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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정일이 건너는강

사라진 나의 고향 집터에서

작성자신정일|작성시간26.06.21|조회수75 목록 댓글 4

사라진 나의 고향 집터에서

 

오랜만에 고향에 갔다. 진안군 백운면 백암리 상백(바우마을) 우리 땅 걷기 도반들과 찾아간 고향집, 집은 없고, 터만 남아 마을의 주차장이 된 집, 그곳에서 두리번 거리며 박심청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던 나의 할머니를 찾아도 할머니는 보이지 않고, 정적만 감돌던 집터, 그곳이 나의 고향이다.

 

꿈을 꾸기만 하면 고향이여, 그게 고향이여,”

금강 천리 길을 한 걸음 한 걸음 걸을 때 <용담댐> 부근에서 만난 수몰민의 말이다. 고향이라는 말이나 단어만 들어도 가슴이 뭉클해지는 고향을 두고 <푸른 꽃>의 작가인 노발리스는 자연의 모든 압력은 고향에 대한 추억이다.”라고 말했다. 나이가 들수록 자꾸 그리워지면서 애잔해지는 고향에 대한 기억 중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무엇일까?

아무래도 내가 태어나고 살았던 집이리라. 그런데 내가 태어나고 자란 그 집이 어느 사이에 형체도 없이 사라져 버리고, 그 자리가 마을의 공동 주차장이 되고 말았다. 내 기억 속에 언제나 존재했던 그 집이 현실의 공간 속에서 사라져 버리면서 내 고향은 단원 김홍도나 겸재 정선 등 옛 사람들의 그림 속 마을처럼 아득해져버리고 말았다. ‘고향마음속에 떠오르기가 무섭게 달려가고 싶고, 품 안에 안기고 싶던 고향이 갈 수 없는 섬이 아니고, 아무리 용을 써도 다시는 볼 수 없이 흔적조차 없이 사라져 버리고 만 것이다.

어릴 적부터 한 번도 윤택한 삶을 살아보지 못하고 가난 속에 살았던 우리 가족을 지탱하고 있던 우리 집을 떠 올려 본다. 어른들이 몸채라고 부르던 본채와 방과 부엌, 그리고 나뭇간과 외양간과 닭장이 있는 집 한 채 , 그리고 헛간과 타고 남은 재를 시용하는 칙간(화장실)이 있는 건물 등 총 세 채의 초가집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마을의 중심 대로인 큰 길 건너편에 마을 모정이 있었고, 작은 골목을 들어서면 담장 옆에 큰 은행나무 한그루가 있었다. 그 나무는 숫(남자)나무라서 은행은 열리지 않았다. 곧 바로 들어가면 상관이네 집으러 들어가는 대문이 보이고, 은행나무 옆에 항상 열려져 있는 싸리대문이 있었다. 집으로 들어서면 좌측에 서 있는 것이 칙간과 나뭇간이 있는 집이고 오른 편에는 거름으로 쓰기 위해 받아둔 소변을 모아두는 큰 항아리가 묻혀 있었다. 그 옆 터 밭에 뽕나무 몇 그루와 낙엽 송 한 그루, 호두나무와 감나무가 있었고, 몸채는 바로 감나무가 그늘을 드리운 그 옆에 서 있었다.

측면 2칸에 정면 3칸인 우리 집 본채에는 방이 골방까지 세 개에 마루, 그리고 제일 끝자락에 위치해 있는 부엌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큰 방은 할머니가 기거하는 방이자 겨울에는 삼을 삼든지 사람들이 모여 공동의 일을 하는 공간이고, 마루 옆에 있는 작은 방이 부모님이 기거했던 방이다. 그 방에서 어머니는 나와 두 동생을 낳았다고 했다. 마루는 지금 생각해 보아도 견고하긴 했지만 항상 삐걱대기 일쑤였다.

본채 뒤가 바로 뒤 안이라고 부르던 곳으로, 장독대와 함께 본채에 달린 광이 있었다. 광에는 꿀이며 감이며 곶감과 아편(그 시절은 아편이 담방 약으로 필요했다.) , 집에서 가장 귀중하다고 생각되는 것들이 들어 있었고 장독대 옆에 늙은 대추나무 한그루가 서 있었다.

