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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방

김기택 시인

작성자썬탑|작성시간19.04.20|조회수475 목록 댓글 0

43주 텍스트

 

김기택 시인

1957년 경기도 안양에서 태어났다

1989한국일보신춘문예에 시곱추가 당선

시집태아의 잠

바늘구멍 속의 폭풍

사무원

갈라진다 갈라진다

김수영문학상, 현대문학상, 미당문학상, 지훈문학상, 상화시인상, 경희문학상 편운문학상 등을 수상하였다.

현재 경희사이버대학교 교수

경희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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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 죽이기 / 김기택

 

그림자처럼 검고 발걸음 소리 없는 물체 하나가

갑자기 도로로 뛰어들었다

급히 차를 잡아당겼지만

속도는 강제로 브레이크를 밀고 나아갔다.

차는 작은 돌멩이 하나 밟는 것만큼도 덜컹거리지 않았으나

무언가 부드러운 것이 타이어에 스며든 것 같았다.

얼른 싸이드미러를 보니 도로 한가운데에

털목도리 같은 것이 떨어져 있었다.

야생동물들을 잡아먹는 것은, 이미 오래전부터,

호랑이나 사자의 이빨과 발톱이 아니라

잇몸처럼 부드러운 타이어라는 걸 알 리 없는 어린 고양이였다.

승차감 좋은 승용차 타이어의 완충장치는

물컹거리는 뭉개짐을 표나지 않게 삼켜버린 것이다.

씹지 않아도 혀에서 살살 녹는다는

어느 소문난 고깃집의 생갈비처럼 부드러운 육질의 느낌이

잠깐 타이어를 통해 내 몸으로 올라왔다.

부드럽게 터진 죽음을 뚫고

그 느낌은 내 몸 구석구석을 핥으며

쫄깃쫄깃한 맛을 오랫동안 음미하고 있었다.

음각무늬 속에 낀 핏자국으로 입맛을 다시며

타이어는 식욕을 마저 채우려는 듯 속도를 더 내었다

 

 

/ 김기택

누군가 씹다버린 껌.

이빨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는 껌.

이미 찍힌 이빨자국 위에

다시 찍히고 찍히고 무수히 찍힌 이빨자국들을

하나도 버리거나 지우지 않고

작은 몸속에 겹겹이 구겨넣어

작고 동그란 덩어리로 뭉쳐놓은 껌.

그 많은 이빨자국 속에서

지금은 고요히 화석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껌.

고기를 찢고 열매를 부수던 힘이

아무리 짓이기고 짓이겨도

다 짓이겨지지 않고

조금도 찢어지거나 부서지지도 않는 껌.

살처럼 부드러운 촉감으로

고기처럼 쫄깃한 질감으로

이빨 밑에서 발버둥치는 팔다리 같은 물렁물렁한 탄력으로

이빨들이 잊고 있던 먼 살육의 기억을 깨워

그 피와 살과 비린내와 함께 놀던 껌.

지구의 일생 동안 이빨에 각인 된 살의와 적의를

제 한몸에 고스란히 받고 있던 껌.

마음껏 뭉개고 갈고 짓누르다

이빨이 먼저 지쳐

마지못해 놓아준 껌.

교정 보는 여자 / 김기택

 

  그녀의 눈으로 끊임없이 글자들이 지나간다. 글자들은 책상 위에 휴지통에 바닥에 어지럽게 흩어져 있고 그녀는 종일 빠지고 넘어져 잘못된 글자들을 골라내어 제자리에 앉혀준다. 글자들은 모래알처럼 많고 모래알처럼 딱딱하다. 그녀의 눈 속에 촘촘하게 박힌다. 뜨겁고 눈부신 태양의 조명 아래 모래알 가득한 눈을 끔벅거리며 그녀는 낙타처럼 글자의 사막을 지나간다. 가끔 눈이 너무 아프면 잠시 감아보기도 한다. 글자들은 눈알에 깊이 음각되어, 감은 눈에 더 선명하게 나타난다. 그러면 그녀는 곧 음각된 글자들을 손등으로 꾹꾹 누르고 다시 눈을 열어 글자 속으로 들어간다.

