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동도 읍내리에서 연산군을 만나다.
몇 년 만에 다시 교동도를 찾았고, 대룡리를 지나서 교동 현의 현청이 있던 읍내리를 찾았다. 언제나 가도 많은 상념을 불러오는 곳이 이곳, 읍내리이기 때문이다.
교동읍성의 북문 안에는 부군당府君堂이라는 신당집이 있는데, 이 당이 만들어진 것이 이채롭다. 조선 제 10대 임금인 연산군이 중종반정으로 쫓겨난 뒤 1506년 9월에 이곳 교동으로 추방되어 와서 살다가 그 집에서 병이 들어 죽은 뒤 인근에 살고 있던 사람들이 연산군과 그의 아내인 신씨의 화상을 모셔놓고 원혼을 위로하는 제사를 지내던 곳인데, 다른 이야기도 전해져 온다.
연산군이 죽은 섣달에 섬 처녀를 하나씩 골라 이 당집에 등명燈明을 드렸다는데, 등명을 드는 처녀는 달거리를 보기 이전이어야 하고 몸에 상처가 없어야 했다고 한다. 그런데 한번 등명을 들고 나면 연산까시라고 해서 귀신이 붙는다고 혼인을 하려고 하지 않아 육지에 나아가 무당이 되었다고 한다.
연산군의 불행은 성종의 왕비였던 어머니 윤씨가 질투심으로 인해 폐비가 되면서 시작되었다. 어린시절을 고독하게 보냈던 연산군은 임금으로 등극하면서 어머니의 비참한 죽음을 알게 되자 눈이 뒤집혔다.
자신의 내면에 숨겨져 있던 광폭한 성격을 숨기지 않고 표출하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그는 그의 어머니 윤씨를 내쫒거나 죽이는데 반대하지 않았던 사람들은 물론이고 심부름을 했던 사람들까지 모조리 대역죄에 걸려 죽임을 당했고 심지어는 그들의 친척들까지 그냥 두지 않았다.
그 현장에 있었던 한명회. 정창손 등 그 사건에 관여했던 중요한 인물 12명은 십이 간奸이라고 해서 그때까지 살아있던 사람들은 목을 베고 죽은 사람들은 무덤을 파헤쳐 뼈를 가루로 만들어 바람에 날려 보냈다. 그의 어머니 윤씨를 헐뜯었다는 죄목으로 성종의 후궁 엄숙의와 정숙의를 궁중 안뜰에서 손수 몽둥이로 때려 죽였고, 그것을 말렸던 인수대비마저 머리로 부딪쳐서 죽게 만들었다. 임금의 자리에 있었던 12년 동안 연산군은 무오사화戊午士禍와 갑자사화甲子士禍등 두 차례의 사화를 통해 수많은 사람들을 죽였다.
그는 아무리 가까운 사람일지라도 그 자신을 비판하는 사람을 용납하지 않았던 전형적인 독재자였으나 그 자신의 말로는 비극적이다. 연산군 재위 12년인 9월 초 하루 지중추부사 박원종朴元宗과 성희안成希顔등이 밤을 틈타서 창덕궁을 포위하고 정현왕후 윤씨를 찾아가며 연산군의 시대는 막을 내렸다.
그가 이 교동도에 유배를 올 때 연산군의 차림새는 붉은 옷에 띠도 두르지 않았다고 한다. 행인들이 모두 손가락질을 했으므로 갓을 깊숙이 눌러쓰고 평교자에 실려 갔는데, 그 때 나인 4명에 내시 2명, 반감飯監 1명 등 함계 7명이 수행했을 뿐이라고 한다.
바다 가운데에서 큰 돌풍이 일어서 배가 뒤집히려 하자 연산군은 ‘하늘이 무섭다‘고 떨었고 그것을 지켜본 호송대장 심순경이 “이제야 하늘이 두려운 줄 아셨습니까?” 하였다는데, 그때부터 연산군과 관계가 있는 사람이 이 뱃길을 지날라치면 한번 씩 풍파가 있었다고 한다.
연산군이 이곳에 왔을 당시의 상황이 호송대장 심순경沈順徑의 보고에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지나는 길가의 늙은이나 아이들이 모두 분주하게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다투어 서로 손가락질을 하여 마치 통쾌하게 여기는 듯 하였습니다. 안치한 곳에 이르니 울타리 한 곳은 처마에서 열 자쯤 거리를 두어 몹시 협착하여 해를 볼 수 없었고, 다만 한 개의 조그만 문이 있어서 겨우 음식물을 운반하고 말을 전할 수 있을 뿐이었습니다. 폐왕이 울타리 안에 들어가자마자 시녀들이 목 놓아 울부짖으며 호곡하였습니다. 저희가 작별을 고하니 폐왕이 말하기를 ‘나 때문에 멀리 오느라 수고했다. 고맙고 고맙도다.‘하였습니다.
연산군은 이곳 적소에서 그로 인해 희생당했던 수많은 원귀들의 환상에 쫒긴 채 미치광이 같은 나날을 보내다가 그해 12월에 ‘부인 신비愼妃를 보고 싶다’는 말 한마디를 남기고 병들어 죽었다. 그 때 그의 나이 31세였다.
그 뒤 이곳 교동도 사람들은 연산군의 환영이 두려운 나머지 그가 죽은 바로 뒤 켠에 당집을 짓고 연산궁의 화상을 모셔놓고 진혼鎭魂굿을 벌렸으며 연산군이 죽은 섣달에는 섬 처녀를 한 사람씩 등명燈明을 드렸다. 등명을 드린다는 것은 당의 신堂神에게 섹스 서비스를 하는 것으로 일종의 처녀봉공處女奉供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 때 등명 드는 처녀는 반드시 달(달거리)을 보기 이전이어야 하고, 몸에 상처가 없어야 했으므로 되게 까다로웠다고 한다. 한번 등명을 들고나면 연산각시라 하여 귀신이 붙었다는 이유로 혼인을 하려고 들지를 않아서 뭍으로 나가 무당이 되었다고 한다.
이런 사연을 지닌 교동도 읍내리에 있는 부군당에는 지금도 나라 곳곳의 무당들이 한 달에도 7,8십명이 찾아와 기도를 한다고 하니, 죽은 연산군이 이런 사실을 안다면 고마워 할까? 부끄러워 할까?
2026년 3월 3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