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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보상절, 월인천강지곡, 월인석보 해설, <석보상절, 월인석보의 서설>

작성자삼천세계|작성시간11.06.08|조회수2,808 목록 댓글 0

  

 

석보상절 해설 및 수양대군의 석보상절 서문

 

석보상절 해설

석보상절은 조선 세종(世宗) 28(1446) 3월에 왕비(王妃)인 소헌왕후(昭憲王后) 심씨(沈氏)가 죽자 그 명복을 빌고 대중을 불교에 귀의하도록 하기 위하여 당시 세종의 둘째 아들 수양대군(首陽大君 : 후에 世祖)에게 명하여 편찬한 석가모니의 가족과 그의 일대기(一代記)를 연대별로 상세히 엮은 불경(佛經)이다.

석보(釋譜)’는 석가의 일대기, ‘상절(詳節)’은 중요한 것은 상세히, 중요하지 않은 것은 생략한다는 뜻이다.

보물 제523호다.

 

<월인석보서(月印釋譜序)>에 의하면 (수양대군이) 중국 남제(南齊)의 승우(僧祐;444518)석가보(釋迦譜)와 당()의 도선(道宣;596667)석가씨보(釋迦氏譜)를 합하여 석보상절을 편찬하는데 참고하였으며, 동년 12월에는 김수온(金守溫)으로 하여금 석가보(釋迦譜)를 증수(增修)하도록 하였다.

 

증수석가보(增修釋迦譜)는 석가보와 석가씨보를 토대로 하여 여기에 법화경(法華經), 지장경(地藏經), 아미타경(阿彌陀經), 약사경(藥師經등 여러 경전을 더하여 석가의 일대기를 우리나라 나름대로 엮었다.

 

석보상절증수석가보(增修釋迦譜)를 바탕으로 이듬해인 세종 29(1447) 7월에 정음(正音;訓民正音))으로 번역된 최초의 한글 산문체 문학작품이다.

 

수양대군이 주재(主宰)하고 안평대군과 신미(信眉) 스님, 승문원(承文院) 교리(校理) 김수온(金守溫) 등의 도움을 받아 편찬하였다.

 

세종 29(1447) 7월부터 늦어도 세종 31(1449) 2월 사이에 초주 갑인자(甲寅字)로 간행되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간행 연대는 확실치 않으나 수양대군의 석보상절서(釋譜詳節序)가 세종 29년으로 되어 있고, 9의 표지 안에 정통142월초4일 가선대부 황해도도관찰출척사겸해주목신신(正統拾肆年貳月初肆日 嘉善大夫黃海道都觀察黜陟使兼海州牧臣申)”이라고 쓴 간기(刊記)가 있어 1447(세종 29)에서 1449(세종 31) 사이에 간행된 것으로 추정된다.

 

편찬순서는 팔상도(八相圖)도솔래의(兜率來儀 : 석가가 도솔천에서 내려옴)비람강생(毘藍降生 : 룸비니 동산에서 태어남)사문유관(四門遊觀 : 사대문으로 나가 봄)유성출가(踰城出家 : 성을 넘어 출가함)설산수도(雪山修道; 설산에서 도를 닦음)수하항마(樹下降魔 : 나무 밑에서 악마의 항복을 받음)녹원전법(鹿苑轉法 : 녹야원에서 설법함)쌍림열반(雙林涅槃 : 쌍림에서 열반에 듦)으로 되어 있다.

 

<석보상절>은 한국 최초의 번역불경이라는 점에서 높이 평가될 뿐 아니라, 당시의 불교를 조직화한 것으로 조선 초기의 불교학 수준을 말해 주며, 국문으로 된 최초의 산문작품으로서 다른 불경 언해서(諺解書)의 문체와는 달리 그 문장이 세련되고 유려(流麗)하여 후대의 산문과 소설에 전범(典範)이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풍부한 어휘와 이에 따른 어법음운표기법 등은 15세기 중엽의 국어연구 및 한자음 연구에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며,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과 함께 최초의 국문활자본이라는 점에서도 서지학적(書誌學的) 가치가 크다.

최초의 번역불경이며, <월인천강지곡>과 함께 국문활자본이라는 점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 책의 분량은 현전하는 권24의 내용으로 미루어 모두 24권이었을 것으로 짐작되는데, 현재 초간본은 권69131923246책이 전하고 있으며 복각된 중간본도 권3112책만 전한다.

6913194(보물523)은 초간활자본으로 국립중앙도서관에, 23242책은 초간활자본으로 동국대학교 도서관에, 111책은 16세기 중엽의 중간목판본으로 1959 임휴사(臨休寺) 주지 원현(元玄) 속가(俗家)에서 발견되어 영남대학 심재완(沈載完교수에 의해 발견되어 현재 호암미술관에 소장하고 있다.