 

  이윽고 교정지 위로 어둠이 내린다. 그녀는 넓고 두툼한 어둠으로 글자들을 덮는다. 오래 상처가 난 눈을 감는다. 눈물이 가만히 상처를 만져본다. 상처가 조금씩 소스라치며 씻긴다. 이윽고 글자들은 어둠의 두툼함 속에 묻히고 그녀의 눈은 편안해 진다. 그녀는 손바닥에 닿는 어둠을 더듬더듬 만져본다. 오래 오래 그 감촉들을 음미해 본다. 손가락 끝은 단맛을 모르지요. 향긋한 냄새와 혀끝의 짜릿함도 모르지요. 하지만 남은 표면의 우툴두툴한 편안함은 더 잘 안답니다. 허름한 잔등의 온기와 기침 속에서 떨리는 등뼈의 정다운 울림은 더 잘 안답니다.

 

  말속에 말들이 있다. 손가락 끝에서 만져졌던 말은 가슴에 와서 작은 누룩 속에 들어 있는 빵처럼 크고 둥글어진다. 눈에서 녹아 가슴에 내린 글자의 상처들을 동그랗게 싸고 부풀어 오르는 말의 향기들. 숨 쉴 때마다 그녀의 부푼 가슴에서는 빵 굽는 냄새가 난다.

 

바늘구멍 속의 폭풍 / 김기택

너무 오랫동안 사용해서 그의 육체는 낡고 닳아있다. 숨을 쉴 때마다 목구멍과 폐에서 가르랑가르랑 소리가 난다. 찰진 분비물과 오물이 통로를 막아 바늘구멍처럼 좁아진 숨구멍으로 그는 결사적으로 숨을 쉰다. 너무 열심히 숨을 쉬느라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다. 숨이 차면 자주 입이 벌어진다. 벌어진 입으로 침이 질질 흘러나오지만 너무 심각하게 숨을 쉬느라 그것을 닦을 겨를이 없다.

밤이 되면 숨 쉬는 소리 외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목구멍에서 그르렁거리는 낮은 소리는 때로 갑자기 강해져서 거목을 뽑고 지붕을 날려버릴 것처럼 용틀임을 한다. 휘몰아치는 바람의 힘에 흔들려 그의 몸이 세차게 흔들리다가 이윽고 가래와 침을 뚫고 기침이 뿜어져 나온다. 기침이 나올 때마다 그는 목을 붙잡고 컹컹 짖으며 방바닥에서 뒹군다. 몸 속에서 한바탕 기운을 쓴 바람은 차츰 조용해져서 다시 허파에 얌전히 들어앉아 가르릉거린다.

필사적으로 바람을 견디다가 찢어진 비닐 조각처럼, 떨어져 덜컹거리는 문짝처럼, 망가지고 허술해진, 바람을 더 견디기엔 불안한 몸뚱어리를 그는 조심스럽게 침대 위에 눕힌다. 조금이라도 호흡이 거칠어지거나 불규칙하면 몸속에 쉬고 있는 폭풍이 꿈틀거린다. 숨이 바늘구멍을 무사하게 통과하게 하느라 그는 아슬아슬 호오호오 숨을 고른다. 불손했고 반항적이었던 생각들과 뜨겁고 거침없었던 감정들로 폭풍에 맞서 온 몸은 폭풍을 막기에는 이젠 너무 가볍고 가냘프다. 고요한 마음, 꿈 없고 생각 없는 잠이 되려고 그는 더 웅크린다

 

 

 

사무원/ 김기택

이른 아침 6시부터 밤 10시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그는 의자 고행을 했다고 한다.

제일 먼저 출근하여 제일 늦게 퇴근할 때까지

그는 자기 책상 자기 의자에만 앉아 있었으므로

사람들은 그가 서 있는 모습을 여간해서는 볼 수 없었다고 한다.

