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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1차 결집의 배경과 의미
제1차 결집은 부처님이 반열반에 들어간 후 개최된 최초의 ‘승려대회’를 지칭한다. 부처님께서 입적하자 제자들은 이후의 문제에 대해 논의했다. “법에 의지하고 자신에 의지하라”는 말씀을 남기셨지만 법을 들은 제자들이 늙어 죽게 된다면 그 다음에는 어떻게 할 것인가. 특히 부처님 가르침은 수기설법이 특징이기에 동일한 문제에 대해서도 듣는 사람의 근기나 기호 등등을 고려하여 다르게 설명됐다. 때문에 오해의 여지가 있을 수 있었다. 나아가 제자들이 수행할 때 지켜야 할 기준과 행동거지, 법을 실천하는 수행자 내지 재가 신도들 사이에 문제가 발생하거나 공동생활을 할 때의 규범 등에 대해서도 공동의 합의가 필요했다.
물론 부처님은 계율을 통해 다양한 사안에 대해 친절하게 가르침을 베풀고 있다. 그렇지만 어떤 경우 사소한 계율엔 구애받지 않아도 된다고 말씀하셨다. 무수한 세상의 일에 대해 일일이 언급할 수 없었다. 이런 점들이 결집을 개최, ‘공인된 가르침’을 만들어 놓을 필요성을 느끼게 했다. 결집과 관련된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집법비니오백인〉 등에 의하면 마하가섭이 파와에서 쿠시나가라로 가는 도중 만다라 꽃을 든 사명외도를 만났다. 외도가 쿠시나가라에서 왔다는 말을 듣고 스승인 부처님의 소식을 묻게 되는데 이미 7일전에 입멸했다는 대답을 듣는다. 이런 소식에 아직 번뇌를 다 끊지 못한 비구들은 슬퍼하게 되며, 그들 중에서 만년에 출가한 수밧다는 다음과 같이 소리치며 기뻐했다. “스승께서 살아계실 때는 우리들의 행위를 구속했지만 스승께서 안 계신 지금은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으니까 탄식할 필요가 없다.” 이런 모습을 본 마하가섭은 법(法)답지 않은 것이나 삿된 계율이 번성하기 전에 법과 율을 정비할 필요를 느꼈다.
이때 정비한다는 것은 여러 승려들의 공인을 받는 일이었다. 이러한 것을 합송(合誦) 내지 결집(結集)이라 말한다. 합송이란 문자로 기록되기 이전에는 공동으로 암송하는 것이 필요했으므로 승단 구성원이 공동으로 암송해야 한다는 점에서 강제의 의미가 있다. 결집이란 각자가 들었던 가르침, 즉 법과 율을 공인이란 과정을 통해 하나로 합쳤다는 의미이다.
마하가섭은 승려대회를 원만하게 완수하기 위해 당시 대표적인 승려 500명을 영취산 칠엽굴에 모아 법과 율을 정비하게 된다. 법은 아난이 암송하고, 율은 이발사 출신의 우바리가 암송했다. 과정이 순탄했던 것은 아니었다. 부처님 10대 제자의 한 분인 부루나 존자는 물론 사리불의 제자인 토라난타 등은 결집에 참석하지 않았다. 결집된 내용을 따르지도 않았다. 자신은 부처님에게 직접 들은 대로 살면 된다는 말로 제1차 결집에 대해 비판적인 견해를 보이는 것이다. 아난 역시 처음에는 아라한과를 증득하지 못했다는 가섭의 질책으로 결집에 참여할 수 없었다. 일주일간 밤낮으로 용맹정진하여 아라한과를 증득한 뒤에 참여할 수 있었다.
불교사에서 중요한 것은 제1차 결집 이후 율을 암송하는 지율자, 법을 암송하는 지법자, 대중에게 설법을 하는 설법자, 경전을 암송하는 지경자 등의 전문 영역이 발생하게 되며, 이것이 사상의 전승계보로 발전하게 된다. 그렇지만 결집에 참여하지 않고 독자적인 생활을 하는 부처님의 제자들이 있었다는 점에서 이후 전개되는 부파불교 내지 대승불교에서 다양한 사상을 꽃피울 터전이 마련됐다.
