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 21:6]
제자들이 가서 예수의 명하신대로 하여....."
제자들이 명하신 대로 하여 - 이 구절은 제자들의 전체적인 순종을 보여주는 부분으로서 평행구절인 막 11:4-6에서는 이 내용을 보다 상세하게 다루고 있다.
[마 21:7]
나귀와 나귀 새끼를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으매 예수께서 그 위에 타시니......"
예수께서 그 위에 타시니 - 본문에서의 문제는 지시대명사 '그'에 해당하는 헬라어 원어가 '아우톤'이라고 하는 복수로 되어있기 때문에 과연 그 지시대명사가 무엇을 가리키는가 하는 점이다.
이에 대해 학자들은 '아우톤'이 (1) 나귀의 복수, 즉 나귀와 나귀새끼)를 가리킨다고 하는 견해와 (2) 나귀 위에 쌓아 놓은 겉옷들을 가리킨다고 하는 견해로 양분되어 있다.
전자를 지지하는 스트라우스는 예수께서 두 마리의 나귀를 함께 타셨다고 주장하며 프릿체 플렉, 알포드 등은 예수께서 두 마리의 짐승을 번갈아 타셨다고 주장한다. 후자를 지지하는 학자, 메이어, 카스탈, 베자, 플루머 등이 있는데, 대부분이 두번째 견해가 설득력 있는 것으로 인정하고 있다.
[마 21:8]
무리의 대부분은 그 겉옷을 길에 펴며 다른 이는 나무 가지를 베어 길에 펴고...."
무리의 대부분 - 정관사가 붙은 절대 최상급 명사로 직역하면 '아주 많은 무리들'의 의미이다. 모두 '매우 큰 무리'의 뜻으로 번역하고 있다. 9절에 의하면 예수의 앞에서 가고 또 뒤에서 따라가고 있는데, 요 12:12,13에 보면 예루살렘으로부터 무리가 예수를 맞으러 나왔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갈릴리에서부터 예수를 따라 예루살렘 순례의 길을 나선 무리들과 예루살렘 주민들로 구분될 수 있는 두 무리들이 모여 환호의 물결을 이루었으며 또한 이들은 메시야를 대망하는 열정이 가장 고조된 상태에서 예수를 맞이하였을 것이다.
겉옷을 길에 펴며 - 7절에서 제자들이 겉옷을 나귀 등에 얹은 것은 안장을 대신하기 위함이었다고 하는 사실에서 '심히 부끄러운 가난의 표징'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제자들의 이 행위, 즉 겉옷을 나귀에 얹어 놓는 것은 나귀를 탈 사람에게 대한 엄청난 경의와 순종의 태도를 보이는 것으로 이해하는 사람도 있다.
한편 8절에서 무리들이 겉옷을 길에 편 것은 예수를 왕으로 영접한다고 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사람들이 길 위에 겉옷을 편 이와같은 사례는 왕하 9:13에서 예후를 왕으로 선포할 때의 경우가 있었다. 여하튼 예루살렘에서 유월절을 보내기 위하여 순례의 길을 떠나온 종교적인 열망이 가득찬
이 무리들은 나귀를 타고 입성하시는 예수를 그들이 고대하던 메시야, 곧 로마의 압제에서 해방시켜줄 정치적 메시야로 잘못 인식함으로써 예수를 평화의 왕이 아니라 정권을 잡을 통치자로서 환영하였던 것이다. 나무가지를 베어 길에 펴고 - 나뭇가지를 베어 길에 편 이와 같은 선례는 B.C. 165년에 성전을 재봉헌하고 시몬 마카베오가 입성하던 때에도 있었다
어떤 사람은 이 나뭇가지가 이스라엘 사람들이 초막절에 야외에 초막을 짓기 위해서 준비한 것이라고 하기도 하며, 또 어떤 사람은 이 나뭇가지가 초막절기에 사람들이 가지고 다니던 축제용의 작은 가지, 즉 '룰랍'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초막을 만들기 위한 나무는 달개지붕을 받쳐줄 수 있을 정도로 튼튼하고 큰 가지들이며
나귀 앞에 깔아논 가지들은 길가에 심어놓은 종려나무의 잔가지에 해당한다. 여기에서 '베다'의 뜻인'에코프톤' 과 '펴다'의 뜻인 '에스트론뉘온'은 모두 미완료형태의 동사로, 이 동사가 나타내고 있는 동작이 단 한 번에 끝나버린 과거의 행위가 아니라 계속해서 지속되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즉 예루살렘에 가까이 옴에 따라 예수를 옹위하는 무리들의 감정도 점차 고조되어 나귀가 나뭇가지를 밟고 지나가는 것에 따라 사람들은 계속해서 다른나무에서 가지들을 꺾고 그것들을 자꾸 길에 깔아놓는다고 하는 반복적 행위를 나타낸다. 승리를 상징하는 종려 나뭇가지를 길에 펴거나 손에 들고 흔드는 것도 왕을 영접하는 고대의식중의 하나였다.
한편 가지를 흔든 이날을 기념하여 초대 기독교도들은 이날을 '종려주일'이라고 불렀다.
[마 21:9]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 질러 가로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소리 질러 가로되 - 무리의 환호 소리는 시 118:25,26에서 인용된 말이다. 시 118편은 대찬양시, 즉 시 113-118편의 일부로서, 장막절, 수전절, 유월절 때 사용되었다. 또한 무리들의 이 환호 소리는 예수 탄생시 천군 천사들이 불렀던 찬양과도 흡사하다 한편 이들이 찬양하지 않았다고 한다면 '길가에 있는 돌들이 오히려 소리질러'
인류 대속을 위해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는 예수를 찬양하였을 것이다. 호산나는 '우리를 구원하소서'라는 뜻의 히브리어 '호시아 나'를 음역한 것으로 본래 구원에 대한 간절한 간구로 사용되었다 . 차차 이 말은 '간구', `기원'을 포함하여 기쁨, 환호등의 의미가 함축된 일종의 구호가 되어 찬양의 송영이나
기쁨의 환호로 이해되게 되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들에게 있어서 기쁜날에 해당하는 장막절의 일곱째 날을 '호산나의 날'이라고 부른다. 다윗의 자손이여 - 마태에 의해 삽입된 호칭으로 그의 유대독자들을 의식하여 사용한 표현이다. 여기 '다윗의 자손'이란 말은 어떤 사람도 결코 부정할수 없는
확고한 메시야에 대한 표현으로서 단순히 왕의 후손, 즉 왕족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구약에서 예언되고 이스라엘 사람들이 오랫동안 대망해 온 메시야가 바로 예수라고 하는 사실을 강조하는 말이다. 따라서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라는 말은 '메시야 만세'의 뜻으로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이 말을 예수에게 대해서 사용한 것에 대해 심한 반발을 보이고 있다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 3절의 `주'가 예수 자신을 가리키는 것과는 달리 여기서의 주는 '여호와 하나님'을 의미한다. 그리고 '오시는 이'라는 말은 메시야를 가리키는 말이다. 본래 이 시 118:26은 예루살렘을 찾아오는 순례자들이 서로를 향해서 하는 인사말이었거나 혹은 순례자들이 예루살렘 성전이 보일 무렵부터 기쁜 마음으로 부른 노래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