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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차 Ⅰ. 머리말 Ⅱ. 편찬 간행의 경위 Ⅲ. 판본에 대한 고찰 1. 활자와 판식 2. 교정본의 문제 Ⅳ. 맺음말 ※참고문헌 훈민정음 창제 당시의 대부분의 문헌은 언해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 중 불경 언해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석보상절은 15세기 정음 문헌 가운데서도 그 문체가 자연스러움을 보여 주는 자료로 일찍부터 인식되어 왔다. 그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15세기 국어의 연구에서 이 자료가 가지는 국어학적 가치는 어느 다른 자료에 비해서도 결코 뒤지지 않는 것이었다. 또한 비슷한 시기에 간행되었던 용비어천가, 월인천강지곡에 비해서 전체 분량 면에서도 서로 구별되는 특징을 갖는다.
석보상절을 분석하기 위해서는 당시의 문헌 자료에 대해 정확한 서지학적 이해가 요구된다. 문헌의 편찬 간행에는 반드시 그 배경과 동기, 그리고 목적이 있게 마련이며 이들 주변적인 사실들은 해당 문헌의 언어 사실과도 전혀 무관하지 않다. 또한 특정 시점에 간행된 문헌은 그 문헌의 간행을 전후로 하여 간행된 문헌들과도 형태, 내용면에서 유기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 배경이 되는 역사적 사실에 대한 정확한 이해 없이 대상 문헌에 대한 올바른 접근이란 그리 용이하다 할 수 없다.
국어사 자료로서의 개별 문헌에 대한 연구는 두 가지 측면에서 접근할 수 있다. 하나는 외적 접근 방법이고 또 하나는 내적 접근 방법이다. 외적 접근 방법은 서지학의 하위 분야와 대체로 일치한다. 원문서지학, 체계서지학, 형태서지학의 각 분야가 그것으로, 문헌에 대한 卽物的 연구라 할 수 있다. 이는 동양에서 전통적으로 교감학, 목록학, 판본학 등으로 각각 일컬어져 온 것들이다. 국어사 자료를 다루는 데 있어서 이들 연구는 기초적 연구의 성격을 띠게 된다. 문헌 자체를 연구의 대상으로 삼는 서지학과는 달리, 국어학적 연구는 그 문헌에 내재되어 있는 언어사실의 규명을 목표로 하기 때문이다. 본고는 석보상절에 대해 서지학적 측면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서지적 고찰은 외적 접근 방법이라 할 수 있다. 편찬 간행의 경위와 시기를 다루는 것은 편찬자의 문제와 관련하여 언어 사실을 해석해 보려는 시도이다. 이는 개별 문헌의 연구에 있어 가장 기본적인 논의라 할 수 있다. 활자와 판식 등 판본학적 고찰은 문헌의 서지학적 특징과 관련된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편찬 간행의 경위와 판본에 대한 고찰을 해보기로 한다. 판본에 대한 고찰에서는 활자와 판식과 교정본에 대한 문제를 집중적으로 조명해 보기로 한다.
Ⅱ. 편찬 간행의 경위 석보상절을 편찬 간행하게 된 직접적인 동기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현전 월인석보(권1)의 권두에 있는 수양대군의 ‘석보상절서’와 그가 후에 왕위에 오른 뒤에 쓴 ‘어제월인석보서’의 내용을 번복할 만한 아무런 사료도 없기 때문이다. 편간의 동기는 이들 서문의 다음 구절 속에 잘 드러나 있다. (1) 近間애 追薦 因 (···) 各別히 그를 라 일훔지허 로 釋譜詳節이라 고 (···) 正音으로 곧 因야 더 번역야 사기노니 <서4a-6a> (2) 녜 丙寅年에 이셔 昭憲王后ㅣ 榮養 리 려시 (···) 世宗이 날려 니샤 追薦이 轉經 니 업스니 네 釋譜 라 飜譯호미 맛니라 야시 <월서10a-11a> 위의 서문의 내용은 석보상절의 편찬이 소헌왕후의 薨去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음을 말해 준다. 소헌왕후의 훙거는 세종실록의 “王妃薨于首陽大君第”<세종실록 111:20, 1446(세종28). 3. 24.>의 기사에 의해서도 확인된다. 그런데 문제가 되는 것은 追薦의 방법이다. 추천을 위한 佛事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 중의 하나는 轉經이다. ‘轉經’은 곧 ‘讀經’이다.
