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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에 나타난 빛 - 창세기 1:3-5의 주석 신학 해석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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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최고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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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조에 나타난 빛 - 창세기 1:3-5의 주석 신학 해석학 왕 대일 / 감리교신학대학교 구약학 교수 (Ph. D.) @ 1) 본 논문은 한민족세계학술대회(발표자 왕대일, 조덕영)에서 발표된 왕대일 교수의 논문으로 왕 교수님의 허락 아래 본 홈피에 게재합니다. 허락해주신 존경하는 왕교수님께 감사드립니다. 2) 홈피 업로드 관계로 각주와 히브리 원어는 생략하여 게재합니다. kict 창조에 나타난 빛은 무엇이었을까? 창세기의 창조신앙은 "태초에"(in illo tempore) 이루신 하나님의 세상 창조가 빛의 창조와 함께 시작되었다고 알린다. 창세기의 창조 이야기에는 인간의 자기 이해가 있고 세계를 성찰하는 과학이 있다. 그 빛은 과연 어떤 것이었을까? 창조의 첫째 날 지어진 "빛"이란 무엇이며, 그 빛이 이른바 "빅뱅이론"으로 정리되는 "현대판 창조신화"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는 어떤 의미를 주고 있을까? 이 글은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추구한다. 그것을 위해서 창세기 1:3-5의 주석, 신학, 해석학을 살핀다. 1. 빛이 있으라 하니 빛이 있었고 빛은 하나님의 창조사역 가운데 최초로 창조된 실체다. 창세기의 첫 번째 창조 이야기(1:1-2:3)에서 창세기 1: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곧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베레쉬트 바라 엘로힘 에트 하샴마임 베에트 하아레츠)는 선언은 전체 창조 이야기의 서론이다. 이 서언에 이어 "하늘과 땅"의 창조에 관한 이야기(창 1:2-2:3)가 구체적으로 선포되고 있다. 이 창조 이야기에서 창세기 1:2 이하가 전하는 하나님의 창조사역은 위에서 아래로, 하늘에서 땅으로 이동하는 한 쌍의 여정(첫째-셋째 날, 넷째-여섯째 날)을 밟는다(3-5, 6-8, 9-13절과 14-19, 20-23, 24-31절). 이 여정의 대단원이 창조의 완성에 해당되는 하나님의 안식이다(창 2:1-3). 빛은 바로 이 여정에서 맨 처음 등장하는 하나님의 작품이다. 빛이 창조되기 전 우주는, 세상은, 땅은 한 마디로 카오스(chaos)였다. 창세기 1:2가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베하아레츠 하예타 토후 봐보후 베호쉐크 알-프네이 테홈)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셨다(베루아흐 엘로힘 메락헤페트 알-프네이 함마임)"고 말하고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창세기 1:3,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봐요메르 엘로힘 예히 오르 봐예히-오르)부터 시작되는 하나님의 창조는 창조 이전의 혼돈(chaos)을 창조세계의 코스모스(cosmos)로 바꾸는 일이다. 여명이 밝아오면 긴 어두움이 일순간 사라지듯 "빛이 있으라" 하는 하나님의 명령은 땅의 혼돈을 일순간 사라지게 한다. 창조 역사의 들머리에 등장하는 빛의 창조는 창조 이야기의 무대에 이런 서광을 비쳐준다. 창세기 1:2에 따르면 카오스의 정체는 둘이다. 하나는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였다"는 묘사에 내포되어 있는 실체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신이 깊음 위에 운행하고 있었다"는 지적이 드러내는 실체다. 이 때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였다"는 구절(2a 전반절)은 "흑암이 깊음 위에 있었다"는 병행구(2a 후반절)로 더 자세히 풀이된다. 이것은 하나님의 창조 이전 우주에는 혼돈(토후)과 공허(보후)로 묘사된 땅, 다시 말해 흑암(호쉐크)으로 표현되는 땅과 깊음(테홈)으로 일컬어지는 물이 있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바로 이런 흑암의 혼돈에, 아니 혼돈의 흑암에 하나님은 빛을 있게 하시면서 창조사역을 시작하셨다는 것이다. 