31책은 중간목판본으로 1979 아주대학 천병식(千炳植교수가 소장하고 있다.

 

6·9·13·191955년 한글학회에서한글 (통권(通卷) 111121호의 부록으로 15회에 걸쳐 영인하여 실었고, 111959년 어문학회(어문학자료총간(語文學資料叢刊))에서, 23·241967년 동악어문학회에서 영인했다.

 

12는 초간본으로 갑인자(甲寅字)로 찍었는데, 1에는 권수(卷首)교정(校正)’의 주인(朱印)이 찍혀 있고, 책 속에서 잘못 식자(植字)한 것, 또는 초고에서 잘못된 것으로 보이는 것을 교정하여 난외에 정오를 표시한 것이 보여 교정본임을 알 수 있다.

 

3은 갑인자의 복각본이다. 복각한 사실에 대해서는 1495(연산군 1) 성종의 명복을 빌기 위해 내탕금을 가지고 여러 가지의 불서(佛書)를 간행했는데, 그 가운데에 석보상절20부가 들어 있음이 선종영가집(禪宗永嘉集)반야심경언해(般若心經諺解)에 붙은 학조(學祖)의 발문에 나타나므로, 혹 연산군 원년에 간행된 것이 아닌가 짐작되기도 한다.

 

 

 

석보상절 서(釋譜詳節 序)

 

석보상절 서 :

(()는 글을 만든 뜻을 자세(子細)히 써 후인(後人) 사람에게 알으키는 것이라.)

 

부처님()은 삼계에서 가장 높은 분으로서 중생(衆生)을 널리 제도(濟渡)하시니 무량(無量) 공덕(功德)이 그지 없어 못내 헤아릴 수 없이 공(功)과 덕(德)으로 인천(人天)이 능히 다함없이 찬탄하느니라.

인간 세상에서 부처님의 도리를 배우는 사람들에게 부처님께서 출생하신 곳과 종신((終身)하신 곳의 출처를 선명하게 알리노라

 

비록 부처님의 도리를 배우고자 하는 사람들은 많아도 역시 팔상(八相)을 넘지 못하고 중지하느니라.근간(近間)에 여러 가지 일어난 일로 인하여 추천(推薦:죽은 사람에게 공덕을 베풀어 명복을 비는 일)을 겸하여 여러 경에서 가려내어 각별히 한권의 책을 만들어 "석보상절"이라 이름 하였노라.

이미 언문이 만들어 졌으니 차제에 언문에 의거하여 만들고 세존께서 成道(성도)하신 것을 그림으로 그려서 시초와 종신하신 곳의 자취를 넣어 놓았다.또한 정음(正音)으로 번역하고 해설을 더하여 만들어 놓았으니사람마다 쉽게 깨달아 삼보(三寶)에 귀의하여 소망을 이루기를 바라노라

 

註解(주해):

* 三界(삼):色界(색계),欲界(욕계),無色界(무색계)이며

 

* 八相(팔)은 부처님께서 일생 동안 겪으신 일이다즉 첫째,兜率來儀(도솔내의:도솔천에서 내려 오신 뜻과

둘째,毘藍降生(비람강생:람비니에서 탄강하여 출생하신 일,

셋째,四門遊觀(사문유관:사문을 거닐며 관찰하신 일,

넷째,逾城出家(유성출가:유성을 넘어 출가하신 일,

다섯째, 雪山修道(설산수도:설산에서 불도를 수행하신 일,

여섯째, 樹下降魔(수하항마:보리수 나무 밑에서 악마를 항복 시킨일,

일곱째,鹿苑轉法(녹원전법:녹야원에서 설법하신 일,

여덟째,雙林涅槃(쌍림열반:쌍림에서 열반하시고 중지하신일을 八相(팔상)이라 하느니라

 

* 釋譜詳節(석보상절)이라 이름 지은 것은 ()은 석가모니 부처님이시고, ()는 평생의 계보이며, ()은 시초에 탄강하시여 종신하실때 까지 설법하신 것을 상세히 쓴다는 것이고, ()은 중요하지 아니한 말은 덜어서 쓴 글이란 뜻이다

 