점심시간에도 의자에 단단히 붙박여

보리밥과 김치가 든 도시락으로 공양을 마쳤다고 한다.

그가 화장실 가는 것을 처음으로 목격했다는 사람에 의하면

놀랍게도 그의 다리는 의자가 직립한 것처럼 보였다고 한다.

그는 하루 종일 손익관리대장경(損益管理臺帳經)과 자금수지심경(資金收支心經) 속의 숫자를 읊으며

철저히 고행업무 속에만 은둔하였다고 한다.

종소리 북소리 목탁소리로 전화벨이 울리면

수화기에다 자금현황 매출원가 영업이익 재고자산 부실채권 등등등을

청아하고 구성지게 염불했다고 한다.

끝없는 수행정진으로 머리는 점점 빠지고 배는 부풀고

커다란 머리와 몸집에 비해 팔다리는 턱없이 가늘어졌으며

오랜 음지의 수행으로 얼굴은 창백해졌지만

그는 매일 상사에게 굽실굽실 108배를 올렸다고 한다.

수행에 너무 지극하게 정진한 나머지

전화를 걸다가 전화기 버튼 대신 계산기를 누르기도 했으며

귀가하다가 지하철 개찰구에 승차권 대신 열쇠를 밀어 넣었다고도 한다.

이미 습관이 모든 행동과 사고를 대신할 만큼

깊은 경지에 들어갔으므로

사람들은 그를 '30년간의 장좌불립(長座不立)'이라고 불렀다 한다.

그리 부르든 말든 그는 전혀 상관치 않고 묵언으로 일관했으며

다만 혹독하다면 혹독할 이 수행을

외부압력에 의해 끝까지 마치지 못할까 두려워했다고 한다.

그나마 지금껏 매달릴 수 있다는 것을 큰 행운으로 여겼다고 한다.

그의 통장으로는 매달 적은 대로 시주가 들어왔고

시주는 채워지기 무섭게 속가의 살림에 흔적 없이 스며들었으나

혹시 남는지 역시 모자라는지 한 번도 거들떠보지 않았다고 한다.

오로지 의자 고행에만 더욱 용맹정진했다고 한다.

그의 책상 아래에는 여전히 다리가 여섯이었고

둘은 그의 다리 넷은 의자다리였지만

어느 둘이 그의 다리였는지는 알 수 없었다고 한다.

 

우주인 2 / 김기택

몸무게 없는 몸으로 그는 검푸른 창공에 홀로 떠있습니다. 깊디깊은 허공에 익사하여 온통 부력만 남은 무중력 하늘에 둥둥 떠다니고 있습니다. 벌어진 입과 귓구멍 콧구멍에 무한을 가득 채운 채 끝없이 투명한 공기에 매장되어 있습니다. 막힘없이 펼쳐진 하늘에게 목 졸리고 숨구멍 막히고 팔다리 결박되어 우주 쓰레기들과 함께 떠돌고 있습니다. 놀란 입을 벌리고 눈을 허옇게 뒤집고 있는 공포는 아직도 우주선에서 조난당하고 있는 중입니다. 영혼과 천연 방부제가 배합된 우주 공기는 오래 묵은 미라를 칭칭 감아 하늘 높이 별처럼 띄워놓고 있습니다.

멸치 / 김기택

굳어지기 전까지 저 딱딱한 것들은 물결이었다

파도와 해일이 쉬고 있는 바닷속

지느러미의 물결 사이에 끼어

유유히 흘러다니던 무수한 갈래의 길이었다

그물이 물결 속에서 멸치들을 떼어냈던 것이다

햇빛의 꼿꼿한 직선들 틈에 끼이자마자

부드러운 물결은 팔딱거리다 길을 잃었을 것이다

바람과 햇볕이 달라붙어 물기를 빨아들이는 동안

바다의 무늬는 뼈다귀처럼 남아

멸치의 등과 지느러미 위에서 딱딱하게 굳어갔던 것이다

모래 더미처럼 길거리에 쌓이고

건어물집의 푸석한 공기에 풀리다가

기름에 튀겨지고 접시에 담겨졌던 것이다

지금 젓가락 끝에 깍두기처럼 딱딱하게 집히는 이 멸치에는

두껍고 뻣뻣한 공기를 뚫고 흘러가는

바다가 있다 그 바다에는 아직도

지느러미가 있고 지느러미를 흔드는 물결이 있다

이 작은 물결이

지금도 멸치의 몸통을 뒤틀고 있는 이 작은 무늬가

파도를 만들고 해일을 부르고

고깃배를 부수고 그물을 찢었던 것이다

 