빛은 하나님이 "있으라!" 하는 명령으로 생겨났다. 창세기 1:3은 "빛이 있으라 하니 빛이 있었다"고 전한다. 빛은 피조물이다. 빛은 저절로 생겨나지 않았다. 하나님은 창조사역의 첫 장을 빛을 있게 하는 사건으로 여셨다. 창세기 1:1-2:3의 창조 이야기에서 세상이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수작업"으로 지어졌다는 것을 일깨워주는 단어는 여럿이다. 가령 "나누다"(바달의 히필), "모으다"(카바의 니팔), "내다"(다솨의 히필), "만들다"(아싸) 와 같은 동사들이다. 이 때 빛의 창조와 관련해서 사용되는 말은 "있으라"(예히)이다. "있으라"라고 하는 말은 "존재하다"(하야)의 명령형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지시형(jussive)이다. 시킴 글이다. 3인칭을 명령의 대상으로 삼는다. 원래 명령형은 2인칭인 '너'에게 주어진다. 하지만 히브리어 동사의 지시형은 '너'가 아닌 '그/그것'을 명령의 대상으로 삼는다. 영어 번역이 "Let there be light, and there was light!"로 본문을 읽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런 원문의 형식을 살리려고 노력한 결과다. 창조의 전 과정에서 창세기 1:3의 "빛이 있으라"는 하나님의 명령은 다른 모든 창조사역을 선도하는 위치에 있다. 하나님이 맨 먼저 "빛이 있으라"라고 명령하신 뒤에야, 그래서 하나님의 명령대로 빛이 생겨 난 뒤에야, 하나님은 이런 저런 물체와 물질 등을 나누고 모으고 만드는 창조의 제 과정을 뒤따라 전개하신다. 이런 까닭에 창세기 1:3에서 창조되는 빛은 해와 달과 별 등의 창조에 앞서 나오는 "원시의 빛"(primordial light)이다. 창세기 1장의 창조 이야기는 시편 104편이 소개하는 창조의 파노라마와 견줄 수 있다. 창세기 1장이 창조세계를 하나님의 관점에서 소개할 때 시편 104편은 사람의 눈으로 본 세상, 즉 땅에 두 발을 딛고 서 있는 사람의 눈에 비친 세상을 소개한다. 시편 104편은 태초에 하나님이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는 창세기의 선언을 개인적인 찬양으로 바꾸어서 전한다. 서문(시 104:1)에 이어 등장하는 찬양의 서두는 빛의 창조에 관한 노래로 시작한다(시 104:2-4). 이 서두는 창세기의 첫 날을 암시하고 있다. 빛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결과다. 시인은 하나님이 이루시는 빛의 창조를 "주께서 옷을 입음 같이 빛을 입으시며 하늘을 휘장 같이 치시며"라고 묘사한다(시 104:2). 창세기 1:3의 "빛이 있으라"가 시 104편에서는 "옷을 입음 같이 빛을 입으셨다"로 펼쳐진다. "옷을 입음 같이 빛을 입으시며"(오테-오르 캇살마)! "하늘을 휘장 같이 치시며"(노테 샤마임 카예리아)! 시인은 빛을 창조주 하나님을 감싸는 옷으로 비유하고 있다. 창조주 하나님은 하늘에서 빛 가운데 자신을 계시하시는 분이라는 것이다. 시 104:2의 전반절에 나오는 이 "빛"(오르 )은 후반절에서는 "하늘"(샴마임)과 평행구(parallelism)를 이룬다. 하나님이 옷을 입음 같이 빛을 입으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늘을 차일처럼 펼치셨다"(공동번역)는 것이다. 즉 창세기에 나타난 빛은 시 104편에서는 하늘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창세기 1:3의 "빛"(오르)을 창세기 1:14-19의 "빛"(메오로트)과 구분해서 파악해야 한다. 창조의 첫째 날 창조된 빛은 창조의 넷째 날 창조된 발광체들과는 그 성격이 다르다. 창세기 1:14 이하에 소개되는 "메오로트"(메오라의 복수형)는 빛이 아니라 "빛들"(luminaries)이다. "광명체"(개역개정), "빛나는 것들"(공동번역, 새번역)이다. 창세기의 창조신앙은 원시의 빛, 태초의 빛, 우주의 빛이 창조의 첫 번째 날에 있고 나서야 태양 같은 광명체들이 창조의 네 번째 날에 하늘 위 공간에 생기게 되었다는 것을 분명히 한다. 유대 랍비 라쉬(Rashi)의 미드라쉬도 이런 우리 사색에 도움을 준다. 라쉬에 따르면, 창조된 모든 것은 첫 번째 날에 만들어졌다. 그렇지만 메오로트(천체의 물질들)가 이미 창조되었어도 하나님은 그것들을 네 번째 날이 되기 전까지는 창공에 내걸지 않으셨다. 게다가 창조된 모든 것이 창조의 과정 중에 이 세상에 배치된 것은 아니었다. 그것들 중 일부는 경건한 자들이 다가올 세상에서 사용하도록 따로 구별해 두었다. 그것들 가운데는 첫째 날의 오르(빛)와 호쉐크(어두움)가 있다. 다시 말해 오르와 호쉐크는 우리 세상에서는 찾을 수 없는 물질이다. 메오로트는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을 위해 만드신 천체들이다. 창세기 1:3-5의 빛은 그 맥락에서 볼 때 (하늘) 공간을 지칭한다. 창세기 1:3-13이 공간의 창조를 증언하기 때문이다. 