* 三寶(삼보)佛法僧(,,)이다佛寶(불보)는 자신을 깨달아 부처가 되어남도 깨닫게하여 인간 세상을 널리 이롭게 함으로세상의 귀중한 보배와 같으며

法寶(법보)는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법은 소중하여 세상의 보배와 같으며

僧寶(승보)佛法(불법)을 전수하는 스님이다스님은 중생들에게 善根(선근)을 심어서 善行(선행)하여 복밭이 됨으로 스님은 보배와 같은 것이다

正統 十二年 七二十五日 首陽大君 諱序(정통 12725일 수양대군 휘서)< 세종 29년이며 서기 1447년임 >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 1447년에 세종의 왕명에 따라 수양대군(首陽大君) 소헌왕후(昭憲王后) 명복을 빌기 위하여 <석보상절(釋譜詳節)> 지어 올리자 세종(1397-1450 재위1418-1450) 석보상절을 독송하신 후 감흥하시여 석가(釋迦) 공덕(功德) 창작하여 찬양한 찬불가(讚佛歌) 불교 문학의 정화(精華)이다.

달이 천개의 강을 비춘다는 의미로서 달은 부처, 강은 백성을 뜻한다.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 함께 훈민정음으로 표기된 한국 최고(最古) 가사(歌詞)이다.

용비어천가와 쌍벽을 이루는 대표적 악장(樂章문학이며 최대의 운문 서사 문학이다

용비어천가와는 달리 찬불가(讚佛歌)이므로 궁중 음악에서는 사용 안 되었다.

그러나 왕의 측근이었던 김수온(金守溫) 왕명을 받들어 지은 것이라는 이설(異說) 있다

보물 398호로 지정

 

<월인천강지곡>이란 명칭은  협주를 통하여   있는데, '달이  세계를 비추는 것처럼 넓고  석가의 공덕을 찬송한 노래'라는 뜻이다

 노래의 간행 연대는 확실치 않으나대개 <석보상절> 같은 시기인 세종 29(1447). 완성되어 세종 31(1449이전에 간행된 것으로 본다

 

<월인천강지곡>은 상권만이 전하다가 1961 진기홍(陳錤洪) 의하여 발견되어 3권으로 되어 있었음이 확인되었다.

현재 상권의 초간본 만이 전하여지는데 수록 작품은 모두 194장으로 이로 미루어   전편(全篇)580 장 내외의 노래가 수록되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962년에 통문관(通文館) 신구문화사(新丘文化社)에서 각각 영인본을 간행하였다

또한1995 12 발견  <월인석보(月印釋譜)> 25 새로운 <월인천강지곡>  7수가 수록되었음이 확인되었다

 

 

 

<월인석보(月印釋譜)>

 

1459(세조 5) 세조가 세종이 지은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을 본문으로 하고 자신이 지은 <석보상절(釋譜詳節)>을 설명 부분으로 하여 합편한 불경(佛經)이다. 목판본이다.

세조를 도와 이 책의 편찬에 참여한 사람은 신미(信眉수미(守眉홍준(弘濬학열(學悅학조(學祖김수온(金守溫) 등이다.

<석보상절>로 미루어 모두 24권으로 추정되지만, 지금 전하고 있는 것은 중간본까지 합쳐도 완질(完帙)이 되지 못한다.

편찬 동기는 위로 부모 선가(仙駕)를 위하고 아울러 망아(亡兒)를 위하는 일’(월인석보서)이라고 하지만, 어린 조카 단종을 몰아내 죽이고 왕위에 올라 사육신 등의 많은 신하들을 죽인 뒤 겪는 고통에서 벗어나 구원을 얻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수양대군((世祖, 1417929~146898, 세조 재위 1455~1468)이 등극하기 전후의 엄청난 비극적인 사건은 잘 알려져 있는 것처럼, 계유정난(癸酉靖難)(1453, 단종 110)으로 반대 세력을 제거하여 왕권 접수의 발판을 삼고, 단종 3년 윤6(1455)에 즉위하며, 이듬해(1456) 6월에 사육신(死六臣)의 처결 및 단종의 영월 유배, 10월 금성대군(錦城大君)의 사사(賜死)와 급기야 단종이 자액(自縊)함으로써 일단락되었으나, 이 와중에 왕세자 도원군(桃源君)이 요절하는 역리지통(逆理之痛)을 겪기도 하였다.

이런 일련의 비극으로 세조의 인간적인 번민과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컸을 것이고, 그 자신 독실한 불교 신자였으므로 참회와 속죄의 감정 또한 말할 수 없이 더 했을 것이다.

 

세조는 세조 3(1457) 9월에 도원군(桃源君)이 서거하자 그의 영가 추천을 위해 여러 경전을 묵서 또는 인출한 후에 월인석보의 편찬 간행에 착수하였다.

 

세조는 이 책을 편찬하는 동안 침식을 잊고 이 일에 몰두하였으며, 세조 4(1458) 2월 신축(辛丑)에는 정인지가 월인석보간행에 대한 부당함을 언급하자 분노하여 연회를 파하기도 하였다.