(2)에서의 세종의 말처럼 돌아간 사람의 명복을 빌기 위한 방법으로 독경만한 것이 없으므로 석보를 만들어 번역함으로써 한문을 모르더라도 많은 사람이 읽을 수 있도록 하려는 것이 석보상절의 간행 목적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이 책의 문헌적 성격과 관련된다. 위에서 보듯이 편찬자는 처음에 한문으로 석보상절을 만들고 나서 훈민정음으로 번역한 것으로 되어 있다. 한문으로 먼저 써놓고 그것을 번역하는 편이 더 효율적이었을 것이다. 석보상절을 번역하여 간행한 또 하나의 목적으로 훈민정음의 試用과 普及이라는 측면도 또한 무시할 수 없다. 그 즈음에 창제가 완성된 훈민정음이라는 새로운 문자는 용비어천가에서 최초의 시험적 사용을 보게 된다. 그러나 본격적인 시용 보급은 석보상절에서 이루어진다. 용비어천가, 월인천강지곡과는 달리 석보상절에서 표기법의 일반적인 규범을 보여주는 것도 그와 같은 맥락이다. 한편, 석보상절의 편간이 언제 시작되어 언제 끝났는가의 문제에 대해서는 논의의 여지가 많다. 우리가 볼 수 있는 가장 확실한 기록은 서문 끝에 있는 “正統 12年(1447, 세종29) 7月 25日”이란 기록뿐이다. 세종실록은 이 책의 편찬과 간행의 경과에 관련된 명시적 기록을 남겨 놓고 있지 않다. 다만 소헌왕후의 追薦과 관련된 佛事에 관한 기록이 있을 뿐이다. 다음은 소헌왕후가 돌아간 이틀 후의 실록 기사이다. (3) 임금이 승정원에 이르기를 “(···) 지금 중궁이 세상을 떠났는데 아이들이 그를 위하여 불경을 만들려고 하므로 내가 그것을 허락하고 의정부에 의논하니 모두 可하다고 하였다. 내가 생각하건대 우리나라가 해마다 흉년이 들어서 백성들이 편안치 않으니 공적으로 비용을 댈 수 없으나 아이들이 사사저축과 본궁의 저축된 것으로 그것을 하려고 한다.(···)” (1446. 3. 26.) 上謂承政院曰 (···) 今中宮卽世 我子輩爲成佛經 予許之 議于政府 皆曰可 予惟我國連年飢荒 民不聊生 未可公辦 因兒我輩私蓄 與本宮所儲爲之 (···) <세종실록 111:23b> 이 기록만을 보면 석보상절의 서문 내용과 잘 일치하는 듯이 보인다. 또한 여기서의 ‘佛經’이란 말이 석보상절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기록이 직접적으로 석보상절의 편찬과 관련되어 있는 것으로 해석하기에는 어려움이 따른다. 왜냐하면 이 기록에서 보이는 ‘佛經’이란 말은 실록에 계속되어 나타나는 ‘寫經’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다음의 실록 기사는 (3)에서의 佛經이 직접적으로 가리키는 바를 잘 나타내 준다. (4) 집현전 수찬 이영서와 돈녕부 주부 강희안 등에게 명하여 성녕대군 집에서 불경을 금자로 쓰게 하고 또 인순부 소윤 정효강에게 명하여 그 일을 주관하게 하다. (1446. 4. 28.) 命集賢殿修撰 李永瑞 敦寧府注簿 姜希顔等 金書佛經 于成寧大君第 又命仁順府少尹 鄭孝康 主其事 <세종실록 111:28b> 이는 (3)에 대해 집현전에서 啓를 올려 반대함에도 불구하고 세종이 처음의 의도대로 일을 진행시키고 있는 상황을 보여 준다. 만약 (3)의 불경이 석보상절이라면 (4)에서의 불경도 석보상절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4)에서의 불경은 불사를 위한 사경에 불과하다. 가능한 해석은 (3)의 불경과 (4)의 불경을 다른 것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경우에 한정된다. 계속되어 나타나는 실록의 관련 기사를 보기로 한다.
(5) 승정원에 전지하기를 “대군들이 왕비를 위하여 불경을 만드는데 판비하기 어려운 일은 내가 도와주었다. (···) 이 경이 이미 두어 건 만들어졌으니 대자암에 옮기어 명복을 빌고자 한다.” (1446. 5. 18) 傳旨承政院曰 大君等爲王妃成佛經 其難備之事 卽予乃助之 (···) 是經已成數件 欲轉于大慈菴 以資冥福 <세종실록 112:24a> (6) 승도들을 크게 모아 대자암에서 독경하다. 처음에 집현전 수찬 이영서와 돈녕부 주부 강희안 등을 명하여 성녕대군 집에서 금을 녹여 경을 쓰고 수양 안평 두 대군이 내왕하며 감독하여 수십일이 넘어서 완성되었는데 이 때에 이르러 크게 법석을 베풀어 대군 제군이 모두 참예하였다. 이 회에 모인 중이 무릇 이천여명인데 7일만에 파하였으니 비용이 적지 않았다.(1446. 5. 27.) 大會僧徒 轉經于大慈菴 初命集賢殿修撰 李永瑞 敦寧府注簿 姜希顔等 泥金寫經 于成寧大君第 首楊安平兩大君 來往監督 越數旬而成 至是大設法席 大君諸君皆與焉 其赴會僧凡二千餘 至七日而罷 糜費不貲 <세종실록 112:27b> (5)와 (6)의 기사에 대해 이를 석보상절 또는 월인천강지곡과 직접 관련시키는 논의도 있으나(朴炳采 1974/1991, 史在東 1971) 이는 본고의 해석과는 관점을 달리하는 것이다. (5)의 기사와 (6)의 기사가 같은 사건의 연속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런데 (5)의 기사는 (3)의 기사와 내용상 같은 맥락이고, (6)의 기사는 (4)의 기사와 공통된다. 이는 석보상절의 편찬이 공개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님을 말해 주는 것이다. 사경과 전경에 비해 불경의 간행사업이란 그것이 공개되면 훨씬 더 큰 파장을 불러 일으킬 수밖에 없는 것이라는 데서 그 사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석보상절의 편찬과 관련된 가시적인 실록기록은 다음이 유일한 것으로 보인다. (7) 부사직 김수온에게 명하여 석가보를 증수하게 하였다. (1446. 12. 2) 命副司直 金守溫 增修釋迦譜 <세종실록 114:21a> 종전까지의 ‘佛經’이라는 막연한 표현과 달리 이제 구체적으로 한정된 의미의 ‘釋迦譜’라는 명칭이 나타난 것이다. 여기서의 ‘석가보’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 것인지 명확히 알 수는 없다. 다만 두 가지 측면에서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 하나는 그때까지 만들어졌던 석보상절의 底本의 명칭을 석가보로 지칭하고 김수온으로 하여금 그것을 증보 수찬하게 하였다는 것으로 보는 것이고, 또 하나는 중국에서 이미 편찬되었던 기존의 석가보(僧祐의 釋迦譜, 道詵의 釋迦氏譜)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 이제부터 석보상절의 편찬을 위한 저본을 만들기 시작하는 것으로 보는 방법이다. 이에 대한 신빙성 있는 기록은 석보상절 서문의 기록이다. 서 문 말미에 있는 일자인 “1447년 7월 25일”이 모든 추정에 있어 절대적인 기준 일자가 되어야 한다. 그런데 이 날짜를 기준으로 하면 해결되어야 할 문제는 두 가지로 압축된다.
