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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의 젊은 시절
1. 태자의 어린 시절
태자가 탄생한 후 7일 만에 그의 생모(生母)였던 마야(Maya) 왕비는 세상을 떠났습니다. 마야 왕비의 사망에 관한 여러 학설들이 있지만, 너무 미화시킨 것이라 믿기 어렵습니다. 마야 왕비가 일찍 사망한 원인은 아마 산후 몸조리를 잘못했기 때문일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왜냐하면 출산을 위해 친정인 데바다하(Devadaha, 天臂城)로 가던 중, 룸비니(Lumbini) 동산에서 태자를 낳았습니다. 야외에서 출산한 뒤 충분히 휴식을 취하지 못한 채 곧바로 이동하여 왕궁으로 되돌아왔기 때문일 것입니다. 한편 태자가 자라면서 어머니께서 일찍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것이고, 그러한 사실은 태자의 인격과 성격 형성에도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끼쳤을 것이라고 봅니다.1) 그 후 태자는 그의 이모(姨母)인 마하빠자빠띠 고따미(Mahapajapati Gotami, 大愛道瞿曇彌)에 의해 양육되었다고 합니다. 그녀는 언니인 마야 왕비의 뒤를 이어 숫도다나(Suddhodana, 淨飯王)의 부인이 되었으며, 나중에 난다(Nanda, 難陀)라는 아들을 낳았다고 합니다. 그녀는 나중에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출가하여 붓다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역사적으로 비구니 교단(敎團)은 그녀의 출가로 인해 형성되었던 것입니다. 붓다의 어린 시절과 청년 시절에 관해서는 자세한 기록들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 다만 단편적인 기록들이 전해지고 있을 뿐입니다. 이러한 자료들에 의하여 붓다의 어린 시절을 종합 정리해 보면 몇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 붓다는 어려서부터 감수성이 예민하여 뭇 생명에 대한 연민의 정을 느끼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실례로 어느 날 농부가 일구어 놓은 땅 속에서 벌레가 기어 나오자 새가 날아와 그 벌레를 물고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것을 본 태자는 생물은 서로 해친다는 것을 통감했다고 합니다.
둘째, 붓다는 천성적으로 명상적인 성격의 소유자였다고 합니다.2) 태자가 어렸을 때부터 매우 명상(冥想)을 좋아하는 형의 소년이었음을 보여주는 사례들이 많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어느 날 석가족의 왕인 그의 아버지는 국가적인 행사인 농경제(農耕祭)에 참가했습니다. 이때 어린 왕자도 함께 데리고 가게 되었습니다. 농경제가 진행되는 동안 어린 왕자는 사람들이 있는 곳을 피해 나무 밑에서 좌선을 하여 초선(初禪)의 경지에 들었다고 합니다.
<중아함경(中阿含經)> 제29권의 <유연경(柔軟經)>에 따르면, 붓다께서는 출가 전에 이미 초선(初禪)의 경지를 체험한 것으로 말씀하고 계십니다. 경전의 내용을 읽어보겠습니다.
이 때가 농경제(農耕祭)에 참가했을 때인지 아니면 다른 때인지는 정확히 구분할 수는 없지만, 태자가 홀로 나무 밑 그늘진 곳에 앉아 명상에 잠기고 있었습니다. 시간이 쾌 지나간 모양이었습니다. 다른 나무들의 그늘은 해가 돌아감에 따라 모두 그 그림자 자리를 옮겨갔는데, 태자가 앉은 나무의 그늘만은 움직이지 않고 그대로 있었다고 합니다. 인도의 오래된 조각(彫刻)들에는 그 광경이 그려져 있는데 이것은 시간도 태자의 명상을 깨뜨리지 못한다는 미래의 붓다의 위력을 잘 설명해 주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우리는 설사 이것이 후대의 추측인 첨가라 할지라도 충분히 사실에 가까운 일이 아니었을까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4)
한편 후대에 성립한 <방광대장엄경(方廣大莊嚴經)>의 제4권에서는 앞에서 언급한 태자의 선정에 대해 보다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는 태자가 염부수(閻浮樹) 아래에서 사선(四禪)을 체험하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5) 이것은 붓다께서 출가하여 성도(成道)를 향한 고행을 마치고, 과거 소년시절 체험했던 명상의 시간을 회상하여 그와 같은 방법으로 좌선하게 되는 것으로 연결됩니다.
셋째, 붓다의 젊은 시절은 물질적으로 풍요로웠던 것 같습니다. 붓다께서 만년에 자신의 젊은 시절을 회상하여 제자들에게 들려준 이야기가 앞에서 인용했던 <중아함경> 제29권 유연경에 설해져 있습니다. 이 경전에 의하면, 자신을 위해 겨울·여름·봄 세 계절에 어울리는 세 가지 종류의 궁전(三時殿)이 지어졌다는 등 유복하고 호화로운 생활이 묘사되고 있습니다.