 

세조 5(1459) 2월에는 김수온(金守溫)과 성임(成任)월인석보를 선사(繕寫)한 공로로 승진하였으며, 동년 7월에는어제월인석보서문(御製月印釋譜序文)’이 이루어졌다.

 

월인석보1·22책은 초판 교정본이며, 1권 첫머리에世宗御製訓民正音(세종어제훈민정음)’이라는 표제하에 국역본 훈민정음이 나온다.

 

이는 모두 15장의 내용으로 완결되고 있다. 바로 이어서 팔상도가 나오는데, 1장 양면이 1판씩 1폭을 이루고 있다.

 

도솔래의, 비람강생, 사문유관, 유성출가, 설산수도, 수하항마, 녹원전법, 쌍림열반의 순서인데, 쌍림열반의 1장은 잘려나가고 없다.

 

이어서御製月印釋譜序文(어제월인석보서문)''御製釋譜詳節序文(어제석보상절서문)’이 제시되고, 한 장의 비석원형이 들어 있다.

 

이어 월인석보 권1의 본문이 52장까지 전개되고 있다.

 

2는 총 77장이다. 판식은 사주쌍변, 유계, 716, 주쌍행 대흑구, 상하내향흑어미이다.

1석가보(釋迦譜)1‘석가현겁초성구담연보(釋迦賢劫初姓瞿曇緣譜)’ 2에서 발췌한 것으로, 석가 과거세의 전생담인 도솔래의에 해당한다.

 

2'석가탄생연기(釋迦誕生緣起)' 중국불교시전유래(中國佛敎始傳由來)’의 내용이다.

 

이는 석가족의 기원과 석가의 탄생담으로 비람강생 부분이며, 2의 뒷부분에는 중국에의 불교전래 사실을 언급하고 있다. 이들 2책은 서강대 인문과학연구소에서 1972에 영인되었다.

 

권말에는 정찬연의 월인석보 제1·2(月印釋譜 第一·)의 해제가 들어 있다.

 

 

御製 月印釋譜 序(어제 월인석보 서문)

진실의 근원은 ()하고

性智(성지)는 맑고 고요하며

부처님의 신령스러운 광명은 유독 빛나고

법신은 항상 상주하여도 색상을 능히 없이 하여

이미 生滅(생멸)이 없으니 어찌 가고 옴이 있으리요

다만 망령스러운 마음이 문득 일어나

의식이 경거망동하여 무량한 경계를 일으켜 인연을 만들고 있느니라

집착은 業報(업보)에 메이어 진실의 ()은 늘 긴밤처럼 어둡고

지혜의 눈은 永劫(영겁)에 멀어六道(육도)의 윤회에서 잠시도 머물지 못하고

八苦(팔고)에서 능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나

우리 如來(여래)님의 미묘한 眞身(진신)

맑고 깨끗하여 항상 상적광토에 상주하시느니라

본래 無緣慈(무연자)하시나 悲願(비원)의 신통력을 나타 내시며

하늘의 염부에서 내려 오시어 正覺(정각)을 이루는 법을 보여 주셨느니라

석가모니 부처님의 이름이 毗盧蔗那(비로자나)이시고

부처님께서 상주하시는 땅의 이름을 常寂光土(상적광토)라 하며

명호는 天人師(천인사)라 하며 일체지라 칭하셨느니라

큰 위엄으로 광명의 빛을 펼쳐 악마의 군사를 물리치시고三乘(삼승)을 크게 열으시여 八敎(팔교)를 널리 강연하시니 말씀마다 미묘한 뜻이며

 

설법하시는 구절마다 항하사 법문으로

해탈에 이르는 문을 열으시어 淸淨法海(청정법해)에 들게 하셨느니라

인간과 天人(천인)을 구제하시고

四生(사생)을 구제하시여 제도하신 공덕을 어찌다 기릴수 있으리요

天龍(천용)의 서원을 유통하시고

국왕들이 부탁하고 위촉을 받들어 옹호하여 주셨던 것이니라

丙寅(병인)년에 昭憲王后(소헌왕후)께서 영양을 일직 잃어버리시고는

서러워 슬퍼하시며 할 바를 알지 못하고 있을 적에 세종대왕께서 나에게 말씀하시기를

죽은 아이에게 명복을 빌어 주는 것은 불경을 만드는 것 보다 더 큰 공덕은 없을 것이니

너가 釋譜(석보)를 번역하여 만드는 것이 마땅할 것이니라 라고 말씀하셨다

내가 慈命(자명)을 받고서 더욱 생각이 넓어져僧祐(승우)道宣(도선)과 두 律師(율사)가 각각 釋譜(석보)를 만들어 놓은 것을 읽어 보았더니 간략하고 상세하지 못하기에 두 책을 아울러서釋譜詳節(석보상절)을 만들고 正音(정음)으로 번역하여