2. 아난의 참회와 그 의미
부처님 제자들 중에서 아난은 매우 개방적인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출가 이래 부처님께서 열반에 들어갈 때까지 ‘비서’ 역할을 했기에 수많은 설법을 경청했으며, 들은 것을 기억하는 능력이 매우 뛰어난 인물이었다. 그래서 다문(多聞)제일이라는 칭호를 얻게 되었다. 문제는 결집 이후에도 아난이 여러 가지 이유로 문책을 받는다는 점이다. 〈십송율〉, 〈아육왕경〉, 〈사분율〉, 〈마하승기율〉 등 많은 자료를 통해 알 수 있다.
여러 가지 자료를 종합하면 아난 개인이 지닌 이미지와 달리 가섭을 비롯한 교단의 지도자들은 아난을 거세게 비판한다. 그것은 대략 열 한가지의 이유 때문이다. 우선 여인을 출가시켜 정법이 머무는 시간을 단축시켰다는 점이다. 둘째는 부처님에게 일 겁만 더 세상에 머물러 달라고 간청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경전에 의하면 부처님이 아난에게 자신의 열반을 예고했음에도 아난이 듣고 더 머물러 달라고 간청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셋째는 부처님 앞에서 별도로 설법한 것이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비유를 설하셨는데 아난이 그것을 듣고 그 자리에서 해설한 것을 지칭한다.
부처님의 제자중 개방적 성향 보수파 비판속 지혜롭게 대처
넷째는 부처님의 옷을 자신도 모르게 밟고 지나간 것을 말한다. 다섯째 부처님께서 춘다의 공양을 받고 설사병을 얻었는데도 쿠시나가라로 여행하는 도중에 목이 마르다고 물을 달랬는데 주지 않은 것이다. 아난이 물을 뜨기 위해 냇가에 가 보니 마침 마차 행렬이 지나가 흙탕물이 되어 있었다. 그래서 그냥 돌아온 사건을 지칭한다. 여섯째는 소소계가 무엇인지 묻지 않은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당신이 열반에 들어간 뒤에는 소소한 계율에는 구애받지 않아도 된다고 말씀하셨지만 소소계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묻지 않았던 것이다. 일곱째는 부처님의 음장상을 보여주게 한 것이다. 율장에 따라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비구니들 혹은 여인들 앞에서 아난이 부처님의 음장상을 보여 달라고 청하는데 이에 부처님께서 ‘거시기’를 보여주신 사건이다. 인도의 문화적 배경에선 전혀 이상하지 않은 일이다. 여덟째는 여인들이 부처님의 발을 더럽히게 한 죄이다. 부처님께서 열반하여 전단향으로 만든 관에 입관했는데 여인들이 구태여 보고 싶다고 하자 보여 주게 되며, 보던 여인 중의 한 노파가 슬퍼 울자 눈물이 부처님 발에 떨어져 오염되었다는 것이다. 아홉째는 결집을 위해 500명의 아라한을 선정할 때 아난에겐 음욕 분노 어리석음의 세 허물이 남아 있다고 말한 것이다.
열 번째는 〈사분율〉에 의하면 부처님에게 공양하고 싶은 사람은 세 번 청하게 만들어야 하는데 아난은 그러하지 않은 것을 말한다. 열한 번째는 서른 명의 비구를 환속시킨 죄이다. 이유는 아난은 제자들이 원하는 가르침을 가르쳐 주지 않아서 그들이 환속했다는 것이다. 이상에서 열거한 죄목들은 권위적이고 보수적인 분위기를 보이고 있기에, 아난이 상당히 개방적인 사고를 한 인물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아난은 왜 이토록 비난을 받았을까. 상대적으로 보수적인 수행자 그룹이 부처님 열반 이후 교단을 주도하게 됐음을 의미한다. 지계(持戒)를 강조한 수행자들이 부처님 열반에 즈음해, 주도적 역할을 담당한 아난의 권위를 떨어뜨리고자 했을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아난은 당시 교단 핵심 세력들에 의해 거부된 것으로 보인다. 만약 이 때 아난이 어려움을 극복하지 못했다면, 부처님의 활달하고 자유로운 기풍은 보수적이고 권위적인 기풍에 갇혀버렸을 가능성도 배제하기는 힘들다. 아난은 어려움을 슬기롭게 극복해 부처님 가르침이 전승되도록 했다고 여겨진다.