팔리어로 씌어진 맛지마 니까야(Majjhima-nikaya, 中部)에도 동일한 내용이 기술되어 있습니다.7) 이와 같이 태자는 또래의 다른 아이들 보다 좋은 조건과 풍족한 환경 속에서 성장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넷째, 붓다는 세속적 삶에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일반적으로 보통 사람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을 즐기며 지내는 것이 상례(常例)입니다. 하지만 이 젊은 왕자는 온갖 안락과 사치를 누리며 예기(藝妓)들의 시중을 받는 궁궐생활에 오히려 싫증을 느꼈습니다. 그는 육체적인 쾌락이나 세속적 야망에 만족하기에는 감수성이 너무나 예민했던 것입니다. 초기 팔리어 사료들을 보면 그는 자신이 늙음과 병듦과 죽음의 슬픔을 겪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괴로워하며 환멸을 느끼는 존재로 묘사되어 있습니다.8) 보통 사람들은 추한 노인을 보고 혐오감을 느끼지만, 어느 누구도 병의 고통이나 병자의 추잡스러움을 바라지 않지만, 병에 걸리는 것 역시 피할 수가 없습니다.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워하고 죽기를 바라지 않지만, 그 누구에게도 죽음은 반드시 닥쳐옵니다. 젊은 날의 붓다는 이 생로병사(生老病死)의 두려움에 대해 골몰하고 있을 때, 젊음이 넘치는 그의 신체로부터 기쁨이 사라져 버렸다고 합니다.9) 이러한 세속적 쾌락에 대한 혐오감과 인생이 단지 끝없는 고통이라는 생각은 이 젊은 왕자를 크게 자극했습니다. 결국 그는 가정생활을 포기하고 종교적 삶을 통해서 평화와 고요를 추구하고자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10)
2. 태자의 교육
태자는 당시 왕족의 교양으로서 필요한 모든 학문·기예(技藝)를 배웠으며, 비범한 재간을 발휘했다는 사실이 후대의 불전(佛傳)에 나옵니다. 물론 그것도 사실일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면 그 교육이란 어떠한 내용의 것을 어떻게 배우는 것이었을까? 태자가 취학(就學)을 한 것은 일곱 때일 것입니다. 그것은 당시 인도의 습관이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인도의 관습에 의하면 보통 브라만 계급의 사람들은 여덟 살부터 12년 동안, 크샤트리아 계급의 사람들은 열 한 살부터 12년 동안, 바이샤 계급의 사람들은 열두 살부터 12년 동안, 스승 밑에서 인도인이 가장 존중하는 고전(古典)인 <베다>를 배우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특히 학문에 뛰어난 재간이 있는 사람은 일곱 살부터 스승을 맞이하여 공부할 수 있게 되어 있었습니다. 태자가 이와 같은 부류의 소년이었을 것은 의심할 바가 없습니다.11) 그리고 태자는 <베다>는 물론 <베다>의 보조학(補助學)도 학습하였다고 합니다.
불교의 경전에는 세 개의 <베다>와 자휘학(字彙學), 어원학(語源學), 사전(史傳), 문법학(文法學), 순세파학(順世派學), 대인상학(大人相學)으로 되어있고, 이것들에 통하는 것이 브라만으로서의 자격을 구비하는 것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또 한편 자이나교 측에서는 네 개의 <베다>와 사전(史傳), 문법학(文法學) 등을 열거하고 있습니다. 요컨대 당시의 수재들은 <베다>의 본문 암송(暗誦), 그것에 의한 문법, 어원(語源)에 관한 학문, 사전(史傳) 등을 중심으로 하여, 그 밖에 당시의 일반 과학지식을 습득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기록들에는 인도 사상 중 가장 깊이 있는 내용을 가진 <우파니샤드>에 관한 이야기는 나와있지 않지만, 붓다 당시 <우파니샤드>의 사상은 이미 주지(周知)되어 온 사실이기 때문에 태자가 학습한 과목 중의 하나를 이루고 있었을 것은 명백합니다. 불교의 원시경전 중 가장 오래된 층의 것들 속에 우파니샤드적 표현이 많은 것은 석존의 태자 시대의 <우파니샤드>에 대한 교양을 말하고 있음을 의심할 바가 없습니다.12)
또한 태자가 크샤트리야족 출신이었기 때문에, 문(文)의 면만이 아니라, 무(武)의 면도 같이 연수를 게을리 하지 않았을 것은 두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는 무사계급(武士階級)인 크샤트리야족 출신으로서 필요한 무술(武術)을 배우고 닦았을 것은 틀림없습니다. 후대의 불전에는 태자가 특히 궁술(弓術)에 뛰어나 있었다고 했고, 그가 야소다라비(妃)와 혼인하게 되었던 것도 그가 궁중에서 열린 무술대회에서 발군(拔群)의 성적을 올린 까닭이었다고 하고 있습니다.13) 태자는 인도의 언어와 고전 문학 등의 일반적인 학습만을 한 것이 아니라 도보경주, 원반 던지기와 창 던지기 등의 육체적인 단련도 했다고 합니다. 또한 귀족에게 필수적인 네 가지 기예, 즉 말타기, 코끼리 타기, 전차 몰기 그리고 군대의 배치법을 배웠다고 합니다.14) 이와 같이 전기나 당시의 정황으로 미루어 보아 태자는 왕족으로서의 교양을 쌓는데 필요한 온갖 학문과 기예를 습득했고, 비범한 재능을 발휘했다는 것은 신빙성이 있습니다.15)
3. 태자의 결혼