사람마다 쉽게 알 수 있도록 만들어 세종대왕에게 進上(진상)하였더니

읽어 보시고 찬송하시며 月印千江之曲(월인천강지곡)이라 이름 하셨다

이제 와서 세존님을 받들게 되었으니 어찌 늦지 않으리요

근간은 가정에 재앙을 만나 맏아들이 일찍 죽고 없으니

부모의 정은 天性(천성)에 근원한지라 슬픈 마음은 오래가져 편안하지 못하였다

내가 생각하여 보니 三途(삼도)受苦(수고)를 열고 괴로움에서 벗어나고자 한다면

佛道(불도)를 버리고 어디에 의지 하리요.

轉法(전법)의 뜻을 해설한 책은 비록 많이 있으나月印釋譜(월인석보)를 생각하면

우리 先考(세종)님이 지으신 것이라

몇 오랜 세월이 흘러 지나도 낙엽이 지는가을이 되면 더욱 애닯고 슬퍼지노라

우러러 존경하셨던 상왕님을 추모하면서

생각하여 보면 이 일을 먼저하는 것이 부모님에게 효도하는 일이라만 가지의 政事(정사)도 비록 많았으나 먼저 책으로 저술하는 것이 우선하는 것이라 생각하고, 어찌나 한가한 시간도 없이 寢食(침식)도 잊으면서 밤낮도 없이 연일 궁리하였느니라

위로는 돌아가신 부모님을 위하고 겸하여 죽은 아들을 위하여

지혜의 구름을 타고 모두는 번뇌에서 속히 나와 곧 바로 自性(자성)을 깨달아

覺地(각지)()하기 위하여 옛 舊卷(구권)에서 정성껏 연구하고 강론하여

잘못된 것은 고쳐서 가다듬고 첨가하여 새로 편집하여 12부의 修多羅(수다라)에서 넣고 빼고 하되같은 내용의 양구절은 버리고 가려서 취하고 온 마음을 다하여 의심 나는 곳이 있으면

반듯이 博識(박식)한 사람에게 資問(자문) 하였느니라

資問(자문)한 사람은慧覺尊者(혜각존자) 信眉(신미)判禪宗事(판선종사) 守眉(수미)判敎宗事(판교종사) 雪峻(설준)衍慶寺住持(연경사주지) 弘濬(홍준)前檜菴寺住持(전회암사주지) 曉雲(효운)前大慈寺住持(전대자사주지) 智海(지해)前逍遙寺住持(전소요사주지) 海招(해초)大禪師(대선사) 斯智(사지)學悅(학열)學祖(학조)嘉靖大夫同知中樞院事(가정대부동지중추원사) 金守溫(김수온)등이다

현묘한 근원을 탐구하여 가다듬어 놓았으니

一乘(일승)의 미묘한 뜻을 살펴 연구하고

도리를 수행하여 만법의 근원을 疏達(소달)하여 주기 바라노라

문자의 글이 ()이 아니며 경이 부처가 아니다

도리를 말씀하신 것이 경이며 도리로 몸 삼으신 것이 부처님인 것이니라

이 경전을 읽는 사람은

광명의 빛이 자연히 돌아와 귀하게 될것이니라

목적을 이루기 위한 방편으로 비유하여 말씀하시기를

물고기를 잡고 나서는 그 물고기에 마음이 쏠리면

통발을 잊는다는 뜻과 목적을 이룬 뒤에 그것을 위하여 공이 있던 것을 잊어버린다는 뜻으로 得魚忘筌(득어망전)이란 문자도 있느니라

손가락에 집념을 두면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만 쳐다보고

달은 볼수가 없다는 뜻이 있듯이

이것을 이름하여 모두다 경문에 붙들린 병이라 하셨다

西天(서천)의 글자로 만든 경전이높이 쌓여 있어도 보고 싶은 사람이 독송하려면

오히려 어럽게 여겨서 우리나라 글로 번역하여

널리 배포하노니 사람마다 듣고 얻어서

읽고 외워 우러러 존중하기를 앙망하노라

고로 종친과 재상과 공신과 아울러 백관과 四衆(사중)은 발원하여

전법이 썩지 않도록 바라며 본성의 덕을 무량히 심어 신의 가호로 국가는 확고히 안정되고

백성은 안락하여 태평하고 해마다 풍년이 들어와 복이 되어 재앙은 소멸되고 廻向(회향)하여 수행의 공덕을 실제로 이루어 일체의 有情(유정:중생)은 속히 菩提(보리)의 깨달음을 얻어 저 피안의 언덕으로 속히 들기를 원하노라.

