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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상산김씨낙성군파충정공 시제 봉행

작성자김돌멩이|작성시간24.10.25|조회수54 목록 댓글 2

2024년 10월 20일 경기도 파주시 적성면 설마천로 47 소재한 충정공(김덕함, 경기도 기념물 144호) 묘소에서 시제를 봉행하였습니다.

김덕함 충정공 신도비

 

 

충정공 경기도 기념물 안내글

 

참레자 일동
참레자 재배

 

 

초헌관 분향

김덕함의 생애

청백리淸白吏 김덕함金德諴은 1562(명종 17)년에 출생하여 1636(인조 14)년에 75세로 별세하였습니다. 조선시대 선조, 광해, 인조 대에 활동한 문신으로 이민利民의 선정을 베푼 청백리였습니다. 시호諡號는 충정忠貞이시다.

본관은 상주尙州. 자는 경화景和, 호는 성옹醒翁. 증 통예通禮 형衡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증 좌승지左承旨 장수長琇이고, 아버지는 증 이조참판吏曹參判 홍洪이다.

성옹醒翁 김덕함은 12세의 어린나이에 아버지를 여의고 곤궁한 가정에서도 스스로 문예에 힘써 1587(선조 20)년 생원시에 합격하고 1588(선조 21)년 진사가 되었으며, 1589(선조 22)년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연안延安에서 초토사 이정암李廷馣을 도와 의병을 모집하고 군량을 조달하는 일을 맡았다. 이듬 해 행재소인 정주까지 왕을 호종하였다. 그 후 공조좌랑이 되었다.

1594년 임시로 군공청軍功廳을 세워 전쟁의 공과를 실시할 때 비변사 낭청을 제수 받았다. 그는 능력을 인정받아 예조와 공조의 좌랑과 비변사 낭청· 호조 정랑· 직강· 사예 등의 중앙관직과 선천· 청풍· 단천· 성천· 장단· 안주의 지방관을 역임하였다.

1597년 일본의 재침으로 분조分曹가 세워지자 호조정랑으로서 분호조정랑分戶曹正郞을 겸임해 군량 조달에 힘썼다. 1601년 10월 22일에 순창淳昌군수를 제수 받았다. 동년 11월 23일 군기시정軍器寺正에 제수되었다. 1605년 9월 30일에는 장단부사長湍府使 제수되었다. 그가 장단부사를 역임할 때 경기 암행어사 심집沈諿은 암행결과를 “장단부사 김덕함은 청고淸苦한 소신을 지켜 아전들은 두려워하였고 백성들은 존애尊愛하였다”라고 보고하였을 정도로 그는 청백한 관리였습니다. 1610년 5월 7일 안주목사에 제수 되었으나 이듬해 5월에 임기 만료가 된 김덕함의 유임을 요구하는 백성들의 청원함을 알리는 평안감사의 장계가 올라왔습니다. 어전회의에서 이조가 아뢰었다.

“평안 감사의 장계에 말한 안주 목사安州牧使 김덕함金德諴의 일을 대신들과 의논하였습니다. 이항복은 의논드리기를 ‘덕함의 치적은 온 도내에서 으뜸이며 또한 조사詔使가 왔을 때에 주참主站의 지위에 있으면서 잘 요량하여 처리하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고을 사람들만 그런 게 아니라, 이웃 고을의 수령과 본도의 감사까지도 모두들 신에게 그가 머물 수 있도록 청해줄 것을 바랐었으나, 신의 생각으로는 번거롭게 아뢰는 것은 일의 체모가 아닐 듯하여 함부로 허락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지금 이 장계를 올린 것은 본도의 사세상 그럴 수밖에 없어서 한 것인데, 오직 성명께서 결정하시기에 달려 있습니다.’ 하였습니다.

심희수는 의논드리기를 ‘김덕함이 일찍이 수령으로 있었을 때에 모두들 잘 다스린다는 칭송이 있었습니다. 안주에서의 정치에 대해서는 자세히 듣지 못하였으나, 백성들의 장계를 보면 그가 머물러 주기를 바라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근래에 지역 주민들의 소청으로 그대로 머물러 있는 경우가 자주 있습니다. 이는 진실로 매우 구차한 일이라 하겠으나, 서도 지방의 기근은 다른 지방에 비할 바가 아니고 또 중국 사신의 행차가 있게 될 것이니, 잠시 그대로 머물러 있게 하여 조그마한 폐단이라도 제거하도록 하는 것이 임시적인 도리에 합당할 듯합니다.’ 하였습니다.”

1615년 1월 20일 수성찰방輸城察訪, 1617년 8월 18일 군기시정軍器寺正에 이르렀으나 1617년에 인목대비仁穆大妃에 대한 폐모론이 일자 이항복· 정홍익鄭弘翼의 의견을 좇아 반대하다가 남해南海에 유배되었다가, 명천, 온성, 남예南裔 등지에 이배되었다.

인조반정으로 복권되어 1623(인조 1)년 3월 16일에 집의로 제수 받은 이후 예조·병조·형조·공조의 참의와 승지·부제학·대사성·대사간·여주목사· 춘천부사를 거쳐 1636년 10월 24일 대사헌에 올랐다. 이 때 왕에게 사치를 경계하고 김공량金公諒의 신원을 반대해 인조의 미움을 사기도 하였다.

1627년 정묘호란 때는 호소사號召使로 활약했으며 청나라에 대한 척화를 강력히 주장하였다. 1636년 6월 8일에는 청백리로 뽑혔다. 1636년 12월에 득병하여 세수를 다하였다.

문집으로 ≪성옹유고≫가 전한다. 사천의 구계서원龜溪書院, 온성의 충곡서원忠谷書院, 배천의 문회서원文會書院, 북청의 노덕서원老德書院, 안주의 청천사淸川祠에 제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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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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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해운대 김성근(상산군파36세) | 작성시간 24.10.29 멋진 명문 가문입니다..
  • 작성자김돌멩이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4.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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