창세기 1:14-31은 그 공간을 채우는 물체들을 창조하시는 하나님을 드러낸다. 전자가 하드웨어라면, 후자는 소프트웨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전자가 환경이라면, 후자는 그 환경에 거주하는 생명체들이다. 다시 말해 창세기 1:3의 빛은 해와 달과 별 같은 광명체가 활동하도록 조성된 공간이다. 이 공간 속에 하늘이 있고, 이 공간의 리듬에 따라 순환하는 시간이 이 땅에 설정되었다. 시간이 있기 전 공간을 먼저 있게 하셨다. 2. 그 빛이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그 빛을 보셨다(봐야르 엘로힘 에트-하오르), 그러자 보기에 좋으셨다(키 토브). 창세기의 빛의 창조(1:3)는 이런 평가(1:4a)로 이어진다. 아직 첫날의 창조사역이 다 끝나지 않았는데(!) 창세기 1:4a에서 하나님은 빛을 보시고 난 뒤 서둘러(?) 좋았다고 말씀하셨다. 그 빛이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다는 사실은 빛의 창조(창 1:3)가 있기 전에는 보시기에 좋지 않았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빛이 창조되기 이전의 세상, 곧 창세기 1:2의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던" 땅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지 않았었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빛을 생기게 한 뒤 그 빛을 최초로 감상하신(!) 하나님의 평가가 "좋았다"(토브)는 한 마디로 압축되어 있는 것은 영 예사롭지 않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다"니, 도대체 무엇이, 어떻게, 얼마나 좋으셨다는 것인가? 창세기에 소개된 첫 번째 창조 이야기는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과정을 밟는 한 쌍의 여정을 소개한다. 그 흐름의 본질은 혼돈에서 코스모스로 가는 여정이다. 그 여정의 중심은 하늘에서 땅으로 쏠린다. 다시 말해 처음 3일간의 창조사역에서 이야기의 초점은 창조의 제 3일(1:9-13)에 쏠리고, 나중 3일간의 창조사역에서 증언의 클라이맥스는 창조의 제 6일(1:24-31)에 쏠린다. 즉, 창세기의 창조신앙은 땅에 존재하게 된 생명체의 뿌리를 밝혀내는 일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여기에서 창세기 1:2,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셨다"와 창세기 1:3 이하가 전하는 내용 사이에 놓여 있는 의미상의 관계를 물어야 한다. 창세기 1:2가 증언하는 내용은 한 마디로 카오스다. 창조 이전의 카오스다. 창세기 1:3-31이 고백하는 이야기는 코스모스의 창조다. 창세기의 첫 번째 창조 이야기의 속내가 혼돈으로부터의 창조(creation out of chaos)라는 궤도를 밟고 있는 것이다. 이런 창조사역의 들머리에 "빛이 있으라"라는 하나님의 명령이 선포되었다. 창세기 1:3에 등장하는 창조의 빛은 창세기 1:2의 혼돈스런 땅과 분리되어 이해될 수 없다는 것이다. 즉, 빛을 창조하신 다음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한 말은 창조 이전의 세상과 창조 이후의 세상에 대한 신학적 평가를 담고 있다. 창조 이전의 세상, 곧 창세기 1:2가 전하는 세상과 창조 이후의 세상, 곧 창세기 1:3 이후가 전하는 세상 사이에는 부정과 긍정의 대조가 있다.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던 땅이라는 소개는 자못 부정적이다. 그러나 예컨대 빛이 있으라 하니 빛이 있었고 그 빛이 보시기에 좋았다는 보도는 분명 긍정적이다. 창세기 1:2의 보도는 암울한 색채를 띠고 있지만, 창세기 1:3-31의 이야기는 밝고 희망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 그 연출의 단초가 바로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다는 평가다. 그러나 창세기 1:2와 1:3-5를 부정과 긍정의 대조로만 이해해서는 안 된다. 현재 우리가 읽고 있는 창세기는 창세기 1:2에 있던 부정이 창세기 1:3이하에 가서는 긍정으로 바뀌어가는 움직임을 보여주고 있다. 아무런 모양이 없던 우주가 골격과 모양을 갖춘 우주로 변해가고,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던 우주가 질서와 구조를 갖춘 우주로 변해가고, 부정적이기만 했던 우주가 긍정적인 모양새를 갖춰가고, 악하기만 했던 우주가 좋은 세상으로 바뀌어져가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빛의 창조와 함께 소개되는 창세기의 창조신앙은 카오스이기만 했던 우주가 코스모스로 바뀌어져 가는 과정을 적극 소개한다. 