첫째는, 서문의 일자가 편찬의 완성(즉, 원고의 완성)과 관련된 것인지 아니면 간행의 완료와 관련된 것인지의 문제다. 결론부터 말한다면 위에 말한 “增修釋迦譜” 云云과 관련이 있다. 이 기록이 석보상절과 관련된 것이라면 서문일자는 간행일자이기보다는 편찬일자일 가능성이 높다. 인쇄 완료에 이르기까지의 시일이 너무 짧기 때문이다. 둘째는, 그렇다면 이때까지 원고가 완성되었는가 하는 문제가 있다. 두번째 문제부터 보기로 한다. 현전본 권6, 9, 13, 19가 교정본임은 주지의 사실이다. 또한 그 교정은 한자음 교정에 집중되어 있다(교정본에 관련된 문제와 한자음 교정의 문제는 2.1.2.2와 3.2.1에서 자세히 다룬다). 교정되는 한자음은 두 가지 종류로 나뉜다. 첫째, 단순 誤植인 경우의 교정과, 둘째, 오식은 아니지만 확정된 동국정운음에 따른 교정이 그것이다. 이 둘의 구별은 비교적 용이하다. 교정되기 이전의 음이 이 책의 (교정되지 않은) 다른 부분이나 권 20, 21, 23, 24에 전반적으로 나타나는 음과 다른 경우는 단순 오식인 것이고, 같은 경우는 새로 확정된 한자음으로의 수정인 것으로 판단될 수 있다. 단, 유일 예인 경우는 판단을 보류한다. 전자의 경우는 우리에게 큰 의미가 없지만, 후자의 경우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 한자의 예를 든다. 해당 한자의 음만 보이기로 한다. 괄호 속의 음은 교정된 후의 음이다. (8) 鬼·귕(:귕)神<13:1a>, 敎化:황(·황)<9:19a>, 最:죙(·죙)後身<9:41b>, 勞롱()度差<6:30a>, 八部:뿡(:뽕)<9:1b>, ··· 교정된 후의 음은 모두 동국정운과 일치한다. 또한 월인석보의 음과도 일치한다. 월인천강지곡의 경우는 ‘八部:’ 만이 다르게 나타난다. 그러나 동국정운에는 이 음이 ‘:뽕, :’으로 다 나타나므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 安秉禧(1974)에서는 이런 예를 근거로 들어 월인천강지곡보다 석보상절이 상대적으로 먼저 간행되었음을 논증한 바 있다. 그런데 동국정운의 원고가 완성되는 것은 1447(세종29)년 9월이다. 석보상절의 서문이 완성된 이후인 것이다. 우리는 석보상절이 전거로 삼았던 한자음은 확정되기 이전의 동국정운음이라고 생각한다. 동국정운이 마지막 수정을 거쳐 확정되기 이전에 원고는 완성되었던 것이다. 석보상절 권9 마지막장의 묵서를 간행과 관련된 상대적인 기준으로 보아 왔다. “正統 14年(1449) 2月 初4日/ 嘉善大夫(···)臣申”의 기록을(2.1.2.2 참조) 藏書記로 보아 1449(세종31)년 2월 4일을 간행완료의 하한선으로 보는 태도가 그러하다. 그러나 본고는 그 하한선을 더 높여 잡을 수 있는 근거를 제시하고자 한다. 현전 교정본의 권6에는 난상에 교정한 날짜가 적혀 있다. 그것이 영인본에는 지워져 있지만 원본에서는 부분적으로 확인된다. 9월 9일부터 9월 12일까지의 날짜가 나타난다(권6:4~34). 한 권을 교정하는 데 5~7일 정도가 걸린 것으로 볼 수 있다. 우리의 논지에 따른다면 이 9월을 1447년 9월로 보기는 어렵다. 이렇게 되면 석보상절의 간행 완료는 아무리 늦잡아도 1448년 8월 이전까지로 소급되는 것이다.