태자가 결혼을 한 것은 사실이었을 것으로 믿어집니다. 그리고 그 태자비(太子妃)가 라훌라(Rahula, 羅候羅)란 아들을 난 것도 사실일 것입니다.모든 불전(佛傳)이 다 그것을 전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16) 결혼의 시기는 16세, 17세, 19세 20 등 여러 가지 설이 있습니다. 남방의 전승에 따르면 16세에 결혼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현재는 16세에 결혼한 것을 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태자비의 이름은 남방성전(南方聖典)에는 거의 전해지지 않고 있으나, 북방성전(北方聖典)에는 여러 가지 이름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남방의 전승에서는 라훌라마따(Rahulamata, '라훌라의 어머니'의 뜻)라든가 밧다깟짜(Bhaddhakacca) 혹은 밧다깟짜나(Bhaddhakaccana, 跋陀迦旃延)로 불려지고 있지만 북방의 전승에서는 범어로 야소다라(Yasodhara, 耶輸陀羅, '영예를 지닌 여성'의 뜻)란 이름이 잘 알려져 있습니다. 뒷날 팔리어 성전의 주석서에서도 '야소다라'라는 이름이 나옵니다. 그러나 어떤 전승에 따라서는 또 다른 이름도 정하고 있어 동일인인지 아닌지 분명하지 않습니다.17)
남방의 팔리어 전기(傳記)에서는 다만 '라훌라의 어머니'(羅候羅母)라고만 불려지고 있는데, 이런 호칭은 우리나라에서도 통용되는 호칭법으로 옛날 인도에서는 그렇게 부르는 일이 흔했던 것 같습니다. 붓다의 제자나, 신자들 중에도 아들 이름을 붙여 그 어머니를 호칭한 경우가 많았습니다.북방의 성전에서는 태자의 비를 야소다라(耶輸陀羅)라고 부르고 있는 경우가 제일 많습니다. 그런데 이 야소다라에 관한 이야기는 붓다께서 성도한 뒤 옛 왕성(王城)을 방문했을 때, 출영(出迎)한 것과 그 후에 이모 마하빠자빠띠 고따미와 더불어 열심히 출가를 원해서 허락을 받고 니승(尼僧)이 되었다는 두 가지 사실밖에는 기록된 것이 없습니다. 그 후에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습니다.18)
붓다의 젊은 시절은 한마디로 말해서 인생의 지식을 폭넓게 습득하면서 끊임없이 자신을 반성하고 삶의 문제를 통찰하는 생활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결혼 이후에도 그러한 자세를 잃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이후 얻게 된 그의 깨달음은 그의 단순한 천재성이나 직관력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어린 시절부터 청년 시절까지 지속된 내성적 성숙과 노력의 결과라 할 것입니다.19)
Notes: 1) 이기영, <석가> 세계대사상전집 5, (서울 : 지문각, 1965), p. 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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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의 출가와 수행
1. 출가의 동기
고따마 싯닷타(Gotama Siddhattha, Sk. Gautama Siddhartha)는 온갖 호화로움과 극진한 보살핌 속에서 청소년 시절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생활도 비범한 재능을 발휘한 학문이나 무예도 결코 싯닷타에게 만족을 주지는 못했습니다. 싯닷타는 부족함이 없는 왕궁의 생활에 마음을 빼앗기기보다는 인간이나 세계와 같은 보다 본질적인 문제들에 관해 깊은 사색에 잠기는 일이 많았습니다. 인생의 여러 가지 문제들 가운데서도 특히 그를 괴롭힌 것은 생(生) · 노(老) · 병(病) · 사(死)와 같은 삶의 가장 근원적인 문제들이었습니다.
아버지 숫도다나(Suddhodana, 淨飯王)와 양모 마하빠자빠띠 고따미(Mahapajapati Gotami, Sk. Mahaprajapati Gautama, 摩訶波闍波提瞿曇彌)는 이런 왕자를 조심스럽게 지켜보면서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싯닷타가 훌륭하게 자라나 왕위를 잇고 석가족(釋迦族)의 나라를 강성하게 만들어 줄 것을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싯닷타는 그런 세속의 일보다는 항상 근본적인 인간의 문제에 더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혹시 왕자가 출가(出家)하여 수행자가 되지나 않을까 늘 염려하였습니다. 싯닷타를 서둘러 결혼시킨 것도 이러한 걱정과 염려 때문이었습니다.1)
이와 같이 젊은 날의 싯닷타는 자신이 처한 위치와 근본적인 인간의 문제에 대해 고뇌하였던 것입니다. 여러 문헌들의 기록에 따르면 그는 자신의 호사스런 생활에 만족하지 못하고 인생의 문제에 대해 깊이 사색한 것으로 기술되어 있습니다. 그의 고뇌는 주로 생·노·병·사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이른바 사문출유(四門出遊)로서 정리되었던 것입니다.2)
초기경전인 <마하빠다나 숫따(Mahapadana sutta, 大本經)>에는 과거세(過去世)의 비바시불(毘婆尸佛)의 '사문유관(四門遊觀)'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느 날 붓다는 유원(遊園)으로 가기 위해서 곱게 꾸민 수레를 신두산(産) 말에 매고 가던 중, 머리는 희고 이는 빠진 채 지팡이를 손에 쥐고 부들부들 떠는 노인을 만남으로써 살아있는 모든 것이 늙는다면 태어나는 일 자체가 화(禍)라고 느꼈으며, 마찬가지로 질병과 죽음을 보고 인생의 덧없음을 알았고, 최후로 출가 수행자를 보고 자신도 집을 떠날 결심을 굳혔다"3)고 합니다.