한가한 숨막힘 / 김기택

조심조심 노인이 걷고 있다.

눈앞에서 널찍하고 평평하던 길이

발밑에서 외줄처럼 흔들리며 좁아지는 걸음을 걷고 있다.

구겨질까봐 슬금슬금 양복의 눈치를 보며

움직임을 최대한 작고 곱게 만든 걸음을 걷고 있다.

중간에 있는 관절 하나만 툭 건드려도

뼈 전체가 와르르 무너져 내릴 것 같은 몸을

살살 달래가며 걷고 있다.

고개 들어 두리번거리면 길이 흔들리고 중심이 무너질까봐

갈비뼈 위에 단단하게 고정시킨 목 대신

눈알만 가만가만 돌아가는 걸음을 걷고 있다.

발자국 소리가 일으키는 모든 진동을

숨막히도록 가는 숨소리로 흡수하며 걷고 있다.

옆으로 휙휙 지나가는 젊은이들의 빠른 시간이

무례하고 거친 바람을 일으킬 때마다

걸음은 파닥거리는 몸을 붙잡고 잠시 기우뚱거리다가

가까스로 균형을 잡고 있다.

걸음에 연결된 모든 관절을 조금씩 마비시키는 죽음

동작 속에 스며들어 보이지 않게 자라온 죽음이

있는 힘을 다해 품위를 잃지 않으려고

사뿐사뿐 걷고 있다.

 

 

 

머리 깎는 시간 / 김기택

 

이발사는 희고 넓은 천 위에

내 머리를 꽃병처럼 올려놓는다.

스프레이로 촉촉하게 물을 뿌린다.

이 무성한 가지를 어떻게 剪枝하는 게 좋을까

빗과 가위를 들고 잠시 궁리하는 눈치다.

이발소는 시계 초침 소리보다 조용하다.

시계만 가고 시간은 멈춘 곳에서

재깍재깍 초침 같은 가위가 귓가에 맑은 소리를 낸다.

그 맑은 소리를 따라간다. 가위 소리에서

찰랑찰랑 물소리가 나도록 귀 기울여 듣는다.

싹둑, 머리카락이 가윗날에 잘릴 때

온몸으로 퍼지는 차가운 진동.

후드득, 흰 천 위에 떨어지는 머리카락 덩어리들.

싹둑싹둑 재깍재깍 후드득후드득······

가위 소리는 점점 많아지고 가늘어지더니

창밖에 가득 빗방울이 떨어진다.

흙에, 풀잎에, 도랑에, 돌에, 유리창에, 양철통에

저마다 다른 빗소리들이 서로 겹쳐지는 소리.

처마에서 새끼줄처럼 굵게 꼬이며 떨어지는 소리.

물뿌리개로 찬물을 흠뻑 부으며

이발사는 어느새 내 머리를 감기고 있다.

수건으로 물기를 닦아내고 만져보니

머리가 더 동굴동글하고 파릇파릇하다.

비 온 뒤의 풀잎처럼 빳빳하다.

1989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꼽추/ 김기택

지하도

그 낮게 구부러진 어둠에 눌려

그 노인은 언제나 보이지 않았다.