天順 三年 己卯 七月 七日 首陽君 諱序<천순3년 기묘 77일 수양군 휘서><세조 5년 서기 1459>

 

 

석보상절, 월인석보의 서설

<석보상절>은
훈민정음이 창제된 이후 세종대왕의 자명을 받은 수양대군께서
세종 28년(서기 1446년)에 세종의 비(妃)인 소헌왕후(昭憲王后)가 세상을 떠나자 그 명복을 빌기 위하여 세종 29년(서기 1,447년)에 석가모니 부처님의 일대기를 연대별로 상세히 엮도록 명한 불경입니다

<월인천강지곡>은
세종대왕께서 석보상절을 독송하신후
감흥하시여 석가모니 부처님을 찬양한 노래 가사이며
세종대왕님이 친히 585곡 정도 창작하신 것입니다

 

<월인석보>는
세조 4년(1,495년)에 <월인천강지곡과 석보상절>을 합하여 간행한 불경 입니다 



<석보상절과 월인석보>의 원문은
한글의 고어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될뿐 아니라
우리 나라의 한글로 만든 최초의 불교 경전입니다

<석보상절>은
본래 총 200여권을 출판하였으나 그 본문은 많이 유실되고
현재 석보상절,9,11,13,19,23,24권과
월인석보 제 1,2,7,8,9,10,17,18권의 약 15권 정도 보존되어 전래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최근에 월인석보 제 15권권이 발견되었다 하였습니다

현재 번역된 <석보상절과 월인석보>는
한글의 古語(고어) 탐구에 목적을 두고 원문에 집착하여 해설하였기 때문에
한글의 고어 탐구에는 도움이 되지만 佛經(불경)의 뜻을 습득함에는 복잡하고 難解(난해)하여
독자는 이해 하기에 매우 어렵게 번역되어 있었습니다



佛經(불경)은
다른 종교 경전과 달리 그 분량이 엄청나게 방대하고 그 뜻 또한 심원하여
어느 경전이 부처님의 참된 모습이며 무엇이 불교의 宗旨(종지)인지 분간하기 매우 어렵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본서는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인간 세상과 최초 현겁시대의 이름인 瞿曇(구담)에서 시작하고 있습니다.


釋迦賢劫初姓瞿曇綠譜(석가현겁초성구담록보).
釋迦子羅云出家錄譜(석가자라운출가록보)
釋迦降生種種成佛錄譜(석가강생종종성불록보)
釋迦祇洹精舍綠記(석가기원정사록기)
阿那律拔提出家綠記(아나율발제출가록기)
佛弟難陀出家綠記(불제난타출가록기)
佛說觀佛三昧海經(불설관삼매해경)
龍王羅刹歸佛綠記(용왕나찰귀불록기)
鳩摩羅什譯佛說阿彌陀經(구마라집역불설아미타경)
佛說無量壽經韋提希夫人滿願綠記(불설무량수경위제희부인만원록기)
玄奬譯藥師琉璃光如來本願功德經(현장역약사유리광여래본원공덕경)
釋迦父淨飯王泥洹記(석가부정반왕니원기)
釋迦姨母大愛道出家記(석가이모대애도출가기)
龍王宮說法綠記(용왕궁설법록기)
釋迦昇 利天爲母說法(석가승도리천위모설법)
地藏菩薩本願經(지장보살본원경)
優塡王造釋迦 檀像記(우전왕조석가전단상기)
波斯匿王造釋迦金像記(파사익왕석가금상기)
忍辱太子傳(인욕태자전), 鹿母夫人傳(록모부인전)
法華經(법화경)
阿育王弟出家造釋迦石像記(아육왕제출가조석가석상기)
釋迦雙樹輕涅槃記(석가쌍수경열반기)
釋迦八國舍利記(석가팔국사리기)
釋迦天上龍宮舍利寶塔記(석가천상용궁사리보탑기)
阿育王造八萬四千塔記(아육왕조팔만사천탑기)등이 모두 수록되어 있습니다.

이 한권의 본서는 부처님께서 설법하신 경을 연대별로 상세히 기록되어 오늘날 사용하고 있는
佛紀(불기)의 오류를 바로 잡음은 물론 다른 어떠한 불경 보다도 석가모니 부처님의 참모습과
불교의 정법을 올바로 발견할수 있을 것입니다

즉 석가모니 부처님은
중국의 昭王(소왕) 26년 甲寅年(갑인년:기원전 1,027년) 4월 8일날 탄강하셨습니다.