전통적으로 신앙공동체는 창조론을 정리할 때 "무(無)로부터의 창조"(creation out of nothing)를 내세운다. 어떻게 창세기 1장이 전하는 혼돈으로부터의 창조가 무로부터의 창조란 이름으로 재구성될 수 있었을까? 창세기 1:2, 3-31이 하나님의 창조를 카오스에서 코스모스로 가는 여정으로 제시한다면, 과연 무로부터의 창조란 교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할까? 이 질문에 대한 논의는 길다. 이 논의는 기독교신앙만의 문제만은 아니다. 유대신앙 공동체도 이 문제를 붙들고 오랫동안 씨름하였다. 그 토론을 여기에서 다 거론하는 것은 필자의 역량을 벗어난다. 한 가지 기억할 것은 무(無)가 "없음"(nothing)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여기에서 무는 "아무 것도 아님"(no-thing)으로 이해해야 한다. 빛의 창조가 있기 전, 창조 이전의 세상에는 토후(혼돈)와 보후(공허)로 이루어진 호쉐크(흑암)만이 있었다(창 1:2a). 빛이 있기 전, 세상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는 것이다. 빛이 생기기 전 우주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는 것이다. 빛을 있게 하시기 전, 땅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창세기 1:4a가 단순히 창조된 빛을 가리켜 보기에 좋았다고 말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에 주의해야 한다. 창세기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무슨 뜻인가? 우주가 존재하는 것은 거기에 거주하는 물체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창조가 가르치고 있다. 우주가 존재하는 것은 창조주 하나님을 위해서이다. 우리의 자리는 창조주 그 분을 섬기는 데 있다. 그리고 우리가 그를 어떻게 섬겨야 할지는 오로지 (하나님의) 계시를 통해서만 알 수 있다. 그 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다는 평가는 세상이 존재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예배하는데 있다는 것을 밝힌다. 우리가 보기에 좋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으셨다고 말한다. 그러기에, 창조 이야기의 빛을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다는 평가는 단순히 미학적인 평가가 아니다. 그것은 정녕 신학적인 평가다. 3. 하나님이 빛과 어두움을 나누사 하나님의 첫 창조사역은 "빛이 있으라" 해서 생겨난 빛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코스모스를 빛(오르)과 어두움(호쉐크)으로 구별하는 일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빛과 어두움을 나누셨다는 것이다. 문자적으로 어두움의 반대말은 밝음이다. 그러나 창세기 1:3-5에서 어두움의 반대말은 빛이다. 창세기 1:3의 빛은 창세기 1:2의 어두움과 대조를 이룬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창세기의 창조신앙에서 살필 때 빛은 하나님의 창조 이후에 생긴 실체다. 하나님이 빛을 창조하심으로 우주 공간에 빛이라는 실체가 존재하게 되었다. 반면, 어두움은 하나님의 창조 이전에도 존재하고 있었다. 창세기 1:2가 그 점을 분명히 한다. 흑암(호쉐크)이, 즉, 어두움이, 깊음(테홈) 위에 있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신이 그 어둠의 수면 위에 운행하고 있었지만(창 1:2b), 그 때 어두움(호쉐크)은 분명 깊음(테홈) 위에 있었다. 여기에서 우리는 창조 이전의 어두움과 창조 이후의 빛이라는 대조를 발견하게 된다. 하나님이 창조 이전의 어두움을 빛의 창조 이후 빛과 나누셨다는 것은 창조의 첫째 날 이루어진 하나님의 창조가 어떤 것인지를 새삼 일깨워준다. 창조의 첫째 날, 하나님께서는 한 편으로는 빛이라는 새로운 실체를 생기게 하시면서,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창조 이전에 존재하던 카오스를 하나님의 의도에 맞춰 길들이셨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천지창조는 그 첫째 날에 맨 먼저 빛을 있게 한 다음, 창조이전에 있었던 혼돈의 "길들이기"(domestication)에 나섰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가 기억할 것은 하나님이 빛을 만드시면서 어두움을 없애버리지 않으셨다는 사실이다. 어두움을 하나님의 수중에 두셨던 것이지 결코 제거해 버리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단지 빛과 어두움을 나누어 놓으셨을 뿐이다. 