그런데 우리 집을 지탱하고 있는 모든 기둥들이 하나같이 못생긴 나무들이었다. “못 생긴 소나무가 선산을 지킨다.”라는 속담을 따라서 그랬는지, 집만 보아도 실감나게 가난한 집의 전형을 보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어찌 보면 아주 해학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안성 청룡사 대웅전을 받치고 있는 기둥이나, 서산 개심사 심검당의 기둥처럼 자연 그대로의 나무인데다 그 S자로 구부러진 나무들이 우리 집 본채를 지탱하고 있는 기둥들이었다. 어린 시절, 아무것도 모르는 시절에도 나는 가끔씩 이런 생각을 했었다. “산에 가면 그렇게 쭉 뻗은 소나무들이 많은데, 어쩌면 저렇게 구부러지고 구부러진 못난 소나무들을 수소문해 모아 가지고 집을 지었을까사실 집을 짓는 것도 곧은 나무로 짓는 게 쉽지, 구부러진 나무로 짓는 게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 집이 남아 있다면 그런 건축사적 특징만 가지고도 지방문화재로 등록되기는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본채 바로 서쪽에 자리 잡은 집이 우리 집에서 유일하게 곧은 나무로 번듯하게 지은 사랑채이다. 작은 아버지 내외가 살기도 했고, 작은 아버지가 분가를 한 뒤부터는 비어 있기도 했던 그 집에 외양간이 있어 소가 한 마리 살았다. 바로 이웃해서 닭장이 있어 여나 문 마리의 닭들이 들락거리며 살던 곳이었다.

마당 가운데에는 제법 큰 바위가 있어서 내가 가끔씩 걸터앉아 구름이 떠가는 하늘을 보았던 곳이다. 저녁 무렵 들일을 나갔던 식구들이 하나 둘씩 돌아와 부엌에선 밥을 짓는다. 밥 짓는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그 풍경 속에 마당에선 작은 아버지와 삼촌이 소에게 줄 여물을 작두로 잘랐다. 그리고 밥상에 둘러앉으면 하루 동안에 일어났던 일상의 이야기들이 전설 속 이야기처럼 풀어져 나왔다.

유달리 내성적이었고, 거기에다가 유달리 외로움을 탔던 어린 시절 나는 그 시간을 가장 사랑했고 기다렸다. 왜 그랬는지는 나도 모른다. “오늘 왜 그렇게 더웠다냐누구에게도 아니고 그 자신에게 묻는 할머니의 말씀 뒤에 언제나 비가 시원하게 올랑가

 

밥을 먹고 조금 있으면 어둠이 서리서리 내리고 주먹만 한 별이 마당 안에 가득 쏟아져 내렸다. 그 때쯤이면 마당 한 편에 쑥이며 잡풀들이 뒤섞인 풀들로 모깃불을 피우고 멍석을 폈다. 매캐하게 마당 가득 모깃불이 타는 연기가 퍼져 나가는 그 사이, 금방 솥에서 쪄 가지고 온 김이 모락모락 나는 감자와 옥수수를 가지고 할머니가 나왔다. 그 음식을 나누어 먹으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그러다가 멍석에 누워서 지붕 너머 하늘을 보면 하나둘씩 살아나던 별빛 들 사이로 부서져 내리던 은하수 무리, 그 때 세상은 온통 아름다움으로 가득 차는 것이었다.

 

나는 시골에서 외롭게 살았고, 조용한 삶의 단조로움이 어떻게 창조적인 정신을 자극하는지를 알게 되었다.” 아인슈타인의 글이다.

아인슈타인의 글처럼 그때 그 시절이 내게 창조성을 키워준 시간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 시절을 내 어린 날의 기억 중 가장 행복한 시절이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세월 탓일까?

세상은 있는 그대로가 내 마음에 드는구나.” 괴테의 <파우스트>에서 린쎄우스가 말한 시절이 바로 그 시절이었을 것이다.

 

언제나 고향은 그리움이고, 아련한 슬픔이다.

 

2026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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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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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교보샘 | 작성시간 26.06.21 new 그처럼 마음 깊숙히 사뭇치는 탯자리 어쩌면 우리땅걷기의
    산실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개인적으로 직감 합니다.
    기억이 사라지기전에 복원하는것이 역사적 자료가 되는길이라
    믿어 진안군에 노크하고 있습니다.
  • 작성자푸르른 날 | 작성시간 26.06.21 new 잘읽었습니다 고향생각 그립습니다
  • 작성자맹꽁이 | 작성시간 26.06.21 new 저도 잘 읽었습니다 그토록그리워 하셨던 선생님의 고향산천을
    직접 가보게 되어 매우 뜻깊은 하루였고 마치 제고향 인듯 가슴이 뭉클 했습니다
    글을 읽고보니 선생님의 문학적 감성이 자랄수 있었던 이유를 알게되었고 고향의 따뜻함 을 느낄수 있었습니다 늘 건강하세요
  • 작성자신정일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시간 49분 전 new 감사합니다.
    고향. 언제나 그리움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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