출근길

매일 그 자리 그 사람이지만

만나는 건 늘

빈 손바닥 하나, 동전 몇 개뿐이었다

가슴 등뼈 아래 숨어사는 작은 얼굴 하나

시멘트를 응고시키는 힘이 누르고 있는 흰 얼굴 하나

그것마저도 아예 안 보이는 날이 더 많았다

하루는 무덥고 시끄러운 정오의 길바닥에서

그 노인이 조용히 잠든 것을 보았다

등에 커다란 알을 하나 품고

그 알 속으로 들어가

태아처럼 웅크리고 자고 있었다

곧 껍질을 깨고 무엇이 나올 것 같아

철근 같은 등뼈가 부서지도록 기지개를 하면서

그것이 곧 일어날 것 같아

그 알이 유난히 크고 위태로워 보였다

거대한 도시의 소음보다 더 우렁찬

숨소리 나직하게 들려오고

웅크려 알을 품고 있는 어둠 위로 종일 빛이 내리고 있었다

다음날부터 노인은 보이지 않았다

 

사진 속의 한 아프리카 아이 1 / 김기택

앞에서 바람이 불면

살갗은 갈비뼈 사이 앙상한 틈을 더 깊이 후벼판다

뒤에서 바람이 불면

푹 꺼진 배는 갑자기 둥글게 부풀어오른다

가는 뼈의 깃대를 붙잡고 나부끼는

검은 살갗

아이는 모래 위에 뒹구는 그릇을 내려다보고 있다

가는 막대기팔과 다리로 위태롭게 떠받친 머리통처럼

크고 둥근,

굶주릴수록 악착같이 질겨지는 위장처럼

텅 빈

그릇 하나.

/ 김기택

 

튼튼한 것 속에서 틈은 태어난다

서로 힘차게 껴안고 굳은 철근과 시멘트 속에도

숨 쉬고 돌아다닐 길은 있었던 것이다

길고 가는 한 줄 선 속에 빛은 우겨지고

버팅겨 허리를 펴는 틈

미세하게 벌어진 그 선의 폭을

수십 년의 시간, , 초로 나누어본다

아아, 얼마나 느리게 그 틈은 벌어져온 것인가

그 느리고 질긴 힘은

핏줄처럼 건물의 속속들이 뻗어 있다

서울, 거대한 빌딩의 정글 속에서

다리 없이 벽과 벽을 타고 다니며 우글거리고 있다

지금은 화려한 타일과 벽지로 덮여있지만

새 타일과 벽지가 필요하거든

뜯어보라 두 눈으로 확인해 보라

순식간에 구석구석으로 달아나 숨을

그러나 어느 구석에서든 천연덕스러운 꼬리가 보일

! ,, , 틈틈틈틈틈……

어떤 철벽이라도 비집고 들어가 사는 이 틈의 정체는

사실은 한 줄기 가냘픈 허공이다

하릴없이 구름이나 풀잎의 등을 밀어주던

나약한 힘이다

이 힘이 어디에든 스미듯 들어가면

튼튼한 것들은 모두 금이 간다 갈라진다 무너진다

튼튼한 것들은 결국 없어지고

가냘프고 나약한 허공만 끝끝내 남는다

 

소가죽 구두 / 김기택

비에 젖은 구두

뻑뻑하다 발이 잘 들어가지 않는다

신으려고 애쓰면 애쓸수록

구두는 더 힘껏 가죽을 움츠린다

구두가 이렇게까지 고집을 부린 적은 없었다

나는 구두주걱으로 구두의 아가리를 억지로 벌려

끝내 구두 안에 발을 집어넣고야 만다

내 발이 주둥이를 틀어막자

구두는 벌어진 구두주걱 자국을 조용히 오므린다

소가죽은 제 안에 들어온 발을 힘주어 감싼다

 