빛의 자리를 만드시면서 어두움이 그 영역을 침범하지 못하도록 울타리를 치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 하나님은 빛이 제 자리에 있도록 하는, 어두움이 자기 자리를 지키도록 하는 언약을 사람과 맺으셨다. 하나님이 노아와 맺으신 언약이 바로 그 사실을 가리킨다(창 9:11). 창조신앙에 언약신학의 구조가 들어선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과 맺은 언약에 신실한 이상 세상은 온전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그 언약에 신실하지 못하다면, 하나님이 거기에 가둬 두셨던(!) 어두움은 언제든지 다시 터질 수 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에서 빛과 어두움이 질서를 유지하는 것은 전적으로 인간 노력 여하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세상은 망가지기 쉽다. 인간이 악하기 때문이다. 마치 깨지기 쉬운 그릇처럼 하나님의 창조 세계가 쉽사리 오염되고 깨질 수 있다. 창조신앙이 구속사신앙으로 뻗어나가는 지평이 여기에서 열린다. "깊음"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테홈"의 뿌리말은 언어학적, 전승사적으로 볼 때 고대 서아시아의 창조신화(에누마 엘리쉬)에 등장하는 "티아맛"(혼돈의 신)과 관련된다. 그런데 그 티아맛이 고대 서아시아의 창조신화에서는 창조사역의 주체(마르둑)와 큰 싸움을 벌인다. 하지만, 구약 창세기에서는 "테홈"이 하나님 홀로 이루시는 창조사역에 전혀 대들지 않는다. "테홈"을, "테홈"의 물을, 깊음의 "테홈"을 하나님의 신이 억누르고 계신다(창 1:2b, 베루아흐 엘로힘 메락헤페트 알-프네이 함마임). 창세기의 창조 이야기에서는 하나님이 홀로 창조사역을 이루시고 있다. 그 창조사역의 시종이 하나님의 명령으로 진행되고 있다. 거기에는 대화체 문장 같은 것은 아예 없다. 창세기 1장 본문은 의도적으로 홀로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부각시키고 있다. 창세기 1장의 문체는 창세기의 전반적인 모습과 비교해 볼 때 큰 차이가 난다. 창세기 이야기의 골격은 "이것은 ...의 계보다"(제 톨레도트)라는 말이다(5:1; 6:9; 10:1; 11:10; 11:27; 25:12, 13, 19; 36:1; 37:2). 계보는 사람의 뿌리를 확인시키는 도표다. 창세기에 소개되는 모든 등장인물은 이 계보라는 틀 속에서 한 가족으로 연결되고 있다. 그렇지만 창세기 이야기에서 하나님은 그 어떤 계보도 없다. 창세기에는 그리스 로마 신화처럼 하나님의 뿌리를 소개하는 계보 같은 것은 나오지 않는다. 창세기의 두 번째 창조 이야기(창 2:4-25)에 이것은 땅과 하늘의 계보다라는 글말이 나오지만, 그것은 결코 하나님의 계보가 아니다. 하나님은 그 어떤 계보나 족보에서 자유롭다. 창세기 이야기에서 하나님은 유일(unique)하신 존재다. 그는 온 우주의 창조자로서 이 땅이라는 무대를 초월해서 존재하신다. 하나님이 빛을 창조하시기 전 땅은 카오스 그 자체였다. 그 카오스를 지칭하는 단어가 단연 히브리어의 테홈(깊음)이다. 고대 서아시아의 세계에서는 이 테홈(티아맛)을 신이라는 인격을 지닌 주체로 묘사하였지만, 창세기의 창조신앙은 이 테홈과 관련된 신화의 옷을 벗겨놓았다. 테홈을 비인격화시키고 있다. 다시 말해, 창세기 1장의 창조이야기는 혼돈과의 싸움(Chaoskampf)이라는 주제를 일체 거론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빛을 창조하실 때 흑암이 하나님에게 대들지 않았다. 하나님이 빛과 어두움을 나누셨을 때 어두움이 하나님에게 덤비지 않았다. 레벤슨(J. Levenson)의 말대로 창세기의 창조신앙은 "대적없는 창조사역"(creation without opposition)을 담대하게 선포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구약성서에 보존되어 있는 모든 창조전승이 대적없는 창조사역을 외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창세기와는 달리 이스라엘 신앙의 전승에서 창조를 노래하는 시편들은 하나님의 창조를 혼돈(레비아단)과 벌인 싸움의 결과라는 것을 분명히 밝힌다. 가령 시편 74편이 그것을 노래하고 있다. 하나님은 옛적부터 나의 왕이시며, 이 땅에서 구원을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주님께서는 주님의 능력으로 바다를 가르시고, 물에 있는 타닌들의 머리를 깨뜨려 부수셨으며, 리워야단의 머리를 짓부수셔서 사막에 사는 짐승들에게 먹이로 주셨으며, 샘을 터뜨리셔서 개울을 만드시는가 하면, 유유히 흐르는 강을 메마르게 하셨습니다. 낮도 주님의 것이요, 밤도 주님의 것입니다. 주님께서 달과 해를 제자리에 두셨습니다. 