이것이 후세에는 정형화(定型化)하여 사문출유(四門出遊)의 전설이 되었다는 것입니다.4) 이 전설에 의하면 태자는 왕성(王城)의 네 개의 문으로부터 출유(出遊)하여 각각 노인·병자·죽은 사람, 그리고 수행자를 만났다는 것이며, 이것이 출가의 동기(動機)였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붓다의 출가 동기로서 널리 전해지고 있는 '사문출유'의 전설은 후대의 불전문학(佛傳文學)인 <랄리따위스따라(Lalitavistara, 普曜經)>에는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어느 때 태자는 동쪽의 성문을 나와 노인을 만나고, 남쪽의 성문을 나와 병자를 만났으며, 서쪽 문을 나와 죽은 자를 만나 비애(悲哀)에 잠겼습니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북쪽 문을 나와 출가 수행자를 만나 그의 숭고한 모습에 감동하여 출가를 결심하였다고 합니다.
한편 팔리어로 씌어진 <자따까(Jataka, 本生經)>의 주석서 서설(序說)에는 사문유관(四門遊觀)의 설화가 다음과 같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처음 세 차례의 출유(出遊)에서 노인과 병자와 죽은 사람을 만나 도중에서 되돌아섰던 태자는, 네 번째의 출유 때 사문을 만나고서 자기 생애의 목표를 분명히 깨달았으므로 마음 가볍게 그대로 동산에 가서 해질 녘까지 즐겁게 놀았습니다. 동산의 못에서 미역을 감고 향을 뿌린 몸에 새 옷을 입고 산뜻한 기분으로 돌아갈 채비를 차립니다. 바로 이때 성 안에서는 태자비가 사내아이를 낳았으므로 숫도다나왕은 기뻐하면서 급히 시종을 보내어 태자에게 알립니다. 이 소식을 들은 태자는, "라훌라가 생겼구나!" 라고 외쳤습니다. 라훌라(Rahula)란 '장애(障碍)'라는 뜻입니다. 은애(恩愛)의 굴레가 늘면 출가 수행에 장애가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 말로 인해서 그 아이는 라훌라(羅候羅)라고 불려지게 되었습니다.
이날 태자의 귀로에는 시민들의 환영으로 떠들썩했다. 어느 길가에 왔을 때, 한 높은 누상(樓上)에서 무사 귀족의 딸 끼사 고따미(Kisa Gotami, 機舍喬答彌)가 태자의 행렬(行列)과 그 행렬 속의 태자의 빛나는 모습을 바라보며, 이런 노래를 불렀습니다.
이 노랫소리가 태자의 마음을 끈 것은 그 노래 속의 '행복하겠네'(Nibbuta)란 말이었습니다. 이 말은 태자가 늘 구해 마지않던 열반(涅槃)과 관련이 있는 말이었기 때문입니다.5) 태자는 '드디어 출가할 시기가 온 것을 깨우쳐주었다'라고 생각하고 아주 기뻐하며, 그 답례로 자기 몸에 지니고 있던 값비싼 진주 목걸이를 벗어 그녀에게 던져주었습니다. 끼사 고따미는 '태자는 날 사랑하고 있구나' 라고 생각하고 기뻐 어찌 할 줄을 몰랐습니다.
궁전에 돌아온 태자는 출가의 결심을 하고, 그 날밤 마부 찬나(Channa, Sk. Chandaka, 車匿)에게 분부하여 애마(愛馬) 깐타까(Kanthaka, 犍陟)를 채비하도록 합니다. 그리고 갓 태어난 아들에게 이별을 고하고자 하지만, 태자비의 팔에 안겨 있는 갓난아기를 만지면 태자비가 눈을 떠 출가의 기회를 잃어버릴 염려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대로 말없이 떠나버렸다고 합니다.6)
이처럼 불전문학(佛傳文學)에 씌어진 사문출유(四門出遊)의 이야기는 사실 그대로를 묘사한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이와 비슷한 사건들은 있었겠지만, 이것은 후대의 불전 작가들이 보다 드라마틱하게 윤색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입니다.7) 이것은 '인간 고뇌로부터의 해탈'이라고 하는 붓다의 출가 목적을 확실히 드러내려고 한 의도를 짐작할 수 있는 것입니다.8) 여하튼 싯닷타 태자가 왕궁의 호화로운 생활에도 만족하지 못하고 있을 때, 아들 라훌라(Rahula, 羅候羅)가 태어났습니다. 그는 이제 출가를 결행할 때가 왔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드디어 어느 날 밤 싯닷타는 남몰래 왕궁을 빠져 나와 출가 구도(求道)의 길을 나섰습니다. 후대 불전에 의하면 태자는 어느 날 밤 몰래 마부 찬나(Channa)를 앞세워 애마 깐타까(Kanthaka)를 타고 까삘라밧투를 빠져나왔다고 합니다. 그때 나이는 29세였습니다. 싯닷타가 뒷날 진리를 깨달아 붓다가 된 다음, 그는 자신의 출가 동기를 이렇게 술회하고 있습니다.9)
그는 일찍부터 늙고 병들고 죽는 것에 대하여 깊이 생각했고, 그 필연적인 인생의 괴로움을 슬퍼하였으며, 불완전한 인간 세상의 모습을 괴로워했습니다. 그 끝에 마침내 그러한 문제들을 모두 해결할 수 있는 길을 찾아 왕궁을 버리고 출가를 단행했던 것입니다. 그것은 진리의 길을 찾아 세속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던져 버린, 참으로 '위대한 버림' 바로 그것이었습니다.10)
2. 구도의 편력