고로 서기 2,000년은
佛紀(불기)로 3,027년이 됩니다

그리고
석가모니 부처님에 대한 일반적 상식은 인도의 정반왕 아들로 태어나시어

29세에 출가하여 6년간 고행하시여
35세에 득도하고 49년간 중생을 구제하시고
80세에 열반하신 것으로 세상 사람들은 인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석가모니 부처>님은
이미 무량 아승지겁전에 부처가 되어 수시로 천상과 지상을 왕래하며 천인과 인간을 교화하셨던 것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사람이 가장 두려워하는 <생사 문제를 해결한 성인>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생사 문제를 해결>한 성인이라면
어찌 죽음이 있겠습니까.........?

역시 약 2,000년 정도 인간세상에서
중생을 교화하신 역사적 증서가 전래하고 있어야
헛된 거짓말이 아니고 진실한 말씀으로 믿게 될 것입니다

즉 인간 세상에서
석가모니 부처님의 최초 이름은 瞿曇(구담)이며 묘광보살,상불경보살로
또 한때는 파세기왕이 되어 佛畵(불화)도 직접 그려 8만 4천 나라에 나누어 보시 하셨던 것입니다.

한때 인도(남해)의 정반왕 아들로 태어나 80세에 열반하시고 그후 1천년이 지난
後漢(후한) 明帝(명제:서기 227년)시대에 지상에 강림하시여 중생을 교화하셨던 것입니다

또 한때는 중국의 北魏(북위) 義熙(의희) 14년(서기 419년)에
覺賢(각현)이란 이름으로 인간 세상에 출현하여
佛經(불경)을 번역한 鳩摩羅什(구마라집:서기 344-413 년)이
長安(장안)에 있다는 소문을 듣고 즉시 찾아가 만났습니다.

당시 구마라집은
空論(공론)의 法相(법상)을 발표하여 장안에서 이름이 많이 떨치고 있었으나
심오한 微粒子(미립자)의 세계에 대한 뜻을 많은 부분에 오류 해석되어 <구마라집>이
無(무)에 대한 空法(공법)을 그릇되게 알고 번역한 불경을 올바로 깨우쳐 주기도 하셨습니다

또한 沙門(사문) 法業(법업) 慧嚴(혜엄)등 백여사람과 함께 梵語(범어)로 전래한 불경을
중국의 道場寺(도장사)에서 한손에 梵文(범문)을 잡고 漢文(한문)으로 번역 작업을 마치고
불경을 출판하신 일도 있었습니다

또 한때 석가모니 부처님은
僞秦(위진) 弘治(홍치) 4년(서기 402년) 2월 8일에
釋玄高(석현고)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출현하여

北魏太武帝(북위태무제)인 拓跋燾(척발도)에 의해
僞太平七年(위태평7년:서기 446년)에 迦葉原(가섭원)의 鷲頭山(취두산)에서 天竺國(천축국)의
竺乾太子(축건태자) 석가모니 부처님의 聖身(성신)을 독살하여 갑자기 돌아 가시게 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진실을 세상 사람들은 누구나 믿을수 없겠으나

한국의 후손중에서 이 사실을 증명 할만한 근거를 찾은 사람은
반듯이 진실을 만천하에 밝혀 공표하라는 뜻을 마치 <암호문>과 같은 구절이

<역대고승비문고려편 1>의
康津無爲寺先覺大師遍光塔碑文(강진무위사선각대사편광탐비문)에 명확히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이와 같이 석가모니 부처님은 부처나 국왕이나 또는 성인으로 또한 보살로 때로는 보통 사람으로
또는 심지어 외도의 장이 되어 세상 사람들을 교화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석가모니 부처>님은
한나라의 민족을 위하여 교화하신 성인이 아니라
세계의 전인류를 위하여 널리 교화하시여 세상에서 가장 존경 받은 세존이라 불렀습니다

또한 오고 감이 자유자재하여 如來(여래)라 불렀습니다.

역시 부처님은 무려 2천년 이란 오랜 세월로 수시로 인간 세상에 출현하여 우매한 중생들의 지혜를
깨우치게하고 아울러 인과응보법을 만들어 인간 세상을 널리 교화하심으로서 야수와 같은
속성의 사람은 비로소 善根(선근)이 심어졌고 사람들은 도리를 깨우치게 되어
비로소 인류의 문명이 발달 되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사실을 현세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믿을수 없을 것입니다.