풀벌레들의 작은 귀를 생각함 / 김기택

텔레비전을 끄자

풀벌레 소리

어둠과 함께 방 안 가득 들어온다

어둠 속에 들으니 벌레 소리들 환하다

별빛이 묻어 더 낭랑하다

귀뚜라미나 여치 같은 큰 울음 사이에는

너무 작아 들리지 않는 소리도 있다

그 풀벌레들의 작은 귀를 생각한다

내 귀에는 들리지 않는 소리들이 드나드는

그 까맣고 좁은 통로들을 생각한다

그 통로의 끝에 두근거리며 매달린

여린 마음들을 생각한다

발뒤꿈치처럼 두꺼운 내 귀에 부딪쳤다가

되돌아간 소리들을 생각한다

브라운관이 뿜어 낸 현란한 빛이

내 눈과 귀를 두껍게 채우는 동안

그 울음소리들은 수없이 나에게 왔다가

너무 단단한 벽에 놀라 되돌아갔을 것이다

하루살이들처럼 전등에 부딪쳤다가

바닥에 새카맣게 떨어졌을 것이다

크게 밤공기 들이쉬니

허파 속으로 그 소리들이 들어온다

허파도 별빛이 묻어 조금은 환해진다

다리 저는 사람 / 김기택

꼿꼿하게 걷는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그는 춤추는 사람처럼 보였다.

한걸음 옮길 때마다

그는 앉았다 일어서듯 다리를 구부렸고

그때마다 윗몸은 반쯤 쓰러졌다 일어났다.

그 요란하고 기이한 걸음을

지하철 역사가 적막해지도록 조용하게 걸었다.

어깨가 매달린 가방도

함께 소리 죽여 힘차게 흔들렸다.

못 걷는 다리 하나를 위하여

온몸이 다리가 되어 흔들어주고 있었다.

사람들은 모두 기둥이 되어 우람하게 서 있는데

그 빽빽한 기둥 사이를

그만 홀로 팔랑팔랑 지나가고 있었다.

 

 

산낙지 먹기 / 김기택

한 번도 죽음을 본 일이 없었기에, 죽으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지 못했기에, 죽음은 접시 위에서 살아 있을 때보다 더 격렬하게 꿈지럭거렸다. 죽으면 꼼짝 않고 있어야 된다는 걸 몰랐기에 제 힘과 독기를 모두 모아 거친 물굽이처럼 요동쳤다. 어찌나 심각하게 꿈틀거리던지 자칫하면 죽음이 취소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죽음엔 눈과 팔다리가 달려 있지 않았기에 방향도 없이 앞으로만 기어가다 저희들끼리 마구 엉켰다.

흰 접시는 마치 제가 죽기라도 한 것처럼 동그라미 안에서 빨판들을 물방울처럼 튀기며 거칠게 파도쳤다. 그러나 죽음이 달아나기엔 접시의 반경이 너무 짧았고 모든 길은 우스꽝스러운 꿈틀거림으로 열려 있었다. 토막 난 다리와 빨판들은 한 마리의 통일된 죽음이기를 포기하고 한 도막 한 도막 독립된 삶이 되어 접시 밖으로 무작정 나가려 했고, 씹는 이빨 틈에 치석처럼 달라붙어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씹을 때마다 용수철처럼 경쾌하게 이빨을 튕겨내는 탄력, 꿈틀거림과 짓이겨짐 사이에 살아 있는 죽음과 죽어 있는 삶이 샌드위치처럼 겹겹이 층을 이루고 있는 탄력. 한 번에 다 죽지 않고 여러 번 촘촘하게 나누어진 죽음의 푹신푹신한 탄력. 다 짓이겨지고 나도 꿈틀거림의 울밍이 여전히 턱관절에 남아 있는 탄력. 목 없고 눈 없고 손 없는 죽음이 터무니없이 억울할수록 이빨은 더욱 쫄깃쫄깃한 탄력을 받고 있었다.

송충이 / 김기택

 

아삭아삭 빛이 부서지는 소리

송충이가 솔잎을 갉아먹는다

나뭇가지인 줄 알고 송진이

송충이 혈관을 지나간다

부서진 빛이 송충이 내장 속에서

퍼진다 꿈틀거리며 간다

솔잎인 줄 알고 송충이 털 속으로

수액이 송충이 털 속으로 들어간다

선인장 가시처럼 뿌리내린

푸른 빛 속에 뿌리내린 송충이 털

내장인 줄도 모르고 섬유질 속으로

꽃인 줄 알고 털 끝으로 희고 가는 선 끝으로

 