이렇게 해서 사문(沙門), 즉 출가 구도자가 된 싯닷타에게 이제 중요한 것은 자신을 이끌어 줄 스승을 찾는 일이었습니다. 후대의 문헌에 속하는 테리가타(Theragatha, 長老尼偈)의 주석서에서는 그의 편력(遍歷)에 대해서 처음 박가와(Bhaggava)의 은신처를 찾아갔다고 합니다. 그는 많은 제자들을 거느리고 하늘에 태어나는 것을 목적으로 고행을 닦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싯닷타는 우선 이들 고행자들의 목적에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들이 원하는 일 또한 생과 사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길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을 떠난 싯닷타는 다시 브라흐만(Brahman, 梵天)과 해와 달과 불을 섬기는 사람들을 만난다. 여기서도 그는 역시 자신이 닦을 만한 수행이 아니라고 판단하게 된다.11)
이 외에도 많은 수행자들을 찾아 다녔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랄리따위스따라(Lalitavistara)>에 의하면, 그는 출가하여 바라문 여성 싸끼(Saki)와 바라문 여성 빠드마(Padma)의 은신처에 초대를 받았으며, 바라문 라이와따(Raivata) 성인과 뜨리만디까(Trimandika)의 아들 라자까(Rajaka)로부터 환대를 받았다고 합니다. 이 때는 싯닷타가 베살리에 도착하여 알라라 깔라마(Alara Kalama)를 만나기 전이었습니다.12)
이렇게 싯닷타의 구도 편력은 계속되었습니다. 까삘라왓투(Kapilavatthu)에서 동남쪽으로 약 1,000리 거리에 위치한 베살리(Vesali, Sk. Vaisali, 毘舍離城)로 가서는 알라라 깔라마(Alara Kalama, Sk. Arada Kalama, 阿羅羅伽羅摩)를 만나 가르침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로부터 배운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관(觀)하는 선정(禪定)' 즉 무소유처정(無所有處定)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에 만족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다시 길을 떠나 남쪽으로 내려가 당시 큰 나라였던 마가다(Magadha)국의 수도 라자가하(Rajagaha, Sk. Rajagrha, 王舍城)에 도착했습니다. 신흥의 도시 라자가하는 당시 상업과 문화의 중심지답게 수많은 사문들과 사상가들이 모여드는 곳이기도 하였습니다.
싯닷타는 그곳에서 웃다까 라마뿟따(Uddaka Ramaputta, Sk. Udaraka Ramaputra, 優陀羅羅摩子)라는 스승을 만나 그의 제자가 되었습니다.13) 웃다까 라마뿟다는 '상념(想念)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라고 관(觀)하는 선정(禪定)' 즉 비상비비상처정(非想非非想處定)을 이상으로 삼고 있었는데, 싯닷타는 여기에도 만족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비상비비상처정'은 '무소유처정'보다 더욱 미묘한 선정의 경지인 것은 사실입니다. 이러한 미묘한 선정에 들면 마음이 완전히 고요해지고 마치 마음이 '부동(不動)의 진리'와 합체(合體)된 것처럼 생각됩니다. 그러나 선정에서 깨어나면 다시 일상의 동요하는 마음으로 되돌아옵니다. 따라서 선정에 들어 마음이 고요해졌다고 해서 진리를 체득했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선정은 심리적인 마음의 단련이지만, 진리는 논리적인 성격을 갖습니다. 진리는 지혜에 의해 얻어집니다. 그래서 싯닷타는 그들이 택하고 있는 수정주의(修正主義)의 방법으로는 생사의 고통에서 해탈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그들의 곁을 떠났다고 합니다.14)
베살리에서 헤어진 알라라 깔라마와 함께 웃다까 라마뿟따는 당시 가장 명망높은 수행자들이었습니다. 선정(禪定), 즉 정신통일에 의해서 정신적 작용이 완전히 정지되어 고요한 경지에 도달함으로써 해탈에 이르고자 하는 것이 이들의 수행 목적이었습니다. 선정(禪定)주의자 또는 수정(修定)주의자라고 불리는 이들의 지도 아래, 싯닷타는 그들이 해탈의 경지라고 인정하는 최고 단계에까지 도달하였습니다. 그러나 이것 역시 모든 괴로움이 없는 완전한 경지는 아니었습니다. 정신통일이란 끊임없이 반복할 수밖에 없는 경지이며, 정신적 작용의 완전한 정지 또한 결국 죽음에 이르러야만 가능한 것이기 때문입니다.15)
그들은 수행의 목적과 방법을 혼동한 채 오로지 수행을 반복하고 있는 셈입니다. 이같은 모순을 알게 된 싯닷타는 더 이상 수정주의자들의 가르침을 답습하고 있을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동안 스승으로 삼아왔던 웃다까 라마뿟따와도 작별하였습니다.16)
싯닷타는 전통적인 수행자들로부터는 더 이상 기대할 바가 없음을 깨닫고, 다시 라자가하에서 남쪽으로 80㎞ 가량 떨어진 우루웰라(Uruvela, Sk. Uruvilra, 優樓頻螺)의 세나(Sena, 斯那) 마을에 있는 네란자라(Neranjara, Sk. Nairanjana, 尼連禪河) 강 근처의 숲속에 들어가 자리를 잡았습니다. 고행림(苦行林)으로 불리던 이 곳은 현재의 보드가야(Bodhgaya) 동쪽이었습니다. 이 곳에서 그는 새로운 결심으로 맹렬한 고행을 시작했습니다.17)