세종대왕은 석보상절을 독송하시고
감흥에 젖어 직접 지은 월인천강자곡에서
<석가모니 부처>의 大慈悲(대자비)로 인류에게 베푸신 공덕은 전세계의 인류가
아무리 찬탄하여도 그 큰 공덕은 이루 다 헤아릴수 없느니라 라고 극구 찬양하셨던 것입니다

또한 세종대왕은 석가모니 부처님을 모신 佛殿(불전)을 大雄殿(대웅전)이라 명명하였던 것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을 모신 佛殿(불전)을 大雄殿(대웅전)이라 명명한 나라는 세계에서 오직 한국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한글은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지으신 梵語(범어)에서 비릇되었던 것입니다

역시 석가모니 부처님은 우리 나라와 인연이 제일 많았기 때문에 세종대왕은 범어(한글)를
우리나라의 국어로 사용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셨습니다

그리고 西域(서역)이란
중국에서 보아 서방 지역으로서 중앙 아시아 뿐만 아니라
현재의 이란 파키스탄 인도까지 포함하고 있습니다

즉 燉煌(돈황)의 서쪽과 동 파키스탄 서쪽의 파밀 高原(고원) 남은 곤륜산맥 북은 천산산맥이
둘러싸인 타림 盆地(분지)로서 중앙에 <타구라 사막>이 있고 西域諸國(서역제국)은
남북으로 나누고 동서로 길게 분포되어 있었다 라고 <불교사전>에서 西域(서역)의 국경이라 하였고
현재도 중국의 서쪽 지방에 西域(서역)이란 지명이 아직도 地圖(지도)에 明記(명기)하고 있습니다
이 지역이 곧 桓國(환국)이라 사료 됩니다.

즉 몽고와 말갈국과 중국의 전국토는 물론 전세계에 9주를 설치한 고조선과 삼한시대의
삼국 역사를 탐구하여 보면 곧 혁거세와 고주몽성제는 석가모니 부처님과 동일한 성인이란
역사적 진실을 깨달을수 있는 것입니다

<삼국사기>를 편집한 김부식 공은 혼돈하여 누구가 불교의 창시자인지 알수 없다 하였고

<삼국유사>를 편집한 일연 국존은 <고주몽은 석가모니>와 흡사하다 하였습니다.

高朱蒙聖帝(고주몽성제)와 高陀摩(고타마) 석가모니 부처님은 동일한 성인이였으나
후세의 사람들은 왜 혼돈하게 되었을까 간략히 요약하면 고구려는 강대국이었습니다

고주몽성제께서 佛敎(불교)를 창시하셨으나 후세에 이르러 道敎(도교)가 파생되어
神仙術(신선술)로 인한 여러 폐단도 많았던 것입니다.

또한 儒敎(유교)를 통치에 악용하면서 抑佛崇儒(억불숭유) 정책에 의하여 불교의 僧徒(승도)를
무참히 참살시켜 불교를 말살시키려한 사건이 수차례 이었습니다.

고로 우매한 중생들의 지혜를 깨우쳐 인간다운 문명의 시대를 시초로 펼치신 성인이 계신
西域(서역)을 심지어 오랑케 胡字(호자)로 胡僧(호승)이라 비하하였던 것입니다

더욱 후세에 고대사를 자주 焚書(분서)한 사건과 특히 3국(고구려,백제,신라)이 멸망한 이후
무려 1000여년의 오랜 세월로 남의 나라에 지배를 받았으니 어찌 민족의 자존이 살았겠으며
성인을 숭상 할수 있었겠습니까? 또한 중국은 고대사를 모두 捏造(날조)하여 한국의 성인 선조를
마치 자국의 성인으로 변조하고 이미 東夷傳(동이전)을 별도로 만들어 후세에 전래한
고대 사서로 인하여 한국의 후손은 역사적 진실을 더욱 알수 없는 결정적 事由(사유)라 할수 있습니다

이 석보상절을 저술할 조선시대만 하더라도 우리 나라는 물론 다른 나라도 유교가 흥성하여
불교를 신봉할수 없는 시대에 儒生(유생)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세종대왕은 <환웅천왕과 석가모니 부처님>은 동일한 성인임을 감지하시고 불교를 숭상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열반하시고 아육왕이 8만4천탑을 閻浮提(염부제)와 지상에 설립하였는데
그 탑이 震旦國(진단국)에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현재 우리 나라 전라도의 天冠山(천관산)과 강원도의 금강산등에 그 탑이 남아 있으며
부처님의 두골과 가사(옷)을 비릇 眞身舍利塔(진신사리탑)도 우리 나라의 여러 곳에 많이 있습니다.


"천하에 역사적 진실을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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