Ⅲ. 판본에 대한 고찰 석보상절의 간행에 사용된 활자는 한자와 한글 모두 銅活字이다. 한자는 甲寅字의 大字와 小字 두 종류가 사용된다. 간혹 小字를 庚子字라고 말하는 경우를 보게 되는데 이는 江田(1936)에서의 오류의 답습이다. 大字는 본문에 小字는 협주에 각각 사용된다. 그런데 印面을 자세히 조사해 보면 한글 활자 가운데에는 간혹 목활자도 섞여 있는 듯이 보이나 그렇다 하더라도 석보상절이 동활자본임을 부정할 근거는 되지 못한다. 한글활자는 대, 중, 소의 세 종류가 쓰였다. 월인천강지곡은 판식과 활자에 있어서 석보상절과 일치한다. 월인천강지곡은 한자가 본문에 부기되는 방식이라서 한자 대자는 사용되지 않는다. 또한 협주가 없기 때문에 한글 중자와 소자는 필요하지 않다. 이들 한글활자는 사실 이 두 문헌을 간행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것이었다. 舍利靈應記(1449경)에서 고유어 인명표기를 위해 부분적으로 쓰였을 뿐(安秉禧 1977b) 이들 한글활자는 더 이상 사용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다음 시기에 활자본으로 간행된 楞嚴經諺解(1461)에서는 乙亥字 한자활자와 함께 새로운 한글활자가 사용된다. 석보상절에서 실제로 확인되는 글자는 다음과 같다. (괄호속의 ‘대’는 大字, ‘중’은 中字에서 확인된 것이다. 소자는 한자음 표기에 쓰이는 글자이므로 회전성을 확인할 수 없다.) (9) /(대,중), 곡/눈(중), 굠/뮨(대), 굴/론(대,중), 굼/몬(대,중), 극/는(대,중), 글/른(대,중), 금/믄(중), 눌/록(대), /(대,중), 롬/물(대,중), 룸/몰(대,중), 름/믈(대,중) 해당 활자의 짝 가운데 적어도 하나가 현전본에 나타나지 않으면 이 확인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위의 목록에서 빠진 글자의 짝도 많이 있다. 한 쪽만 나타나는 글자와 그 짝은 다음과 같다. (10) /, 곤/군, 곰/문, 굘/륜, 국/논, 귤/룐, 놀/룩, 놈/묵, 눔/목, 롤/룰 서로 대응되는 글자가 모두 빈도수가 높은 글자인 경우에는 적어도 한 번 이상의 일치를 보였으나, 단 한 번 나타나는 글자 가운데는 대응 글자와 일치되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골/룬’의 짝이 그러하다. ‘룬’은 중자가 꼭 한 번 나오는데(19:8b) 대응 글자인 ‘골’(6:45b외 3회)과 한 번도 일치하지 않았다. 석보상절의 한글 글자체가 직선과 원점에 의하여 도안되었다. 특히 회전 가능성이 있는 글자들(9, 10의 예)은 글자 전체에서 초성, 중성, 종성이 차지하는 기하학적 위치가 일정하다. 그러므로 활자를 도안한 匠人의 의도와 관계없이 이 글자들은 180도 회전하면 대응글자와 원칙적으로 일치하게 된다. 이는 특히 상하 대칭의 글자인 ‘, 근, , 를’의 경우 예외 없이 같은 글자가 되는 데서도 방증된다. 그러나 활자 주조의 과정에서 항상 字本과 같은 글자가 나오는 것은 아니다. 그에 따라 같은 글자끼리도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생기는 것이다. 이는 회전성 있는 활자의 경우에도 적용된다. 한편으로는 이들 활자가 실제로 조판되었다가 해판되는 과정에서 서로 섞일 수 있다는 점도 고려할 수 있다. 같은 글자끼리는 일치하지 않으면서 회전 대응 글자와 일치하는 경우도 있는 것이다. 활자의 字本을 쓰는 단계에서부터 각 글자형의 대칭성을 인식하고 경제성을 고려했다면, 大字의 경우 90도 회전의 활자(마/무, 모/머, 어/오, ···)들을 만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90도 회전의 글자의 예는 보이지 않는다. 사실 180도 회전의 글자들은 실제로 당시의 연철 표기법에서는 사용 부담량이 그리 많지 않은 글자들이었다. 한편, 방점 활자의 문제가 있다. 福井玲(1987)에서 두시언해의 방점 활자가 한글 활자(을해자 병용 한글활자)와 별도로 만들어져서 쓰였음이 밝혀졌다. 방점 활자의 운용은 경제성과 직결된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석보상절의 경우에도 적용된다. 갑인자 병용 한글활자로 인쇄된 책이 다양하지 않아 판본간의 대조는 불가능하지만, 같은 글자에 대한 방점의 위치가 서로 다른 것이 석보상절 내에서만도 쉽게 발견된다. 한 예로 ‘부:톄’에 대하여 본다면 <6:1a5>, <6:10a3>, <6:10b6>에서 ‘톄’자와 상성점의 위치가 서로 다른 것을 볼 수 있다. 한편 상성점의 경우 두 점간의 간격이 일치하지 않는 예도 자주 보이는데, 이는 상성점을 따로 만들지 않고 거성점 두 개를 상성점으로 운용하였을 가능성을 보여 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한글 활자본 모두가 다 방점이 글자와 유리된 것은 아니다. 