싯닷타가 구도자의 길에 들어선지 얼마되지 않았을 때, 마가다국의 수도 라자가하에 도착했습니다. 그는 라자가하의 성 밖의 판다바 산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빔비사라(Bimbisara, 頻婆娑羅)왕은 성 안에서 탁발하고 있는 싯닷타를 발견하고, 그 단정한 태도에 감탄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는 신하들을 시켜 그가 머물고 있는 곳을 알아낸 다음, 스스로 수레를 갖춰 판다바산으로 가서 동굴에 거주하던 싯닷타를 방문하고, 코끼리 무리를 선두로 하는 군대와 재력을 제공하여 원조하겠다고 약속했다고 합니다.
빔비사라 왕은 싯닷타의 출가 수도를 중지시키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싯닷타는 자신이 유서 깊은 샤카족 출신으로 욕망의 충족을 위하여 출가한 것이 아니라, 욕망을 벗어나 열심히 수도하기 위하여 출가한 것이라 하여 이 원조의 약속을 거절했다고 합니다.18) 이때 빔비사라 왕은 당신의 뜻을 이룬 다음 자신에게 그 진리를 가르쳐 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그래서 깨달음을 이룬 뒤 붓다는 빔비사라 왕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라자가하를 방문하여 그에게 법을 설하게 되었습니다.
Notes: 1) 동국대학교 불교문화대학 불교교재편찬위원회 편, <불교사상의 이해> (서울 : 불교시대사, 1997), pp. 53-54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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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행과 중도의 실천
1. 수정(修定)에서 고행(苦行)으로
붓다는 보리수 밑에서 깨달음을 이루기까지 몇 단계의 수행 과정을 거쳤습니다. 그는 처음에는 출가하여 알라라 깔라라(Alara Kalama)와 웃다까 라마뿟따(Uddaka Ramaputta)라는 두 스승 밑에서 선정(禪定)을 주로 배우고 닦았습니다. 그는 곧바로 스승들의 경지를 체득하였지만 거기에 만족하지 못하였습니다. 결국 그는 그들로부터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다고 판단하고 그들 곁을 떠났습니다. 이것은 나중에 언급할 수정주의(修定主義)의 포기를 의미합니다.
석존은 라자가하(Rajagaha, 王舍城)를 떠나 남서쪽 가야(Gaya, 伽倻) 교외, 우루벨라(Uruvela)의 세나(Sena) 마을에 있는 네란자라(Neranjara) 강 근처에 도달하였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고행하기에 적합한 장소를 찾았습니다. 이곳은 부근에 고요한 삼림이 있었고 강물은 맑아 경치가 매우 아름답고 풍요로운 곳이었습니다. 이곳에서 그는 오직 혼자서 여러 가지 고행을 실천하였습니다. 이것은 곧 수정(修定)을 버리고 고행(苦行)으로 나아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고행(苦行)은 당시 아지비까(Ajivika)나 자이나교(Jaina) 등의 사문들이 즐겨 실천했던 수행방법이었습니다. 아지비까는 숙명론자(宿命論者)였던 막칼리 고살라(Makkhali Gosala)가 이끌고 있던 교단이었습니다. 아지비까라는 명칭은 원래 단순히 각각의 '생활법(生活法)에 따른 자'라는 의미이지만 교단의 명칭으로 사용하여 '생활법의 규정을 엄격히 지키는 자'를 의미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종교사상에서는 '생활을 영위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고행하는 자'로 이해되었고, 훗날 한역경전에서는 '사명외도(邪命外道)'로 폄칭(貶稱)되었습니다. 아지비까에서는 고행도 자연의 정해진 이치, 즉 결정으로 보았다거나 고행 그 자체를 목적시하였다거나, 혹은 고행에 어떠한 실천적 의의를 인정하였을 것이라는 등 여러 가지 학설이 추정되고 있습니다. 어쨌든 아지비까 교도들은 생계수단을 위해서이건 철저한 고행주의의 입장을 취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또한 자이나교는 그 어느 종교 단체보다도 고행을 중요시하는 교단이었습니다. 자이나교의 교주 마하비라(Mahavira, 大雄)는 업(業, karma)을 미세한 물질로 보고 이 업이 외부로부터 신체 내부의 영혼에 유입(流入, asrava) 부착하여 영혼은 속박(bandha)하기 때문에 윤회의 생존이 되풀이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이러한 업에 의해 속박된 윤회에서 벗어나 영혼이 그 본성을 발현하여 해탈하기 위해서는, 미세한 업 물질을 지멸(止滅, nirjara)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계율을 지키고 고행을 실천하는 것이 필요한데, 그것은 출가수행에 의해 가능하다고 보았습니다. 출가 수행자는 불살생(不殺生) · 진실어(眞實語) · 부도(不盜) · 불음(不淫) · 무소유(無所有) 등 '다섯 가지 대금계(大禁戒)' 즉 오대서(五大誓)를 엄격히 지키고 몸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나형(裸形)으로 여러 가지 고행을 행하였으며, 때로는 단식 수행으로 죽음에 이르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붓다 당시 가장 엄격한 고행주의를 실천했던 사람들이 바로 자이나 교도들이었습니다.