3. ‘삼처전심’과 그 허실
가섭존자가 부처님 정통제자 계승 선종 정통성 주장하는 근거로 활용
‘삼처전심(三處傳心)‘이란 말이 있다. 부처님께서 세 곳에서 당신의 마음을 가섭존자에게 전했다는 내용이다. 부처님의 마음은 마하가섭존자에게 전하고, 부처님의 말씀인 법은 아난존자에게 전했다는 것은 여기서 기인한다. 물론 이러한 주장은 선종이 중국불교의 주류 종파가 되면서 더욱 일반화됐다. 때문에 부처님의 마음을 계승하고 있는 종단은 선종이며, 선종이 교종보다 정통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을 묵시적으로 보여주는 예로 흔히 삼처전심이 거론된다. 언어로 표현되는 말이란 마음을 나타내기 위한 도구이지만 그 도구는 원초적인 한계를 지니고 있다. 즉 언어라는 도구로는 마음을 100% 표현할 수 없다는 점이다.
삼처전심이란 우선 〈중본기경〉에 나오는 ‘다자탑전분반좌’를 말한다. 이 경의 ‘대가섭시래품’에 의하면 부처님이 다자탑 앞에서 설법하고 있을 때 가섭존자가 그곳에 나타나자, 부처님은 당신이 앉으셨던 자리를 반쯤 비켜 앉고 그 자리에 가섭존자를 앉게 했다. 〈법화경〉‘견보탑품’에도 이불병좌(二佛幷坐)라는, 나란히 앉는 부처님이 나오는데, 이것은 법의 정통성을 전해주는 것이라 해석된다. 계족산에서 가섭존자가 선정삼매에 잠겨 미륵불을 기다리고 있으며, 미륵이 오면 부처님이 부탁한 금란가사를 전하고 열반에 들어갈 것이란 이야기도 동일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두 번째는 〈대범천왕문불경의경〉에 나오는 ‘염화시중의 미소’다. 즉 대범천왕이 영취산에 모인 대중을 위해 법을 청하자 부처님은 말없이 당신이 제자들에게 받은 꽃을 들어보였으며, 마하가섭존자만이 꽃을 들어 보인 이유를 알고 빙그레 웃게 된다. 그러자 부처님께서는 “내게 있는 정법안장인 열반묘심과 실상무상의 법문은 문자를 세우지 않고, 교학 밖에 따로 전하는 것이니 마하가섭에게 부촉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경은 후대 중국에서 위찬된 것으로 알려져 있고, 전체적 내용에서는 밀교 영향도 보인다.
세 번째는 ‘곽시쌍부’다. 이것은 부처님의 열반을 지켜보지 못한 가섭존자가 늦게 돌아와 안타까워하자 관 속에서 부처님의 두 발이 밖으로 나와 가섭에게 자신의 마음을 전했다는 것을 말한다. 〈대반열반경〉 ‘기감다비품’에 나오는 내용은 불성사상의 영향이 보이고 있고, 부처님이 신격화된 이후의 내용이다. 상징이 풍부하고 신화적이기에 교단사와 결부시켜 해석하는 것은 곤란하다.
〈잡아함〉 ‘유행경’에 의하면 가섭존자가 쿠시나가라에 당도했을 때는 이미 부처님의 유해가 입관된 뒤였다. 가섭존자는 아난존자에게 유체를 볼 수 있게 해 달라고 청했다. 아난존자는 “아직 다비를 하지는 않았지만 여법하게 입관을 마쳤기 때문에 볼 수 없다”고 답했다. 세 번에 걸쳐 간청했지만 법구를 볼 수 없었다. 이에 가섭존자가 관을 올려놓은 향나무로 된 장작더미 쪽으로 가자 관속에서 부처님의 두 발이 나왔다. 부처님의 다리에 이상한 색깔이 남아 있었다. 아난존자에게 이유를 물었다. “어떤 노파가 슬피 울며 앞 손으로 부처님의 다리를 어루만지다, 발 위에 눈물을 떨어뜨렸기 때문에 생긴 것”이라고 아난존자가 답했다.
부처님 법구가 염습을 끝내고 입관된 뒤에 당도했기에, 가섭존자는 유해를 보지 못했다. 그렇지만 관 속에서 두 발이 나왔다는 신비한 현상을 통해 가섭존자가 부처님의 정통 제자임이 확인한다. 반면 아난존자에게는 괘씸죄가 하나 추가된다. 개인적으로 이 사건에 대해 해석하면 “아난존자의 순수성을 의심하기 보다는, 가섭존자가 약간 비종교적으로 행동하지 않았을까”하고 생각한다. 믿음이 종교에서 가장 중요하지만 때로는 그것만으로 설명이 안 되는 점도 있기 때문이다.