연산조에 印經木活字로 인출한 육조단경(1496), 진언권공(1496) 등은 글자와 방점이 같이 붙어 있는 목활자인 것이다. 국어사 자료가 되는 문헌에서 校正本이라고 하면 그렇지 않은 동종의 문헌에 비하여 더 신뢰할만한 자료적 가치가 있는 것으로 평가되고 인식된다. 인쇄 과정에서 일어났을 수도 있는 내용상의 오류에 대하여 당시 사람의 손에 의해 검토되고 잘못된 부분이 바로 잡힌 문헌이라면 국어사 자료로서는 더할 나위 없이 귀중한 가치를 가지는 것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교정본이라고 불리는 문헌들도 그 교정의 성격과 교정이 이루어진 시기에 따라 다음과 같이 여러 부류로 나뉘어질 수 있다. (11) ㄱ. 인쇄가 완료된 후 책의 頒賜에 앞서 교정을 한 것 ㄴ. 頒賜 이후 교정한 것. ㄷ. 중간본을 간행하기 위하여 교정한 것 ㄹ. 교정쇄를 成冊한 것 (11ㄱ)은 그 교정이 이루어진 시점이 裝訂 이전인가 이후인가에 따라 다시 나누어 질 수도 있으나 실제로 그 구별은 용이한 문제가 아니다. 잘 알려져 있는 바와 같이 월인천강지곡(상)의 교정이 그러하고, 서강대 소장 월인석보 권1, 2, 서울대 가람문고 소장의 두시언해 권6, 7 등이 이 부류에 속한다. (11ㄴ)의 교정본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반사 이후 간행 기관에서 다시 거두어들여 일률적으로 교정한 것과, 책을 받은 사람이 개별적으로 그 오류를 수정한 것이 그것이다. (11ㄷ)은 두시언해의 중간본의 저본이 되는 책에 해당된다. (11ㄷ)의 교정본은 목판본으로 重刊하는 경우 그 板下가 되는 것이므로 板刻과 함께 필연적으로 없어지는 운명에 처하게 된다. 그런데 현전본 석보상절 권6, 9, 13, 19은 (11ㄷ)의 성격을 갖는 교정본이다. 월인석보의 간행과 관련된 교정이었기 때문이다. 석보상절의 현전 교정본이 (11ㄹ)과 같이 간행 과정의 교정쇄를 성책한 것이라는 견해가 宋錫夏(1942) 이후 꾸준히 수용되어 왔다. 그러나 권23, 24가 발견됨으로써 이것이 교정쇄가 아님은 명백해졌다. 교정쇄라면 당연히 현전본 권23, 24에서는 그것이 바로잡혀 있어야 할 것인데 권23, 24는 교정되기 이전의 먼저 인쇄된 한자음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는 이 책들이 교정쇄를 모아서 묶은 것이 아니라는 움직일 수 없는 증거가 된다(安秉禧 1974: 27). 또한 紙質이 뛰어난 것도 교정쇄로 보기 어려운 방증이 된다. 그런데 교정본을 자세히 검토해 보면 위에서 말한 (11ㄱ)의 교정 단계를 이미 거쳤음을 알 수 있다. 칼로 잘못된 글자를 오려내고 안쪽에서 종이를 붙인 뒤 그 위에 補印하거나 補書한 것이 간혹 나타난다. 이제 그 예들을 제시해 보이기로 한다. 補印이나 補書가 漢字인 경우는 그 글자만 제시하고 漢字音인 경우는 해당 한자를 앞에 보인다. (12) ㄱ. 師<9:21b7-7>, 威<13:9b7-2>, 殊<13:12b1-14>, 塞<13:15b5-11>, 生<13:54b2-6> ㄴ. 三삼<19:12b7-7> (12ㄱ)은 보인된 것이고 (12ㄴ)은 보서된 것이다. 두시언해 교정본 권 6, 7과 같은 방식의 교정이라 할 수 있다. 이들은 원래 인쇄된 글자가 잘못되어서 그것을 오려내고 새 종이를 붙인 것이지만 활자의 부족 등에 의한 脫字 부분을 보서한 것도 있다. (13) 婆<13:14a1-12>, 來<13:27b4-15>, 妙·<13:35a7-8, 35b6-14>, 便·뼌<13:62b7-1>, 功<19:9b8-1>, 體:톙<19:11b4-9>, 三삼<19:11b5-13, 8-12, 14a7-10>, 世·솅<19:11b6-6, 16b3-5, 27a4-4>, 一·<19:11b6-11, 7-13>, 百·<19:11b6-13, 7-3, 8-4, 14a6-3>, 二·<19:11b7-10, 13a6-1, 14a6-1>, 方<19:13a5-8>, 疊·뗩<19:13a7-8>, 耳:<19:16a2-11, 3-8, 26b4-6>, 千쳔<19:16b2-14, 3-3>, ·리<19:20b4-8>, 勢·솅<19:26a5-10>, 得·득<19:35a4-3> 이들은 탈자가 된 자리에 정밀하게 붓으로 써 넣은 것들이라서 언뜻보면 처음부터 인쇄된 것과 구별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12)와 (13)의 교정은 인출과정에서의 보인, 보서이므로 이 교정본과 같은 권차의 다른 책이 있다면 그 내용도 이와 같으리라 예상할 수 있다. 이들은 당시의 교정 방법의 여러 면을 보여주는 점에서 서지학적 가치를 갖는다. 이제부터 볼 것은 인출과 반사가 끝난 후 改書에 의한 교정이다. 