접시꽃 시 모음
접시꽃 / 박기섭
명부전 처마 밑에 접시꽃들 피었습니다
빈 접시 포개 들고 접시꽃들 피었습니다
때 묻고 이 빠진 채로 울먹울먹 피었습니다
부연 끝 풍경이사 먼눈을 팔건 말건
흐너진 돌탑이사 한숨을 짓든 말든
열릴 듯 닫힌 문밖에 엉거주춤 피었습니다
- 박기섭,『오동꽃을 보며』(도서출판 황금알, 2020)
접시꽃 / 송수권
흔들린다 대낮의 땅 그늘도
제 정적이 무서워 장독대 그늘로만
깊어지는, 저녁 햇살 기우는 날은
하얀 접시꽃 눈부시게 피어난다
그 디딤돌을 괴고 가만히 누가 와서
하늘 층계를 내려오는 소리
증조모, 할머니, 어머니 또 나의 내자內子까지
이 하얀 접시꽃 핀 장독대가 아니었으면
한 생生 어찌 곧은 소리 낼 수 있었을까
동구 밖 솔대* 위에 한 마리 새를 올려 놓고
새벽 하늘 밑 박우물을 파내어
대대로 그 물 떠다 치성드린 자리
오늘은 쓰러져 가는 옛집에 와
다들 한 자리 모여 층층으로 포개어져
흰 사발 같은 접시곷들 눈부시다.
*솔대: 솟대.
- 송수권,『언 땅에 조선매화 한그루 심고』(시학, 2005)
접시꽃 / 전기철
접시꽃은 날이 궂어도
잎을 오므리지 않고
날이 어두워도 꽃잎을 말지 않는다
여름 어느 날
안개에 가슴이 매여
교회의 종소리가 흐느낄 때도
접시꽃은 울지 않고
첨탑보다 더 깊은 사색의 표정으로
골목에서 찢어진 호주머니를 뒤지며
소나기에 젖은 십자가의
고독한 그림자를 어루만진다
사랑은 어머니의 적삼을 찢어 얼굴을 묻고
자유는 뜬 눈으로 별을 쏟는다
접시꽃은 울지 않는다
비가 오고 바람이 불어도
접시꽃은 울음을 삼키지 않는다
수녀가 남기고 간 구원의
땅을 가꾸기 위해
접시꽃은 잠들지 않는다
들풀떼 옹기종기 모여 있는 땅에
끌리는 자유의 그림자를 포기하지 않는다
- 전기철,『나비의 침묵』(모아드림, 1998)
접시꽃 당신 / 도종환
옥수수잎에 빗방울이 나립니다
오늘도 또 하루를 살았습니다
낙엽이 지고 찬바람이 부는 때까지
우리에게 남아 있는 날들은
참으로 짧습니다
아침이면 머리맡에 흔적없이 빠진 머리칼이 쌓이듯
생명은 당신의 몸을 우수수 빠져나갑니다
씨앗들도 열매로 크기엔
아직 많은 날을 기다려야 하고
당신과 내가 갈아엎어야 할
저 많은 묵정밭은 그대로 남았는데
논두렁을 덮는 망촛대와 잡풀가에
넋을 놓고 한참을 앉았다 일어섭니다
마음 놓고 큰 약 한번 써보기를 주저하며
남루한 살림의 한구석을 같이 꾸려오는 동안
당신은 벌레 한 마리 함부로 죽일 줄 모르고
악한 얼굴 한 번 짓지 않으며 살려 했습니다
그러나 당신과 내가 함께 받아들여야 할
남은 하루하루의 하늘은
끝없이 밀려오는 가득한 먹장구름입니다
처음엔 접시꽃 같은 당신을 생각하며
무너지는 담벼락을 껴안은 듯
주체할 수 없는 신열로 떨려왔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에게 최선의 삶을
살아온 날처럼, 부끄럼 없이 살아가야 한다는
마지막 말씀으로 받아들여야 함을 압니다
우리가 버리지 못했던
보잘것없는 눈높음과 영욕까지도
이제는 스스럼없이 버리고
내 마음의 모두를 더욱 아리고 슬픈 사람에게
줄 수 있는 날들이 짧아진 것을 아파해야 합니다
남은 날은 참으로 짧지만
남겨진 하루하루를 마지막 날인 듯 살 수 있는 길은
우리가 곪고 썩은 상처의 가운데에
있는 힘을 다해 맞서는 길입니다
보다 큰 아픔을 껴안고 죽어가는 사람들이
우리 주위엔 언제나 많은데
나 하나 육신의 절망과 질병으로 쓰러져야 하는 것이
가슴아픈 일임을 생각해야 합니다
콩댐한 장판같이 바래어 가는 노랑꽃 핀 얼굴 보며
이것이 차마 입에 떠올릴 수 있는 말은 아니지만
마지막 성한 몸뚱아리 어느 곳 있다면
그것조차 끼워넣어야 살아갈 수 있는 사람에게
뿌듯이 주고 갑시다
기꺼이 살의 어느 부분도 떼어주고 가는 삶을
나도 살다가 가고 싶습니다
옥수수잎을 때리는 빗소리가 굵어집니다
이제 또 한번의 저무는 밤을 어둠 속에서 지우지만
이 어둠이 다하고 새로운 새벽이 오는 순간까지
나는 당신의 손을 잡고 당신 곁에 영원히 있습니다.