주님께서 땅의 모든 경계를 정하시고, 여름과 겨울도 만드셨습니다(시 74:12-17). 시편 74편에는 "용사이신 하나님"(Divine Warrior)에 관한 기억이 깔려 있다. 하나님은 용사이다. 리워야단은 큰 바다 괴물이다. 바다를 혼돈으로 몰아넣는 주체다. 용사이신 하나님이 그 리워야단을 쳐부수셨다. 이처럼 리워야단이 하나님과 싸움을 벌였다는 것은 고대 서아시아의 창조신화를 연상시킨다. 그러나 시편 74편에서 리워야단은 결코 하나님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 시편 74편의 노래는 다음에 소개되는 시인의 노래와 비교해서 살펴야 한다. 주님, 주님께서 손수 만드신 것이 어찌 이리도 많습니까? 이 모든 것을 주님께서 지혜로 만드셨으니, 땅에는 주님이 지으신 것으로 가득합니다. 저 크고 넓은 바다에는, 크고 작은 고기들이 헤아릴 수 없이 우글거립니다. 물 위로는 배들도 오가며, 주님이 지으신 리워야단도 그 곳에서 놉니다. 이 모든 피조물이 주님만 바라보며, 때를 따라서 먹이 주시기를 기다립니다(시 104:24-27). 모든 시편기자가 하나님의 창조를 혼돈과 벌인 싸움의 결과로 보는 것은 아니다. 시편 104편에도 리워야단이 등장하지만, 그 리워야단은 하나님이 먹이를 주시기에 생존하는 존재일 뿐이다. 여기에서 리워야단은 아예 하나님이 지으신 피조물에 속한다. 이런 까닭에 우리는 구약의 창조신앙이 전승사적으로는 시편 74편의 기억→ 시편 104편의 노래→ 창세기 1장의 고백 순으로 옮겨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것은 창세기 1장의 창조신앙이 이스라엘 정신사에서는 가장 늦게 출현한 신앙고백이라는 사실을 암시한다. 그런데 왜 창세기 1:1-2:3이 구약성경의 맨 앞에 위치하고 있는가? 왜 창조시편에 담긴 하나님의 창조사역에 관한 증언이 역사적으로는 더 오래된 것으로 비쳐지는데도, 정경적으로는 창세기 1장의 창조신앙이 구약성서의 맨 앞 장을 차지하고 있는 것인가? 그 해답은 이스라엘이 고백하는 유일신 하나님 사상(monotheism)에서 찾아야 한다. 구약성경은 그 첫 대목에서부터 유일신 하나님을 가르치고 있다. 빛의 창조와 함께 개시되는 구약의 창조신앙은 과학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라는 차원에서 수렴해야 된다는 것이다. 이 유일신 하나님 신앙의 자리 안에 창세기 창조신앙의 정당성이 부각되고 있다. 4.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두움을 밤이라 부르시니라 "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봐이크라 엘로힘 라오르 욤) "어두움을 밤이라고 부르셨다" (베라호쉐크 카라 라옐라). 빛의 창조와 함께, 빛과 어두움의 구분과 함께, 낮과 밤의 구분이 시작되었다. 즉, 빛과 어두움을 나누시는 하나님의 창조사역에서부터 태고의 시간이 흐르기 시작하였다. 빛과 어두움의 구분은 하나님의 천지창조가 공간과 시간으로 질서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빛과 어두움의 구분은 하늘과 땅의 구분과 함께 생각해야 한다. 창조의 첫째 날은 창조의 둘째 날(창 1:6-8)과 더불어 살펴보아야 한다. 하나님이 창조의 둘째 날 이루신 사역은 어떤 것인가? 창조의 둘째 날, 하나님은 "물 가운데에 궁창이 있어"(예히 라키아 베토크 함마임 ) "물과 물로 나뉘라"(비히 맙브딜 벤 마임 라마임)고 명령하셨다. 여기에서 우리는 다시 한 번 창조 이전의 혼돈을 묘사하던 창세기 1:2에 "하나님의 신이 깊음 위에 운행하고 있었다"는 지적을 상기해야 한다. "빛이 있으라"는 명령(창1:3)이 흑암의 혼돈을 물리치는 절차였다면, "물 가운데 궁창이 있어 물과 물이 나뉘라"는 명령(창 1:6)은 깊음(테홈)의 혼돈을 극복하는 절차라고 말할 수 있다. 빛의 창조는 궁창(라키아, 새번역에서는 창공)의 창조로 이어진다. 궁창의 창조는 "궁창 아래의 물"(함마임 아쉐르 미타하트 라라키아)과 "궁창 위의 물"(함마임 아쉐르 메알 라라키아)로 구분하는 과정으로 진행된다. 여기에서 궁창은 "위의 물"이 쏟아지는 것을 막는 울타리다(욥 37:18). 아니, 하늘 바다(heavenly ocean)라고 부를 수 있다. 창세기의 창조신앙은 이 궁창을 하나님이 "하늘"(샤마임)이라고 부르셨다고 지적한다. "하나님이 궁창을 하늘이라 부르시니라"(창 1:8)! 이제 "빛을 낮이라, 어둠을 밤이라 부르셨다"는 창세기 1:5a의 증언을 살펴볼 차례다. "부르셨다"는 히브리어 동사(카라)는 폭넓게 쓰이는 말이다. 이 말이 창세기 1:5에서는 이름을 붙였다는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 하나님이 이제 막 새로 생겨난 빛에게 "욤"(낮)이라는 이름을 주셨고, 혼돈의 주체로 방치(?)되어 있던 어두움에게 "라옐라"(밤)라는 이름을 주셨다는 것이다. 자식에게 이름은 누가 지어주는가? 부모가 지어준다. 무슨 소리인가? 