4. 우파리와 계율의 전승
‘10대 제자’된 석가족 전속 이발사 부처님의 계급제도 철폐의지 상징
과거 오랜 세월동안 사람들은 세상이 평등하기를 원했다. 그렇지만 그것은 여러 가지 이유로 쉽게 달성되지 않았다. 세상의 다양한 현상과 평등을 등치시키는 것은 현재도 과제로 남아 있다. 인간사회에 평등이라는 것은 과연 요원한 이상에 불과한 것인가. 부처님은 당시 인도사회의 지독한 계급모순을 타파하기 위해 노력했으며, 그 단적인 실례가 우파리존자다. 하지만 우파리존자는 불교의 한 축인 계율을 암송한 사람으로 더 유명하다.
〈오분율〉에 의하면 부처님이 열반에 들자 마하가섭존자의 주도로 제1차 결집이 단행된다. 마하가섭존자는 사회를 보며 우파리존자에게 물었다. “계율을 암송하며 전승하는 방법은 무엇이며, 4바라이의 각각의 규정은 어디서 누구에게 어떤 사정에 따라 부처님이 제정하게 되었는가.” 마하가섭존자의 질문에 대답하는 형식으로 계율은 확립되며, 이렇게 해 각각의 조항이 만들어졌다. 계율이 제정된 사정, 유래, 사람, 규제, 규제에 따름, 범계, 범계가 아닌 것 등이 그것이다.
스리랑카에 전하는 〈디파밤사〉에 의하면 우파리존자로부터 시작되는 율의 전통은 다사까, 소나까, 씨가와, 목갈리풋따 띠사, 마힌다 등으로 전해졌다. 우파리존자는 부처님을 모시고 44년간 수행했으며, 부처님의 열반 이후(불멸후) 30년간 계율을 전하는데 헌신했다. 즉 법랍 74세에 입적한다. 그렇지만 그가 언제 태어났는지에 대해선 알 수 없다. 불멸후 16년 되던 해에 제자인 다사까에게 구족계를 주는데 우파리존자의 법랍이 만 60세 되던 해의 일이다. 불경에 자주 등장하는 빔비사라왕은 52년간 재위했으며, 그의 아들이자 데바닷다와 결탁하여 부처님을 궁지에 몰아넣었던 아자따삿뚜는 32년 통치했다. 다사까에게 구족계를 준, 불멸 후 16년은 아자따삿뚜가 다스리던 시대였다. 그리고 우파리가 입멸한 불멸 후 30년 되는 해는 이미 아자따삿뚜의 아들인 우다야받다가 즉위한지 6년째 되는 해였다. 인도 민족의 역사의식이 워낙 희박하여 정확한 연대를 고증하지 못하고 있다. 다만 상당히 장수했다고 추정할 수 있을 뿐이다.
우파리존자에 대해 알려진 것은 출가하기 전 그의 신분이 석가족의 전속 이발사였다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성취한 뒤 인도를 순력하다가 고국인 카필라성에 방문하게 되자 많은 석가족 젊은이들이 출가하게 된다. 우파리는 출가하는 석가족 청년들을 보면서 느낀 바 있어 그들 보다 앞서 출가하게 된다. 〈방광대장엄경〉에 의하면 부처님을 찾아가 “신분이 좋은 사람들도 출가하는데 저같이 비천한 몸이 무슨 욕심이 있어 출가하지 못 하겠습니까”하며, 출가를 간청했다고 한다.
그의 출가는 단순하지 않았다. 그보다 늦게 출가하게 된 석가족의 수많은 사람들이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그에게 절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우파리존자에게 절하지 못하겠다고 버티는 석가족 사람들이 나타나기도 했다. 그들에겐 출가를 허락하지 않았다. 인간은 본래 평등하지만 각자의 노력 여하에 따라 빈부귀천이 달라질 뿐이란 가르침에 따른 것이다. 부처님의 단호함을 알게 된 석가족들은 모두 우파리존자에게 절한 뒤에 출가했다. 당시 사회적 관습에선 경천동지할 사건이었다. 우파리존자는 출가 이후 부처님의 10대 제자가 될 정도로 수행에 매진, 지율자의 전통을 확립했다. 보다 중요한 것은 인도사회에 만연된 계급제도를 철폐하고자 하는 부처님의 의지를 우파리존자를 통해 볼 수 있다는 점이다. 인간의 평등과 자유의지, 그에 상응한 인간 각자의 노력이 대단히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소중한 실례가 ‘우파리존자의 존재’라 할 수 있다.