개서에 의한 교정은 한자음에 대한 것이 주종을 이루지만 그외에 한자, 한글, 한글 방점의 오식에 대해서도 행해졌다. 후자의 것을 먼저 보기로 한다. (14) ㄱ. 槃→般<6:29a1-11>, 威→滅<13:62a5-5>, 凈→淨<19:24a5-9> ㄴ. :→:<6:17a7-11>,1) →<13:38a6-1>, :→:·<19:1a3-8>, 라→·라<19:16b7>, 시니→시·니<6:42b7-9> ㄷ. 며→홈과<9:11b8-9·10> (14ㄱ)은 한자 오자를 교정한 것이다. 乾闥娑<13:32a>의 ‘娑’는 ‘婆’의 오자이고 銅鈑<13:53a주>의 ‘鈑’은 ‘鈸’의 오자임이 분명하다. 특히 앞의 것은 독음만이 올바르게 ‘빵’로 되어 있는데, 오식된 글자에 맞추어 ‘빵→상’로 개서하였다. (14ㄴ)은 고유어와 방점의 오식을 바로잡은 것이다. 현대적 관점에서 본다면 ‘’와 같은 오자는 치명적인 것이겠지만 그 다음의 방점 오자들은 사실 덜 민감한 것이라고 할 수도 있다. (14ㄷ)은 유일 예이긴 하지만 통사구조와 관련된 교정이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오자는 아니었던 것으로 판단되는데 이 문장구조가 꽤 복잡하다는 데 문제가 있다. 앞 뒤 어절은 길지만 간단히 인용해 보이면 다음과 같다. (15) 믈읫 衆生이 (···) 오직 貪하며 앗가 머거 布施며(→홈과) 布施 果報 몰라 쳔랴 만히 뫼호아 두고 受苦 딕히여 이셔 (···) <9:11b-12a> 여기서 ‘布施며’를 ‘布施홈과’로 바꾸는 것은 전체 문장에 대한 구조 파악이 선행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약사경 원전에 따르면 “不知布施及施果報”로 되어 있어 후자의 의미임이 드러난다. 그런데 석보상절의 번역자가 그것을 몰랐을 리 없다. 다만 후행동사 ‘모-’의 목적어가 되는 복합명사구에 “[[布施]며 [布施 果報]]”의 구조를 상정하고 표현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교정자(또는 독자)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 구절은 “[[布施]며 [布施]]”의 구조로 오해될 소지가 있다. 좀더 의미를 명확히 하기 위해 “[[布施홈]과 [布施 果報]]”의 형식으로 바꾼 것으로 보인다. 문장 구조의 모호성을 해소하기 위한 한 방법인 것이다. 동국정운의 확정된 원고는 1447(세종29)년 9월 하순에 이루어졌고 그 간행이 완료되어 반사된 것은 1448년 10월의 일이다.그런데 본고는 2.1.1에서 석보상절의 간행 완료의 하한선을 1448년 8월 이전으로 잡았다. 이는 권6 난상의 교정일자인 9월 일과 권9말의 1449년 2월의 묵서에 근거한 것이었다. 한자음에 대한 改書는 다음의 두 가지를 구별해서 보아야 한다. 첫째는 단순히 오자를 교정한 것이고, 둘째는 오자가 아닌데 의도적으로 교정한 것이다. 첫째 부류의 것을 골라 내는 작업은 앞 절에서도 말했듯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교정본의 다른 부분의 한자음이나 또는 비교정본의 한자음과의 비교를 통하여 가려 낼 수 있다. 다음은 가려낸 결과이다. ( ) 속은 올바르게 인쇄되어 있는 예이다. (16) 子息·씩→·식<6:5b4-8>(6:3b), 童女→<6:14a6-9>(20:48a), 弗沙王→·<6:42a3-15>(6:18b), 優·婆塞→<9:17b7-3>(17b7), 恒河항沙→<9:2b5-8>(13:18b), 應供→<9:3a1-1>(13:27b), 雨·→:<13:26b6-8>(26b3-15), 日月→·<13:29a7-11>(13:29a), 無數:숭→·숭<13:38a4-6>(6:29a), 鈍·톤→·똔<13:57b3-14>(11:6a), 水香→:<19:17a4-14>(13:51b), 等·→:<19:42a5-3>(6:36a). 교정본에서 改書된 한자음 가운데 위의 (16)과 같은 단순 오자를 제외한 나머지 것들만이 진정한 자료적 가치를 가진다. 단순 오자의 교정이 아닌 의도적인 교정이기 때문이다. 이들 의도적인 한자음 교정은 양적으로도 가장 많다. 다음에 그 목록을 제시한다. 오자의 교정이 아닌 의도적 교정이므로 첫번째 출현하는 용례의 출처만을 밝힌다. (17) 乙酉:융→:<6:1a>, 化:황人→·황<6:7b>, 勞롱度差→<6:30a>, 八部:뿡→:뽕<9:1b>, 敎化:황→·황<9:19a>, 最:죙後身→·죙<9:41b>, 鬼·귕神→:귕<13:1a>. (18) 神奇긩→끵<6:7b>, 闍梨롕→링<6:10a>, 轉·輪王→:<6:23a>, 修行·→<9:6a>, 八分분齋戒→·뿐<9:18a>, 增上·慢→:<9:18b>, 耆闍堀·콜→·<13:1a>, 優婆塞·→·슥<13:12>, 親近:끈→·끈<13:15b>, 議論·론→론<13:17b>, 解:脫→:갱<13:40a>. (17)은 교정되기 이전의 한자음이 동국정운에 없는 용례이고, (18)은 교정되기 이전의 음이 교정된 이후의 음과 함께 동국정운에 실려 있는 용례이다. 