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 10:13]
그 집이 이에 합당하면 너희 빈 평안이 거기 임할 것이요 만일 합당치 아니하면 그 평안이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니라....."
그 집이 - 이는 가정이나 가족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12절의 집과 같은 대상이다. 따라서 이 집은 복음 전도자가 머물러 유하기에 적절한 가정을 뜻하며 이 집의 가장은 구원의 메시지를 받을 준비가 된 자이어야 한다.
합당하면 - 이는 그 집이 복음 전파자들을 주님의 제자로 기꺼이 받아들임을 가리킨다. 거기 임할 것이요 - 제자들은 평안의 인사나 기도 또는 가르침 등을 통해 그 집에 행복과 번영 그리고 화평이 임하도록 노력해야 했다. 그리고 복음의 축복이 그들에게 부여되기를 기원하였다.
그후 그들이 복음을 받아들이고 가르침에 순종할 때면 제자들이 한 평화의 기도는 그들에게 실제적으로 임하게 되는 것이다. 실로 순종과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받아들이는 유일한 관건(關鍵)인 것이다.
합당치 아니하면 - 이 말은 제자들이 머물러 유할 집이 복음을 기꺼워하지 않거나 또는 제자들이나 복음에 대해 호의를 보이지 않는다는 뜻이다.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니라 - 다윗은 원수들이 병들었을 때 그들을 위해 기도한 바 있는데 이때 그의 기도가 그들에게 이루어지지 않고 다시 자기의 품으로 돌아왔다고 노래하였다
제자들이 만나는 이에게 평안을 빌고 복음을 전할 때 만약 그들이 그 평안과 복음을 받아들이면 그들은 그 평안과 복음을 통해 유익을 얻을 것이고 만약 그렇지 않을 경우 그것이 복을 빈 사람에게로 되돌아 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예수의 제자들이 빈 평안과 축복은 결코 사라지지 않고 누구에게인가 전달되는 것이다. 이러한 믿음은 족장 시대로부터 전해진 것으로, 이미 말하여진 선한 축복은 그 자체가 하나의 역동적인 생명체로 존재하여 결코 사장될수 없고
그 성취의 순간까지 지속적이며 생명력 넘치는 활동을 하게 되는 것으로 믿어져왔다. 따라서 누구든 타인의 행복과 평안을 기원하는데 주저하거나 아까워해서는 안 된다. 실로 타인의 평안을 원하지 않는 자는 주의 제자되기에 적합치 않은 자이다.
[눅 10:6]
만일 평안을 받을 사람이 거기 있으면 너희 빈 평안이 그에게 머물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평안을 받을 사람 - 헬라어 '휘오스 에이레네스' 즉 '평안의 아들'은 히브리식 용법으로 '부활의 아들', '빛의 아들', '지옥의 아들', '멸망의 아들'등과 같은 유형의 표현이다. 이러한 표현은 어떤 사람의 성품과 그가 하나님께 대하여 가지고 있는 태도에 따라서 겪게될 응분의 운명을 말해주는 관용적인 표현이다. '
평안의 아들'은 '평화에 합당한 사람', '평화를 이룩할 수 있는 사람'의 의미로 볼 수 있으며 결국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을 가리킨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제자들의 인사가 단순한 기원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축복의 선물로 주어지게 된다.
이 말씀의 배경에는 말이 지니는 힘에 대한 히브리식 믿음이 깃들어 있는 바, 구약에서 족장들의 축복은 취소할 수 없는 유산으로 여겨졌었다. 그러나 제자들의 축복은 수용자의 태도 여하에 따라 머물기도 하고 되돌아 오기도 한다는 점에서 개인의 책임성이 큰 부분을 차지한다.
[갈 6:10]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찌니라......"
그러므로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라 운'은 앞에 기술된 사실들을 결론적으로 다시 반복하여 강조하고자 할때 자주 사용되며 구약을 인용하고 나서 부연 설명을 시작할 때 사용되기도 한다. 본절에서는 전자의 경우에 해당한다. 기회 있는대로 - 혹자는 '있는'의 헬라어 '에코멘'을 가정법적인 의미로 이해하여 '기회가 있으면'으로 번역한다
그러나 바울은 일반적으로 가정법 문장을 사용할때 언졔나 '안'을 썼다. 본절에서는 '안'을 사용하지 않았으므로 '에코멘'을 '기회가 있는 동안', 또는 '기회 있는 대로' 등의 뜻으로 번역하는 것이 타당하다. 본문은 한 개인의 생애 가운데 제한되어 있는 기회의 제한성을 나타낸다.
착한 일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가돈'은 9절의 '칼론'대신에 쓰여졌다. '칼론'이 '윤리적인 아름다움'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단어라면, 본절의 '아가돈'은 철저하게 '이웃과의 관계'속에서 이해되는 단어이다. 한편 6절에서는 '아가돈'이 아니라 복수 형태인 '아가도이스''좋은 것들'가 사용되었으나 본절에서는 단수로 사용되었다.
비록 단수로 쓰이긴 했어도 '아가돈'은 선한 모든 것을 하나로 묶는 집합적 의미로 해석되어야 한다. 이렇게 할 때 '아가돈'은 모든사람을 대상으로 베푸는 자비와 동정심을 가리킨다. 6절에서의 '아가도이스'는 영적인것과 물질적인 모든 것을 함께 나누는 것에 역점을 두고 있다면 본절의 '아가돈'은 일방적으로 베푸는 선행에 역점을 두고 있다.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 - '더욱'에 해당하는 헬라어 '말리스타'는 '무엇보다도', '최고로', '특히'등의 뜻을 가진 '말라'의 최상급이다. 바울이 이처럼 믿는 자들에게 특별히 잘해주라고 권면하는 것은 갈라디아 교인들속에 있는 거짓 교사들과 유대주의자들을 염두에두고 있음을 시사한다.
한편 '가정들'로 번역된 헬라어 '오이케이우스'는 신약에서 바울 서신에만 나타난다 바울이 이 단어를 사용하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가 된 무리들은 신앙 공동체의 불가분리적인 관계를 지니고 있음을 강조하고자 함이다. 이처럼 바울이 성도들을 하나의 대가족 단위로 파악한것은 성도들을 '이웃'보다 긴밀한 '형제'로 보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