- 도종환,『접시꽃 당신』(실천문학사, 1986)
접시꽃, 그 빛 / 김현주
아파트 한 동
다 태우고 있는 접시꽃
문득 보았다…… 할머니
읍내 장에서 나 앞세우고
돌아오는 길
머리에 인 보퉁이 속 사탕 못 잊어
옥양목 치맛자락 앞 차일 때마다
석양빛에 더 붉은
아랫동네 어귀 접시꽃에
잔잔히 내려놓던
'어여 가, 해 질라'
할머니 가슴속에서 타올랐을
그 붉은 빛을
오늘에야 보았다
뜨거움 감추며 타는 것을.
- 김현주,『저녁쌀 씻어 안칠 때』(천년의시작, 2016)
접시꽃이 걸어간다 / 정일근
접시꽃이 걸어간다. 좋은 봄날 다 보내고 걸어간다. 낮이 길어지고 해가 뜨거워질수록 제 꽃망울 속 열락의 꽃 차례차례 피워 올리며 걸어간다. 나무는 나무의 걸음걸이로 꽃은 꽃의 걸음걸이로 걸어가는 은현리 유월, 꽃 한 송이 피운 뒤에 또 한 송이 피우며 접시꽃이 걸어간다. 색색 양산 펴고 나들이 가듯 걸어간다. 느릿느릿 걷지만 저 뜨거운 속도, 사람이 숨어드는 그늘의 길 아니라 작열하는 햇살 속 불타는 길로 접시꽃이 걸어간다.
- 정일근,『소금성자』(산지니, 2015)
접시꽃 핀다 / 마경덕
접시꽃 담벼락 아래 튀밥장수 영감 지루한 하품이 손풍로를 돌린다 강냉이 마른떡국 콩, 손때 절은 깡통 일렬로 줄 맞추고 압력계기판 눈금이 달아오르면 담장 위 키다리 접시꽃이 아슬하다 고소한 냄새에 목을 뽑은 접시꽃 한 입만, 한 입만 빈 접시를 내밀고
뻥!
튀밥이 날고
쨍그랑!
접시 깨지고
얄팍한 소갈머리에 뭐 담을 게 있어 쯧쯧 혀를 차는 영감 평생 뻥만 치다 늙은 장돌뱅이 영감 속 깊은 자루에 튀밥을 담는 동안 귀가 먹먹한 접시꽃 재빨리 깨진 접시를 주워 모은다 층층 다시 접시가 쌓이고 저 튀밥 언제 한 입 먹어보나 쩍 입을 벌린 접시꽃 뜨거운 햇살이 뱅글뱅글 풍로에 감기고 담장 위 접시꽃 얼른 새 접시를 꺼낸다
- 마경덕,『사물의 입』(도서출판 가림토, 2016)
접시꽃이 피었다 /김신용
접시꽃 뿌리가 약이 된다는 것을 안 것은 섬에서였다. 서울 사는 딸네에게 보내주어야 된다며 옆집 할머니가 호미를 들고 찾아왔을 때, 마당가에 핀 키 큰 접시꽃의 뿌리를 캐어주며 이 말을 들었었다. 산모의 혈기를 돕는 데는 이 뿌리가 정말 용하당께. 그것도 흰 접시꽃 뿌리라야 되야!
섬의 빈집에 처음 몸을 풀었을 때, 마당에 핀 이 접시꽃을 보며 땅에 떨어지면 산산이 깨어지는 접시, 사기로 만든 접시일 뿐이라고 생각했었다. 둥글고 흰 접시에 한낮의 햇볕과 고요를 담아오는 접시꽃을 보며, 사기로 만든…… 그래 詐欺로 만든 접시일 뿐이라고…… 곡예사들이 긴 막대기 끝으로 빙글빙글 돌리고 있는…… 환상 방황 같은…… 순환회로 같은……
오늘, 도장골의 마당에도 접시꽃이 피었다. 여전히 마술과 같은 묘기의 회전으로 나를 현기증 속으로 침몰시키는 접시꽃, 생의 외줄기 길 같은……, 그 막대기 끝에서 지구의 자전처럼 회전하는 접시, 둥글고 흰 사기 접시.
오늘은 정말 접시꽃으로 피었으면 좋겠다. 경운기를 몰고 가다 논둑길을 굴러 머리를 다친 석이 엄마, 함몰된 頭部에 만들어 붙인 작고 둥그런 접시만 한 뼈, 활짝 접시꽃으로 피었으면 좋겠다.
그 병상에, 흰 접시꽃 뿌리를 한 웅큼 캐어주며, 오늘 접시꽃 뿌리를 몸속에 심었으니 이제 석이 엄마 머리에 하얀 접시꽃이 피겠네! 라며 농담을 건넸을 때처럼
일생을 밭이랑을 흐르며 살아 온 그녀, 기억상실을 앓으며 한낮을 마당에 접시꽃처럼 앉아 있는 그녀의 생의 접시에, 이제 정말 산뻐꾸기 울음소리가 담겼으면 좋겠다. 다람쥐가 찾아와 한나절을 놀다 갔으면 좋겠다.
- 김신용,『도장골 시편』(천년의시작, 2007)