이에 비하여 (18)은 한자음의 적용이 달라진 예라 할 수 있다. 같은 한자라 하더라도 한자어에 따라 한자음이 달리 적용된다. 예를 들자면, 같은 ‘分’자라 하더라도 ‘八分분齋戒(→·뿐)’에는 적용되지만, ‘分분揀’(비교정)<6:25a>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한자의 용법이 다른 것이다. (18)의 예들 가운데 그러한 경우가 많다.(이대해서는 3.2.1에서 좀더 자세히 다룬다.) 초간본 권6, 9, 13, 19가 발견된 뒤의 첫 보고서인 江田(1936)에서부터 이들 교정본이 월인석보의 편찬과 모종의 관련이 있음이 지적되어 왔다. 이 책들이 내용 단락에 따라 절단되어 있고, 월인천강지곡의 落張이 권6과 권9 등의 해당 부분에 첨부된 채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현전본 월인석보와의 비교를 위해 교정본의 절단되었던 부분과 낙장된 월인천강지곡의 曲次를 먼저 제시하기로 한다. (19) 권6 : 6a5.15- (그···) : 其145, 146 11b7.8- (○偸羅國···) : 其147 13a3- (舍衛國···) : 其148, 149 15b7.2- (湏達이···) : 其150, 151, 152, 153, 154 26a7.5- (그 나랏···) : 낙장 없음 (*其155~173에 해당) 41a3.14- (○世尊이···) : 其174, 175 권9 : 20b2.9- (그···) : 其254, 255 22a7.8- (文殊···) : 낙장 없음 29a6.3- (그···) : 낙장 없음 권13 : 37a3.7- (그···) : 其275 권19 : 26a5- (그···) : 낙장 없음 (*其313~317에 해당) 낙장으로 첨부되어 있던 월인천강지곡은 모두 15曲이다. 이들은 모두 절단된 부분의 석보상절 내용과 정확히 일치한다. 그러나 이 분할이 현전본 월인석보의 그것과 꼭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권6의 경우는 월인석보의 현전본이 없어 확인할 수 없지만, 권9, 13, 19는 내용상 대응되는 월인석보 권9, 11, 17이 현전하므로 대조해 볼 수 있다. 권13과 권19의 경우는 절단된 부분에 해당 월인천강지곡이 삽입되어 있으나, 권9의 경우는 해당 월인천강지곡 其251~260 모두가 권두에 함께 실려 있다. 다만 편찬의 기본 방향(석보상절을 월인천강지곡에 따라 내용 단락을 나누어 합편하는 방식)만은 일치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때의 편찬 작업은 오자와 한자음만을 교정하고 합편하여 간행하려 했던 것으로 보이나 후대의 월인석보는 대폭적인 첨삭이 있는 것이다. 교정본에 대한 논의에서 마지막으로 살펴볼 것은 卷末 墨書에 관한 것이다. 잘 알려져 있듯이 현전본 권9의 마지막장(41b면의 자리)에는 다음과 같이 細書되어 있다. (20) 正統拾肆年貳月初肆日 (21) 嘉善大夫黃海道都觀察黜陟使兼兵馬都節制使兼判海州牧事臣申 이 묵서에 대해 가장 널리 유포된 견해는 藏書記로 보는 것이다. 소장처인 국립도서관의 표목이 대표적이라 할 수 있다. 현재로서는 근거 있는 대안을 제시할 수 없으므로 반론을 제기할 수는 없다. 권9에만 서명을 했다는 점과 굳이 ‘臣’字까지를 써넣었다는 점이 장서기로 보기에 의심스럽다는 견해(李丙疇 1967/1972:285)도 제기될 수 있으나 어떻게 보더라도 확실한 결론에 도달하기는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다만 이 기록이 反古가 아니라면 (21)의 기록자가 이 교정본을 나중에 입수해서 가지고 있었음만은 사실일 것이다. 오히려 문제는 (20)의 일자 기록이다. (20)과 (21)의 기록을 연관시켜 ‘正統 14년’(1449, 세종31)을 간행의 연대로 확대 해석하는 일은 지양되어야 한다. 內賜記라면 그것이 刊年으로 대표될 수 있겠지만 단순한 묵서를 가지고 대표 연대로 삼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현전 석보상절의 경우, 간행 연대는 序文年代로 대표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우리의 관심은 (20)과 (21)의 기록이 별개의 것이라는 데 있다. 이 두 기록의 글씨를 조금만 자세히 관찰해 본다면 동일인의 필체가 아님을 쉽게 알 수 있다. 