2. 고행의 실천 내용
이러한 당시의 수행풍토에 따라서 석존도 본격적으로 고행을 실천했습니다. 석존께서 실천했던 여러 종류의 고행들을 경전에서는 언급하고 있는데, 석존은 그러한 모든 것들을 실수(實修)하였다고 합니다. 그것은 곧 마음을 제어하는 것, 호흡을 멈추는 것, 단식(斷食)에 의한 것, 절식(絶食)하는 것 등이었습니다.
경전의 설명에 따르면 마음을 제어하는 고행이란 단정히 앉아 아랫니와 윗니를 맞닿게 모으고 혀는 위턱에 붙이고 마음을 억제하여 고통스럽게 하는 것입니다. 호흡을 멈추는 고행이란 먼저 입과 코로부터의 호흡을 막으면 귀로 숨이 들락날락하게 되며 커다란 이명(耳鳴)이 들려 격심한 고통이 따릅니다. 이 귀의 호흡을 막으면 날카로운 정수리를 빠개는 듯한 고통이 일어나며 또한 질긴 가죽끈으로 머리를 휘감는 듯한 고통을 느낍니다. 그 숨이 하복부로 옮겨가면 배를 가르는 듯한 고통이 따릅니다. 마지막으로 이같은 호흡을 막고 있으면 마치 힘이 센 남자들이 힘이 약한 남자의 팔을 잡아 잿불 속으로 집어넣어 불에 타는 괴로움을 느끼게 하는 것처럼 온몸에 타는 듯한 괴로움이 일어나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석존은 그의 고행을 본 사람들이 그가 죽어버렸다고 여길 정도로 극심한 고행을 실천하였습니다. 그러나 이같은 극심한 고행을 실천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마음의 평안은 얻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석존은 일체의 음식을 끊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절식(絶食)에 의한 고행, 감식(減食)에 의한 고행을 계속한 결과 석존의 전신은 살이 빠져 갈비뼈가 앙상하게 드러났으며 눈은 움푹 들어가고 몸의 털은 부식하여 뽑혀지고 피부는 생기를 잃어 그때까지 아름답게 빛나던 황금색은 완전히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때의 일을 회상한 석존의 말을 경전은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습니다.
이 밖에 초기경전에서는 석존이 실천하였던 고행으로서 식사에 관한 고행, 신체적인 고행, 항상 먼지나 오물로 더렵혀져도 결코 몸을 씻지 않겠다고 하는 따위의 맹세를 지키는 것 등의 고행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모든 것을 석존이 실제로 실수하였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석존은 고행은 심신(心身)을 훼손시키는 것일 뿐 깨달음에 이르는 도(道)는 아니라고 명확하게 단정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석존은 마음을 제어하고 호흡을 멈추고 감식(減食)하고 혹은 단식(斷食)하였습니다. 죽음에 직면할 정도로 육체를 괴롭혔으며, 그러한 고통을 극복함으로써 강한 의지를 확립하여 해탈의 경지에 도달하려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고행은 6년간 계속되었다고 합니다.
3. 중도의 실천
그러나 그것으로도 역시 궁극의 해탈을 얻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석존은 고행이 해탈하는데 아무런 의미가 없음을 깨닫고 마침내 이것을 포기하였습니다. 그리고는 먼저 고행에 의해 극도로 쇠약해지고 더러워진 몸을 네란자라 강물에 깨끗이 씻고, 마을 처녀 수자따(Sujata, 善生)가 바친 우유죽을 섭취하여 심신을 회복한 후 깨달음에 이르는 자기 자신만의 수행 방법을 강구하였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수정주의와 고행주의의 두 극단을 떠난 중도(中道, Majjhim Patipada)인 것입니다.
이러한 중도를 비고비락(非苦非樂)의 중도(中道)라고 하며, 구체적으로는 팔정도(八正道, Ariya-atthangika-magga)가 바로 그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팔정도란 고(苦) · 집(集) · 멸(滅) · 도(道) 네 가지 진리 가운데 도제(道諦)의 내용이 되는 것으로, 바로 '열반으로의 삶'이다. 중도는 고(苦)도 아니고 낙(樂)도 아닌 중도(中道)를 말하지만 이는 단지 중간적인 것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며, 석존이 스스로 실천하여 정각에 도달한 도(道), 깨달음을 얻으려는 자라면 누구든지 실수(實修)하지 않으면 안 되는 도(道)를 말합니다.