/ 김기택

구멍의 어둠 속에 정적의 숨죽임 뒤에

불안은 두근거리고 있다

사람이나 고양이의 잠을 깨울

가볍고 요란한 소리들은 깡통 속에

양동이 속에 대야 속에 항상 숨어 있다

어둠은 편안하고 안전하지만 굶주림이 있는 곳

몽둥이와 덫이 있는 대낮을 지나

번득이는 눈과 의심 많은 귀를 지나

주린 위장을 끌어당기는 냄새를 향하여

걸음은 공기를 밟듯 나아간다

꾸역꾸역 굶주림 속으로 들어오는 비누 조각

비닐 봉지 향기로운 쥐약이 붙어 있는 밥알들

거품을 물고 떨며 죽을 때까지 그칠 줄 모르는

아아 황홀하고 불안한 식욕

 

나귀 / 김기택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다가

내가 같이 쳐다보자

안 그런 척 나귀는 슬쩍 눈을 돌렸다.

긴 인조 속눈썹을 단 여학생 같은 눈을

조용히 내리깔았다.

털가죽 속에서 흰 뺨이 붉어졌을 것이다.

희고 길고 가는 손가락들을

뭉툭한 발굽 어느 곳엔가 얼른 감췄을 것이다.

눈알 속은 넓고 넓어

하늘이 다 보일 것 같고

내장과 비린내와 부끄러움이 다 들킬 것 같은데

그 안으로 머리를 집어넣고 바닥까지 들여다봐도

아까 보았던 그 여학생은 없고

학교와 학원에서 하루 열여섯 시간을 견딘

무거운 책가방도 어디에 숨겼는지 보이지 않았다.

억센 등뼈와 딴딴한 근육과 거친 숨소리만

열심히 나귀를 견디고 있었다.

눈이 너무 커서 다 내리까는데

몇 분은 족히 걸린 것 같았다.

내가 쳐다보는 동안

나귀는 질긴 가죽 안에서 꿈쩍도 하지 않고

귀만 쫑긋 열어놓은 채 이렇게 말하고 있는 듯했다.

, 귀야.

 

국수행 전철에서 / 김기택

한낮에 국수행 가는 전철은 한산하다.

노인은 왜소한 몸으로 7인석 좌석을 다 차지하고 앉아

무가지 신문을 다 쌓아 놓고 보고 있다.

한쪽 다리를 좌석 위에 턱, 얹어 놓고

등을 옆으로 기대고 한껏 편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

자세가 편할수록 더 결리는 허리.

최선을 다해 다시 자세를 고쳐 앉아 보지만

삶은 여전히 바뀌지 않는다.

허리와 어깨는 10초 동안 편안한 척 하다가 다시 못마땅해진다.

하루 종일 타도 공짜이지만 다 탈 수 없는 전철들.

텅텅 비어 아무리 남아돌아도 다 앉을 수 없는 좌석들.

아무리 많이 버려져 있어도 다 읽을 수 없는 신문들.

에어컨이 질 좋은 찬바람을 공짜로 퍼주어도

짜증만 나는 쾌적함.

보는 사람 거의 없는 푸른 숲과 강이 차창 가득 지나가도

지긋지긋 하기만 한 아름다움.

보던 신문을 확 던져버리고 의욕적으로 새 신문을 펼쳐든다.

먼저 본 신문에서 다 본 기사들.

그 놈에 그사건에 그 인생...... 사이에,

반라의 모델 사진이 있다!

끊어질 것 같은 수영복 안에서 무언가가 계속 터지고 있다.

그의 허리가 민첩하게 진지해지고 성실해진다.

너무 정성껏 여자를 쓰다듬어 눈알에 지문이 생길 지경이다.

다시 허리가 아파오자 그것도 금방 지루해진다.

거의 드러눕듯이 앉아본다.

여기저기 쏘아보는 눈알들.

한때는 눈치 보는 것도 스릴이 있었지만

꽉 찬 지하철에서 여자들 틈에 끼어

간이 오그라들도록 도전적인 짓도 해봤지만

그런 재미조차 싫증난 지 오래다.

