '주 여호와'를 암시하는 말로 나귀가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 필요하다고 하는 것을 소유주에게 인식시키기 위한 것이라고 하는 주장이다. 이와 함께 가장 친한 짐승이라고 할지라도 주 여호와를 섬기는 일에 필요한 경우가 있음을 보여 준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가장 자연스러온 해석은 (3) '주'라는 말이 나귀의 소유주나
여호와 하나님으로서의 주 예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메시야로서의 자기 자신을 가리키는 말로, 자신의 신적 속성을 많은 사람들에게 드러내시기 위한 자기 계시의 하나로서 이해하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점점 더 명백히 자신을 계시하기 시작한 그의 후기의 사역기간의 특징과도 잘 부합된다(
예수는 수난의 일주간을 앞두고 자신이 온 인류의 구속주이자 왕이며 따라서 모든 만물의 주인으로서 모든 피조물이 그의 권위에 순복(順服)해야함을 알리기 위한 의도로써, 자신을 '주'로 부르시고 '주가 쓰시겠다'고 말하게 하셨다. 즉시 보내리라 - 예수께서 이미 나귀를 예약해 놓으셨기 때문에 '주가 쓰시겠다'고 하는 말에 따라 나귀를 즉시 보냈다고 하는 추측은 지나친 것이다.
그러나 이 사건이 '벱바게와 베다니'에서 일어난 일이라고 한다면 이미 베다니에는 예수의 추종자들과 친구가 있었을 뿐더러 그 나귀의 주인도 역시 예수의 숨은 제자로 예수께서 나귀를 쓰시려는 용도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즉시 보냈다고 하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즉시 보내리라'는 말씀은 공생애의 후반기를 보내는 예수께서 자신의 메시야성과 신성을 유감없이 드러내어 사람들로 하여금 그가 참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그리스도이심을 알게 하려는 또 하나의 자기 계시(自己啓示)의 표현으로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마 21:4]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선지자로 이루려 하심이라 - 마태가 예수의 사건이 구약성경의 본문의 성취임을 강조하기 위하여 종종 사용한 문구이다. 여기서도 마태는 이러한 주석을 통하여 예수께서 나귀를 타시고 입성하는 일이 바로 예수 자신의 판단과 의지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는 것임을 나타내고자 하였다. 즉 예수는 예언을 성취하기 위한 의도를 가지고 행동한 것이 아니라 그의 행동이 바로 그 예언을 성취시킨 일이 되었다고 하는 말이다.몇몇 사본에는 '선지자'라는 말 다음에 '스가랴'나 '이사야'가 덧붙어 있다.
[마 21:5]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
제자들이 명하신 대로 하여 - 이 구절은 제자들의 전체적인 순종을 보여주는 부분으로서 평행구절인 막 11:4-6에서는 이 내용을 보다 상세하게 다루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