같은 글자는 없지만 運筆의 솜씨는 전혀 다른 것이다. (21)의 필체가 세련된 반면, (20)의 그것은 투박하다. (20)의 기록은 교정, 편찬을 담당했던 胥吏의 기록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본고의 추정대로라면(2.1.1 참조) 권6의 교정이 1448년 9월의 일이고 그들의 작업 속도를 감안하면 1448년 연말쯤이 되어야 교정이 끝나게 된다. 그 다음부터 책장을 절단하여 월인천강지곡과의 합편 작업을 할 수 있으므로 “1449년 2월 4일”이란 기록은 편찬작업 완료 전후의 기록이 될 수밖에 없다. 혹시 이 편찬 작업이 중도에 중지되었다 하더라도 중단된 사이에 그 교정 원고를 한 개인이 가져다가 서명을 한다는 것은 더욱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여기서 (21) 기록의 주인공에 대해서도 언급할 필요가 있다. 황해도 관찰사인 申謀는 宋錫夏(1942)에서 이미 고증된 바 있다. 그는 申自謹이란 사람인데 실록의 기록에 의하면 1447. 11. 25일부터 1450. 7. 6일까지 황해도 관찰사로 있었음이 확인된다. 따라서 신자근이 교정본을 입수하게 된 시점은 1450. 7. 6일이 그 하한선이 된다. 그 하한선은 교정과 편찬 작업이 끝나고(또는 중단되고) 나서도 한참의 기간이 지난 때인 것이다. 이 기간에 신자근은 편찬이 완전히 중단된 석보상절을 입수하게 되었고 그것을 자기 관내의 사찰에 보시하여 그것이 塔藏됨으로써 오늘날 우리에게 전하게 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여러 정황으로 보아 가장 타당한 듯이 여겨진다. Ⅳ. 맺음말 15세기 국어 연구에서 주축을 이루어 온 문헌 자료는 정음 창제 초기의 불경언해서 들임은 앞에서도 언급한바 있다. 이와 관련해 석보상절에 대한 국어사 자료로서의 문헌적 특징으로 편찬 간행의 경위에 관하여 살펴보았다. 이상에서 논의한 자료들을 바탕으로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편찬간행의 경위와 목적은 서문의 기록을 주된 근거로 삼고 실록의 기사를 보조적 근거로 삼아 ‘돌아간 소헌왕후의 追薦을 위한 轉經(讀經)’을 하기 위한 것으로, 그리고 그 轉經에 한문을 잘 모르는 계층까지가 참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정음으로 번역하여 간행한 것으로 보았다. 이와 아울러 새로 만들어진 문자와 새로 정리된 한자음의 試用 보급이라는 측면도 무시할 수 없음을 말하였다. 편찬 작업이 시작된 때에 대해서는 실록에 나오는 “佛經”이란 字句를 곧바로 ‘석보상절’과 동일시하는 해석 태도를 지양하고 “(增修) 釋迦譜”(1446. 12. 2.)와 같은 명시적인 기록만을 근거로 하였다. 편찬의 완료 시점에 대해서는 석보상절에 부기된 한자음 가운데 동국정운의 한자음과 일치하지 않는 예(鬼, 化, 最, 勞, 部, ···)를 근거로 동국정운의 원고 완성(1447. 9.)보다 앞섰을 것임을 밝히고 그 구체적인 시기는 수양대군이 서문을 쓴 시점(1447. 7. 25.)과 같을 것으로 보았다. 또한 간행의 완료 시점에 대해서는 현전 교정본 권6의 난상에 나타나는 교정일자를 근거로 하여 1448년 8월 이전을 그 하한선으로 잡았다. 판본학적인 고찰에서는 우선 ‘한글활자’에 중점을 두었다. 이 동활자만이 가지는 회전성(/, 곡/눈, ···)에 주목한 것인데 우리는 이 회전성을 경제성의 원리보다는 기하학적 圖案의 결과로 해석하였다. 또한 현전 교정본 권6, 9, 13, 19에 대해서는 實査를 통하여 그 구체적인 교정의 내용을 분류, 정리하면서 다른 현전 간본과의 비교를 통해 각 권차의 서지적 특징을 기술하였다. 본고에서는 석보상절의 서지적 특성에 관하여 한 부분만을 살펴본 것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다. 어느 문헌이나 서지적 특성은 다양하고 실로 끝도 없는 연구가 필요하다. 이처럼 고문헌에 관한 연구가 선행되어야 국문학은 물론 국어 발전이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된다. ※참고문헌 이호권, 석보상절의 서지와 언어, 태학사, 2001 姜順愛, 새로 發見된 初槧本 월인석보 卷 23에 관한 硏究: 그 構成과 底經을 中心으로, 季刊書誌學報 8. 韓國書誌學會. 1992 具恒會, 地藏經諺解의 表記와 音韻現象에 대한 通時的 硏究, 영남대 석사 논문. 1995 김사권, “석보상절”에 나타난 조어법 연구, 건국대 석사학위논문. 1990 金星奎, 中世國語의 聲調 變化에 대한 硏究, 서울대 박사학위논문. 1994 노양수, 석보상절에 나타난 조어법 연구, 동아대 석사학위논문. 1992 盧垠朱, 法華經의 飜譯에 對한 硏究, 효성여대 석사학위논문.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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