처치할 곳이 없어 전철에다 잔뜩 부려놓은 시간.

전철에서 내려도 갈 곳은 없지만,

전철이 아무리 빨리 달려도 느려터지기만 한 시간.

아까 팔당역이었는데 어째서 아직도 팔당역이란 말인가.

전철이 달리면 잠깐 흐르는 듯 하다가 멈추면 함께 정지하는 시간.

죽어라 밀쳐도 안 가는 시간.

고집스럽게 한 자리에만 앉아 늙기만 하고 죽지는 않는 시간.

 

오늘의 특선 요리 / 김기택

높은 바람과 구름을 타고 다니는 독수리 날개의 넓고 튼튼한 부력만을 골라 냉장 숙성시킨 후에 구웠습니다.

하루 중 가장 차갑고 맑은 시간에 터져 나오는 새벽닭의 힘찬 울음만을 엄선하여 바삭바삭하게 튀겼습니다.

시속 111킬로미터로 달리는 치타의 근육이 만들어내는 팽팽한 탄력만 가려내 담백하게 고았습니다.

발톱과 이빨이 간지러워 우는 고양이의 갓난아기 울음에서 애절한 눈빛만 솎아내 고소하게 볶았습니다.

수천 미터 밖 물살의 힘과 방향을 읽는 물고기 지느러미를 푹 끓여 고감도 감각만을 진하게 우려냈습니다.

두근거리는 토끼의 심장에서 연한 놀람과 어린 두려움을 떨림이 살아 있는 그대로 발라내 갖은 양념에 무쳤습니다.

주인을 향해 막무가내로 흔들어대는 개 꼬리에서 명랑하게 들뛰는 유전자만을 갈아 즙을 냈습니다.

씹지 않아도 녹아서 핏줄로 전율하며 스며드는 육질과 육즙의 싱싱한 발버둥만을 양념으로 사용했습니다.

 

울음 2 / 김기택

온몸이 얼굴을 쳐다보고 있다

온몸이 얼굴을 향해 몰려오고 있다

온몸이 녹아 눈에서 흘러나오려 하고 있다

떨림과 후들거림을 지나서 오고 있다

몸의 기운을 다 빨아들이며 오고 있다

심장과 허파를 가늘게 베며 오고 있다

뇌수에서 생각을 지우며 오고 있다

울음이 꽉 다문 입술을 찢고 나오기 전에

뺨과 목을 뚫어 입으로 만들기 전에

눈알에 금이 간다 시야가 깨진다

깨진 유리 조각들이 뺨으로 흘러내린다

몸 안의 것들은 세차게 흔들리지만

내장에 깊이 박힌 슬픔은 떨어지지 않는다

근육 속에서 주름 밑에서 눈물이 일어나

얼굴 가죽이 울퉁불퉁 들뜨고 있다

두개골을 뚫고 나오려다 막힌 울음이

몸 안을 다 돌아다니며 행패를 부리다가

손가락 발가락에서 마구 돋아나고 있다

마장동 도축장에서 / 김기택

아무도 생명과 음식을 구별하지 않는다네

뒤뚱뒤뚱거리던 걸음과 순한 표정들은

게걸스럽던 식욕과 평화스럽던 되새김들은

순서 없이 통과 리어카에 포개어 있네

쓰레기처럼 길가에 엎질러져 쌓여 있네

비명과 발버둥만 제거하면 아무리 큰 힘도

여기서는 바로 음식이 된다네

음식이 된다네 희고 가는 손들이 자르고

하루 세 번 양치질하는 이빨들이 씹을 음식이 된다네

해골이 되려고 순대와 족발이 되려고

저것들은 당당하게 자궁을 열고 나왔다네

마침내 알을 깨고 나와 생명이 되려고

통닭들은 노른자를 빨아들이며 커간다네

똥오줌 위에 흘린 정액을 밟고 들어가면

슬픈 눈동자들은 곧 음식이 되어 나온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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