하나님이 빛과 어두움에게 각각 낮과 밤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셨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이름을 부른다고 하는 것은, 이름을 지어준다는 것은, 이름을 짓는 주체와 그 이름으로 불리는 주체 사이에 인격적 관계가 맺어진다는 뜻이다. 단순히 소유주여서 이름을 붙이는 것이 아니다. 물론, 하나님이 지으신 창조 세계에서 주인은 단연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생겨나는 것들은 모두 피조물이라고 불리는 생명체들이다. 세상은 하나님의 피조물이다. 창세기에 소개된 두 번째 창조 이야기(창 2:4-25)에서 하나님은 아담에게 동물들의 이름을 지어 부르게 하신 것을 상기하자. 시인 김춘수의 「꽃」은 이런 맥락에서 우리를 돕는 시각을 제공한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와 나 사이에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소중한 의미가 된다. 시인의 미학을 따라서 창세기 본문을 다시 조명해 보자. 하나님께서 빛과 어두움에게 각각 이름을 지어 주면서부터 빛과 어두움으로 구성된 세상은 하나님과 특별한 인격적 관계를 지니게 되었다는 것이다. 빛의 자리는 낮이다. 어두움의 자리는 밤이다. 어두움이 밤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면서부터 어두움은 이제 더 이상 태초 이전의 카오스가 아니다. 위에서 언급한대로 어두움의 카오스는 하나님에 의해서 길들여졌다. 창조 이후부터 어두움은 결코 홀로, 독자적으로, 제 멋대로, 활개 치지 못한다. 이제부터 어두움은 창조주 하나님이 지어놓으신 밤의 울타리 안에 있다. 창조 신앙의 밤은 역사적 지평에서는 고난과 시련으로 정리된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아우쉬비츠에 갇혔다가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뒤 자기가 겪었던 역사의 혼돈을 고발하였던 엘리 비젤의 이야기가 『밤』(Night)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던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 어두움은 경제적, 실존적, 일상적 고통으로도 정리된다. 그러나 아무리 어두움이 깊다고 해도, 아무리 어두움이 활개를 친다고 해도, 이스라엘의 창조신앙은 그 어두움이 하나님의 통제 밑에 있다는 것을 결코 잊지 않았다. 욥기의 교훈이 바로 그것이다. 욥은 길고도 긴 고난의 터널을 걸어가야 했다. 그 터널의 질고에서 욥을 해방시킨 것은 하늘과 땅과 뭇 생명을 내가 지으셨다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연설을 들었던 순간이었다(욥 38:1-42:6). 사람이 실존적인 고난을 당하는 순간에도 창조세계는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질서대로 움직인다는 하나님의 연설 앞에서 욥은 내가 고난을 당하면 정의로운 하나님이란 이 땅에 없다고 소리쳤었던 무(無)신앙을 회개하였다. 사도 바울의 고백도 이런 욥의 깨달음과 무관하지 않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5, 38-39). 창세기가 증언하는 창조의 빛은 그 반대 되는 어두움이 하나님께서 조성하신 밤이라는 공간으로 들어왔다는 것을 일깨워준다. 어두움이 하나님의 통제를 받기에 빛과 어두움이 교차하는 창조세계의 리듬은 이제부터 낮과 밤이 교대하는 세상질서의 맥박이 된다. 그 맥박에 따라 우리 일상을 조율하게 될 때 창조세계는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는 무대가 된다. 사람은, 하나님의 뜻 안에 사는 사람은, 누구나 그 무대에 서도록 부름 받은 주인공이다!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어둠이 무서운 것이 아니다. 고난이 두려운 것이 아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는 것이 두렵다. 5. 맺음말,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빛은 하나님의 피조물이다. 이 빛이 생기게 되었기에 창조신앙은 어둠에서 빛으로 가는 구조를 이룬다. 빛이 생겨났기에 창조신앙은 저녁에서 아침으로 가는 흐름을 이룬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봐예히-에레브 봐예히-보케르)! 저녁이 먼저 오고 아침이 나중에 온다. 이것은 창세기 1:3의 "빛이 있으라" 앞에 "흑암이 깊음 위에 있었다"는 창세기 1:2가 존재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되새기게 하는 울림이다. 창세기 1:3-5의 빛은 고대 이집트의 찬양시, 즉 "아텐을 향한 찬양"(The Hymn to the Aten)이 한껏 드높였던 태양 찬가의 목청을 단번에 꺾어놓았다. "아텐을 향한 찬양"은 주전 14세기 중반 고대 이집트의 왕 아문호텝 IV(Amunhotep IV)세가 아텐에게 바쳤던 노래다. 