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시와소금 신인상 시부문 당선작] 정종숙 이경옥
■경계 외 4편 / 정종숙
경계
어제와 오늘의 차이를
그 경계를 어떻게 구분 짓는지 모르겠지만
새해 덕담을 들으며 보신각 종소리를 들으며
새해 열차를 탔다
어두워지기 전 흐릿한 색채로 번지는 어스름
그 경계의 빛보다 더 애매한 경계들
내가 사는 집은 부천이고
집 옆 4차선 도로를 건너면 서울인 것도 갸우뚱한데
어제와 오늘의 경계
여기와 저기의 경계
너와 나의 경계
사랑과 사랑 아님의 경계
진실의 경계를 어떻게 그을 수 있나
차라리 경계의 안과 밖
그 언저리를 사랑하리라
서성거림과 의문,
풋풋함과 단단함,
때론 당돌한 도전을 머금은 언저리를
곡자
넌 변하지도 않니, 그런
말을 듣는 사람 같은 양복점
오래 붙여놓은 포스터처럼 간판은 바랬지만
어깨에 각이 잡힌 감색 양복에 자줏빛
넥타이를 맨 마네킹은 신사의 품격을 입고 서 있다
오래 써서 길이 든 가위와 줄자와 초크
시침핀이 놓여 있는 재단 대는 등짝이 넓다
몸에 맞는지 보기 위해 듬성듬성 시침바느질한
옷을 매만지고 있는 재단사에게는
요즘 시대 누가 양복을 맞춰 입냐는 말
가위로 자르고 시침핀으로 꽂아두었던
뚝심이 있다
디지털 시대에 필름 카메라 고집하는 사람처럼
손이 매만지는 옷감에 길들고 싶은 사람 있을 거라고
줄자의 눈금처럼 촘촘히 되뇌며
자신의 이름을 보증 수표처럼 박고
실패에 감긴 실만큼 마음 꿰맨다
양복 윗주머니에 꽂아놓은 행커치프*가
꽃으로 피어날 거 같은 한낮,
재단사는 자신을 닮은 곡자*를 따라
부러지지 않는 선을 그린다
*행커치프 : 멋을 내기 위하여 주머니에 꽂는 형형색색의 손수건
커피 내리는 동안
마음에도 어스름이 내릴 때 커피를 내립니다
물이 끓는 동안
원두 가루 서너 스푼 드리퍼에 넣고 커피잔을 고릅니다
물 끓는 소리 나고 김이 오르면
한낮의 소란 문밖으로 나가고
쓰다듬어 주고 싶은 책상이 앉고 싶은 의자가 문 열어줍니다
김 오르는 주전자 높이 들고 원 그리며 물 부으면
원두 가루 부풀어 오르며 커피 향이 퍼집니다
자기도 한 잔 마셔
곁에 있는 사람에게 향 나누고 싶어지고 문득 눈이 내립니다
원두가 가라앉길 기다리는 동안
구석에 밀어놓았던 생각들 끌러서 보니
엉켰던 생각들 실타래처럼 풀어지고
번득이는 영감도 찾아와 어깨 툭 치고 갑니다
머그잔 가득 내려진 커피
두 손으로 그러쥐고 따스한 온기 묻히면
연필 잡고 싶어집니다
이제는
너에게로 가는 길을 쓸 수 있을 것만 같습니다
주소 몰라도
길모퉁이 담배가게 지나
목련나무 있던 집 지나
어렴풋한 골목길 더듬어
너의 집을 찾을 수 있을 것만 같습니다
국수
국수를 먹을 때 나는 가난해집니다
삶은 국수에
달걀지단 양념간장 한 숟갈 얹고
맑은 멸치 장국 부어
김치 하나 놓고
국수를 먹을 때 나는 가난해집니다
선반 하나
이불 한 채 달랑 놓여 있는
선방에 들어온 듯
가지고 갈 것 없는 사람
더 바라는 것도 없는 사람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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