일반적으로 초기경전에서 '도(道)'라고 할 경우 여기에는 두 가지 용법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중도라고 할 때의 도(道, patipada)로서 석존이 정각을 얻은 행도(行道)로서의 도(道)이며, 다른 하나는 객관적인 도법(道法)으로서 도(道, magga, Sk. marga)입니다. 전자는 깨달음을 얻으려는 수행자가 석존의 실천방법에 따라 스스로 실천하는 주체적 도(道)이고, 후자는 객관적인 도로서의 도(道)입니다. 중도라는 것은 두 가지 극단을 떠나 정각을 얻은 석존에게 있어 눈(眼)이 되고 지혜(智)가 되어 깨달음으로 이끄는 도(道)이기 때문에 다만 객관적인 진리성을 나타내는 도(道)일 뿐만 아니라 스스로 실천하는 주체적인 도(道)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4. 중도의 실천적·철학적 의미
한편 붓다 당시 인도의 철학과 종교는 크게 바라문(波羅門) 계통과 사문(沙門) 계통의 두 가지가 있었습니다. 전자는 베다·우빠니샤드에 근거한 인도 정통파의 입장에 속하는 것으로, 유일의 원리인 브라흐만(Brahman, 梵)으로부터 전 세계가 생겨났다고 하는 점이 사상적 특징이라 할 수 있으며 보통 전변설(轉變說, parinama-vada)이라고 합니다. 바라문 계 사상에 있어서는 전 세계가 어떻게 성립하였는가 하는 문제를 고찰할 때 먼저 브라흐만이라고 하는 근본원리를 세우고, 이러한 근본원리인 브라흐만이 자기 자신을 전개시켜 질료인(質料因)도 되고 동력인(動力因)도 되어 전 세계를 성립시킨다고 주장합니다.
반면 이러한 바라문 계 사상에 대해 비판적 입장을 취한 자유사상가들이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에는 육사외도(六師外道)들이 주장한 사상의 특징은 유일(唯一)의 원리로부터 복잡한 현상세계가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많은 독립된 원리와 요소가 어떠한 형태로서 결합하여 이 세계가 구성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아지따 께사깜발린(Ajita Kesakambalin)은 지(地) · 수(水) · 화(火) · 풍(風)의 네 가지 원소를 주장했습니다. 즉 인간은 이들 네 가지 원소로 구성되어 있으며 신체가 소멸함과 동시에 제(諸) 원소도 각각 분해한다고 설하였습니다.
빠꾸다 깟차야나(Pakudha Kaccayana)는 지(地) · 수(水) · 화(火) · 풍(風) · 고(苦) · 낙(樂) · 명아(命我) 등 칠요소(七要素)를 인정하였고, 사명외도(邪命外道, Ajivika)로 대표되는 막갈리 고살라(Makkhali Gosala)는 살아 있는 것을 구성하는 요소로서 영혼(靈魂) · 지(地) · 수(水) · 화(火) · 풍(風) · 허공(虛空) · 득(得) · 실(失) · 고(苦) · 낙(樂) · 생(生) · 사(死) 등 12 가지 원리를 주장하였습니다. 이처럼 여러 가지 구성요소가 결합하여 인간 및 세계가 성립한다고 하는 주장을 초기경전에서는 적집설(積集說 또는 積聚說, arambha-vada)이라고 합니다. 이 적집설은 바라문 계의 전변설에 비해 유물론적 색채가 강하며, 업(業, karma)이나 인과응보의 이치를 부정하는 경향을 띠고 있습니다.
종교상의 실천적인 측면에서 볼 때 바라문 계의 사상은 한결같이 선정을 실수함으로써 해탈을 얻는다고 주장한 데 반해, 이 적집설의 입장을 취하는 자들의 수행방법은 고행이었습니다. 그들은 적집설의 입장에 서서 육체와 정신의 두 가지 원소로 이루어진 인간은 정신이 육체에 의해 지배되어 더럽혀졌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육체를 고통스럽게 함으로써 정신이 육체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따라서 석존이 알라라 깔라마와 웃다까 라마뿟따의 가르침을 버리고, 또한 고행생활에 들어갔다가 이것마저 버렸다고 하는 사실은 수정주의(修定主義)로서 주장된 전변설과 고행주의의 근거로 삼는 적집설 양자를 극복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고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석존은 보리수 밑에서 깨달음을 얻음으로써 이러한 두 가지 입장과는 전혀 다른 새롭고도 보다 높은 차원을 획득하였던 것입니다. 그것은 전변설과 같은 절대 유일의 원리를 주장하며 그것으로부터 세계가 전개하였다고 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이 세계는 상호 의존의 관계에서 성립하였다고 관찰하는 연기(緣起)의 입장입니다. 그것은 '모든 여래가 세상에 출현하든 출현하지 않든 이 도리는 법으로서 정해져 있다'고 말하였던 것과 같은 우주의 이법(理法)이며, '연기를 보는 자는 법을 보는 자이고 법을 보는 자는 연기를 보는 자이다'라고 설하였던 것처럼 석존은 이같은 연기를 자각하여 각자(覺者) 불타(佛陀)가 되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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