5. 확신의 수행자 부루나 존자
부처님 10대 제자로 1차 결집에 불참 음식물 계율 ‘검개칠사’가 갈등핵심
포교제일 부루나존자. 그는 확신과 신념으로 뭉친 수행자였다. 부처님 가르침을 받기 전부터 이미 수행하고 있었고, 스스로 윤회의 흐름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했을 정도로 확신에 차 있었다. 그런 그가 부처님 명성을 듣고 찾아와 가르침을 청했다. 가르침을 듣고 난 다음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알고 수로나국으로 전도를 떠났다.
수로나국 사람들은 매우 포악했다. 부처님의 염려에 대해 부루나존자는 “수로나국 사람들이 욕하면 때리지 않는 것을 고맙게 생각할 것이며, 돌이나 몽둥이로 때리면 칼로 찌르지 않는 것을 고맙게 여길 것이며, 칼로 찌른다면 죽이지 않는 것을 고마워 할 것이며, 죽이고자 하면 일부러 자살하는 사람도 있는데 육신의 고통을 덜어주는 수고를 대신해 주는 것에 감사할 것”이라고 답했다. 이후 부루나존자는 수로나국에서 활동하는 중에 맞이하게 된 하안거에서 500명의 재가자들을 위해 설법했다. 500군 데의 가람도 건립했다. 부처님을 떠날 때 그가 가지고 간 것은 의발과 와구뿐이었지만, 그의 진심이 포악한 수로나국 사람들을 순화시켰던 것. 〈잡아함경〉 ‘311경’에 나오는 ‘부루나존자 이야기’다.
부처님 가르침을 몸으로 실천했던 부루나존자는 부처님의 10대제자 중의 한명으로 불교사에 찬연한 빛을 뿌리지만, 마하가섭존자가 주도했던 제1차 결집에는 동참하지 않았다. 이유에 대해서는 문헌에 따라 차이가 있다. 〈오분율〉 등 여러 불전에 ‘검개칠사(儉開七事)’이야기가 전한다. 〈사분율〉에 의하면 왕사성에서 제1차 결집이 있었다는 소문을 들은 부루나존자는 마하가섭존자의 처소로 찾아갔다. “모든 것을 다 인정해 줄 수 있지만 일곱 가지 부분은 따를 수 없다. 나는 부처님에게 직접 들은 것이 있으니 그대로 할 것”이라고 미하가섭존자에게 말했다. 〈남전대장경〉에 의하면, 부루나존자가 왕사성에 당도하자 장로들이 찾아와 “벗, 부루나여. 장로들은 법과 율을 결집했다. 이 결집을 받아주시오”라고 말했다. 그러나 부루나존자는 “벗들이여, 법과 율을 잘 결집했다. 그러나 나는 세존의 면전에서 듣고 받은 대로 행할 것”이라고 말했다고 나온다.
이런 내용은 부루나존자가 결집의 일부 내용에 대해 동의하지 않았음을 말해준다. 핵심은 ‘음식물의 저장과 만드는 것에 관한 계율’이다. “우선 음식물을 비구의 처소에 저장해도 좋다. 둘째 사찰 안에서 음식을 요리해도 좋다. 셋째 비구 자신이 음식을 만들어도 좋다. 넷째 시주나 정인(淨人)이 없는 경우 스스로 음식을 취득하거나 정인을 구해 그 사람에게 받아도 된다. 다섯째 스스로 과일을 취득할 때 나무라 생각하든가 정인을 구해 그 사람에게 받도록 한다. 여섯째 수중의 연뿌리 같은 음식은 연못물을 정인이라 생각하고 물에서 취한다. 일곱째 과일 등은 정인이 없으면 씨앗을 제거하고 먹으면 된다”는 게 그 내용. 이것을 ‘검개칠사’라 한다. 부루나존자가 주장한 일곱 가지 사항은 마하가섭존자가 결집한 율장에선 모두 금지조항이다. “출가자는 철저하게 무소유를 지켜야 하며, 유리걸식해야 한다. 무소유의 정신을 지키기 위해 시주자나 정인을 찾아 그에게 받아야한다”는 이유에서였다.
사실 유리걸식은 불교뿐만 아니라 인도 전래의 전통이었다. 그러나 부처님은 상황에 따라 융통성을 발휘하도록 했다. 소소계는 버려도 좋다고 말한 것과 마찬가지다. ‘교조적인 고집’ 보다는 ‘본질적인 정신’을 추구하고자 했던 것. 부처님의 이런 정신을 검개칠사 고사를 통해 더욱 분명히 알 수 있다.
차 차 석 / 동국대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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