아텐은 둥근 태양(solar disc)으로 우주를 창조한 신의 현현으로 간주되었던 대상이다. 다시 말해 아텐은 태양신이었다. 아문호텝 IV세는 그 태양신 숭배에 맞춰 사회개혁을 단행하면서 자신의 이름을 아크헤나텐(Akhenaten, 아텐을 섬기는 자)이라고까지 개명하였다. 오늘날 구약학자들은 고대 이집트의 아텐 찬양이 시편 104편의 창조신앙에 간접적이지만 영향을 끼쳤다고 본다. 아텐 찬양이 고대 셈족 사회에서 오랫동안 태양에 관한 묵상을 담은 자료로 입에 오르내렸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사실, 아텐 찬양과 시편 104편은 그 어휘와 소재, 내용 등에서 서로 병행한다. 두 시 모두 하나님의 빛으로 시작한다. 아텐 찬양은 해돋이로, 시 104편은 "빛을 옷처럼 걸치시는" 하나님으로 시작한다. 두 시 모두 창조세계에 사는 짐승, 새, 나무, 식물 등을 노래한다. 두 시 모두 바다와 거기에 사는 생명체를 노래한다. 이 두 시에서는 각각 밤에 자기 동굴을 찾는 사자(아텐 찬양)와 먹을거리를 찾아 부르짖는 사자(시 104:21)도 등장한다. 당신이 하늘 지평선에 아름답게 나타날 때, 살아계신 아텐(Aten)이여, 당신은 생명의 시작입니다. .... 당신이 서쪽 지평선으로 내려가시면, 땅은 어둠 가운데 죽음과 같아집니다. 사람들은 자기 머리를 덮고 침상에서 잠들며 .... 모든 사자는 그 굴혈에서 나오며 모든 뱀은 깨뭅니다. 어둠이 지배하니 땅은 침묵 가운데 있습니다. 이것은 이들 만드신 이가 그의 지평선에서 쉬기 때문입니다. 아침이 오면, 당신이 지평선에서 올라와 아텐(Aten)으로 하루를 밝히고. 어둠을 물리치며 당신의 빛들을 뿌립니다. ..... 모든 세상은 일하러 나섭니다. 같은 목소리가 시편 104편에서도 들린다. 젊은 사자들은 먹이를 찾으려고 으르렁거리며, 하나님께 먹이를 달라고 울부짖다가, 해가 뜨면 물러가서 굴에 눕고, 사람들은 일을 하러 나와서, 해가 저물도록 일합니다(시 104:21-24). "사람들은 일을 하러 나와서, 해가 저물도록 일합니다"! 해가 뜨면 일하러 나가고, 해가 지면 일터에서 물러나 자기 집으로 가 눕는다는 것이다. 빛의 도래와 함께 일하러 나가고 일을 마치고 쉬는 일상의 리듬이 존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아텐 찬양시와 시편 104편의 사이에는 공통점이 존재한다. 그렇지만 시편 104편에서 해와 빛은 결코 신적이 존재가 아니다. 아텐 찬양과 시편 104편의 창조시가 서로 다른 결정적인 요소가 여기에 있다. 시편 104편에서 해와 빛은 어디까지나 지음 받은 피조물이다. 아텐 찬양시는 태양이 주는 엄청난 창조의 권능에 빠져 그것을 신으로 대상화하였지만, 시편 104편은 태양이 주는 놀라운 창조의 에너지를 보면서 그 태양을 있게 만든 하나님을 찬양하였다. 창조에 나타난 빛, 그것은 하나님의 창조사역이 빛으로부터 시작하고, 그 빛을 가지고 빛과 어두움을 구분하는 공간의 창조로 이어졌음을 보여준다. 이런 맥락에서 구약의 창조신앙은 하나님이 빛을 창조하신 것과 더불어 밤을, 창조 이전에 카오스의 범인(!)이었던 흑암을, 본격적으로 다스리기 시작하셨다는 것을 구체적으로 알린다. 하나님이 빛을 낮이라고 부르시고, 어두움을 밤이라고 부르셨다는 것이다. 이제부터 밤은 결코 하나님이 부재하시는 상황이 아니다. 밤을 있게 하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었다"는 선언과 함께 창조신앙을 고백하는 사람은 누구나 빛을 있게 하신 하나님과 더불어 밤을 있게 하신 하나님을 상기하게 된다. 밤은 결코 하나님의 동면기(冬眠期)가 아니다. 밤이 되었다고 해서 하나님이 그 활동을 멈추시는 것이 아니다. 밤은 정녕 전능하신 야웨 하나님이 이끄시는 창조세계의 또 다른 면이다. 창세기 1:5,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다"는 선포는 바로 이 진리를 일깨워주고 있다. 이스라엘 신앙의 골격은 저녁에서 아침으로 가는 구조다. 흑암에서 빛으로 가는 흐름이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이 부활로 이어지는 구조와 일맥상통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정리되는 구속사신앙의 바탕은 본래 창조신앙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창조가 있었기에, 창조의 리듬이 있었기에, 창조의 질서가 있었기에 하나님의 구속사는 전개될 수 있었다. 예수 그리스도도 이 질서를 통해서 이 땅에 오셨다. 빛의 창조가 있었기에 어두움도 하나님이 통솔하시는 창조의 영역인 것이 드러났다. 빛의 창조가 있었기에 역사도, 구속사도 삶의 지평에 구현될 수 있었다. 창조는, 그러기에, 빛의 축제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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